한국식당이 일본식당을 먹여살린 비결

[세계의 한국식당① 발트 3국] 당당해야 살아남는다

등록 2010.01.14 11:42수정 2010.01.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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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외국 거리를 걷다가 한국식당을 만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간만에 입맛에 맞는 우리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우리 음식문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고맙기도 합니다. 요즘 '음식 한류'가 불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한국식당은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들이 새해를 맞아 전세계의 한국식당들을 집중 탐구해봤습니다. 일반 시민기자 여러분들도 자신들이 겪은 한국식당의 추억이나 제안이 담긴 글을 올려주시면 적극 배치하겠습니다. [편집자말]
요즘 한국 음식의 세계화가 대세다. 떡볶이, 막걸리 등을 위주로 한 한식의 세계화는 이미 중요한 정부 프로젝트로 자리매김 되었고, 사회 각층에서 다각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 세계화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시험대는 미국과 일본이 대부분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 음식이 먹혀들어간다면 다른 지역에서의 성공도 반드시 보장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유럽의 경우는 어떨까.

라트비아와 국경지대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의 인구 7천명의 작은 도시 발가에서 발견한 한국식당. 간판 이름은 바로 '호랑이'라는 뜻. ⓒ 서진석


유럽 변방의 작은 지역인 발트 3국은 전체 면적이 한반도에도 못 미치고 인구도 서울보다 적다. 하지만 그 곳의 시장상황은 나라마다 다른 환경과 조건으로 인해 상당히 차별화돼 있어, 한 국가에서의 성공이 바로 이웃나라에서의 성공을 보장한다고 단언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음식만 해도 그렇다. 이 작은 나라들의 경우도 이런 판국이니, 미국과 일본의 잣대에만 비추어 유럽 내에서의 성공을 낙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에스토니아] 한국 식당은 많은데, 맛이...

발트3국의 제일 북쪽 에스토니아에 사는 내 친구 한 명은 세상에서 인도영화와 한국음식을 제일 싫어한다. 인도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 구소련 시절 예술성이나 재미나 검증되지 않는 인도영화가 텔레비전에서 마구잡이로 상영되어 식상해진 이유이다. 한국음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맛이 없어서이다.

에스토니아는 수도 탈린뿐이 아니라 인구 수 천 명의 작은 도시에서도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정도이니 유럽 전체에서도 한국음식이 가장 대중화된 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려인들이 한국의 맛을 흉내내 요리하는 수준이라서 현지식도 한국식도 아닌 아주 애매한 음식들이 대부분이고, 게다가 러시아인들의 입맛에 맞춘 중앙아시아 음식이 더 많아 에스토니아 현지인들은 잘 찾지 않는다. 심지어 한국에는 전혀 없는 '이상한 한국요리'들도 상당히 많다.

인도영화의 경우 내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예술성과 재미를 겸비한 볼리우드 영화를 같이 감상하면서 많이 좋아하게 되었지만, 한국 음식의 경우 그 친구를 직접 서울에 데려가 음식을 맛보여주지 않는 한 인식을 바꿔 주기는 아주 어려워 보인다. 에스토니아의 적은 인구 때문인지 에스토니아에는 일본식당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게 보면 대중화 차원에서만 볼때 한국음식은 에스토니아에서 웬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 수많은 일본식당 조리사는 대부분 한국인


또 다른 사례는 한국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일본음식으로 착각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제일 아래쪽 리투아니아는 현재 공식적으로 한국식당이 하나도 없다. 한때 한국식당이라는 이름을 단 중국식당이 잠시 영업을 하다가 문을 닫은 것이 전부다.

그 외에 수도 빌뉴스를 비롯해 대도시에는 일본음식점이 진작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들이 대부분 한국인들이라는 것이다. (이웃나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일본식당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유명한 일본식당에는 이미 한국 주방장들이 포진해 있고, 가끔 한국 가요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주방장을 통해 메뉴에 나와있지 않은 한국음식을 특별 주문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은 한국음식을 아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본식당에 자주 다니는 리투아니아인들은 김치나 불고기 같은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일본음식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발트3국 한가운데 위치한 라트비아에는 위 두 가지를 뛰어넘는 아주 고무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곳이 있다. 수도 리가 구시가지 한 구석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라트비아 유일의 한국식당 '설악산'은 2000년에 문을 연 이후로, 수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열고 닫은 기간을 견뎌내고 올해 개점 1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정통 한국음식으로 승부하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한국식당 '설악산'. 현지인들은 모두 한국식으로 식사를 한다. ⓒ 서진석


[라트비아] 리가 한복판의 한국적 분위기... "아, 놀라워라"

이 식당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단지 맛 뿐이 아니라 식당에 들어온 손님들의 눈을 사로잡는 한국풍 내부장식이다. 식당 전체에는 훈민정음 글귀가 우아하게 담긴 벽지로 장식되어있고, 다양한 색의 한지로 만든 등과 초가집 분위기의 주방, 그리고 한복을 입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현지 종업원들을 보고 나면 다름 아닌 한국에 찾아온 느낌마저 들게 한다.

유럽 대부분 한국식당이 현지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방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라트비아에 사는 한국교민 자체가 없는 관계로 이 식당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현지인들도 김치찌개와 육개장, 불고기 등을 서슴없이 주문해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유럽에 세워진 다른 한국 식당들이 현지인의 입맛에 맞추느라 자칫 밍밍하기 쉬운데, 한국인의 입맛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콤하다. 그런 이유로 이 식당을 방문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음식 자체로 성공을 거둔 좋은 예라고 입을 모으곤 한다.

이웃나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달리 한국음식 만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설악산 식당의 최일영 사장(37)은 중국 유학 시절 만난 라트비아 여학생과 결혼을 해서 지난 2000년 리가로 이주해와 식당을 열었다. 처음엔 의료기구 같은 한국의 물건을 라트비아에 수입해서 팔아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고, 우연찮게 라트비아 처갓집 식구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해줬다가 맛에 반한 처갓집 식구들이 그에게 리가에서 한국 음식점을 열어보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설악산 식당의 메뉴판. 돼지갈비, 주물럭, 돼지불고기, 소불고기 등의 한국음식이 현지어로 씌어있다. ⓒ 서진석


한국 음식맛 처음 본 처가집 식구들 때문에

당시 라트비아는 외식산업이 그다지 발달되어있지 않았던 시절. 그는 리가 시민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중저가의 음식을 위주로 문을 열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단 한국음식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현지인들에게 생소한 한국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식당의 내부장식이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 것이다.

하지만 맵고 강한 맛은 현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최일영 사장은 현지인 부인과 고민 끝에 매운 맛의 강도를 현지인들이 부담 없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그 결과 육식을 좋아하는 라트비아인 취향에 맞는 불고기와 눈으로부터 먹기 시작하는 비빔밥을 중심으로 인기몰이에 나섰다. 처음에는 한국인들도 냄새가 고약하다고 느끼는 청국장까지 메뉴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이 지나며 한국의 맛에 중독이 되다시피 한 단골손님들이 점차 늘어났고, 현재는 개업 당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매운 맛으로 돌아간 상태. 김치만 별도로 사가는 사람도 생겼고, 한국인에게도 매운 육개장을 즐겨먹는 사람도 등장했다.

'설악산'의 성공 이후 그는 한국식당보다 더 목이 좋은 구시가지 광장 한켠에 일본식당도 개업했다. 타 지역의 일본식당과 마찬가지로 그 식당 역시 한국조리사들이 요리를 담당했다. 초기에는 일본식당의 매출이 한국식당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관광객들이 많은 여름철에는 일본식당의 매출이 조금 더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따뜻한 음식을 찾는 손님들이 다시 한국식당으로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식당은 단골이라는 튼튼한 기반이 갖춰져 있었다.

불황에 휘청거리는 일본식당, 거뜬한 한국식당

한국음식의 위력은 라트비아가 엄청난 경제위기를 겪은 2009년 올해 확연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일본식당의 매출은 점차 줄어들었고 문을 닫아야할 위기에 직면했으나, 한국식당은 반대로 매출이 더욱 늘어 일본식당의 손해를 메워 주게 된 것이다.

바로 가격 차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식당의 경우 주로 스시 같은 생선 종류의 음식이 주를 이루므로 원자재 수급이 어려워 가격은 전반적으로 고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음식은 몇 가지 기본적인 양념만 제외하면 대부분 라트비아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굳이 고가를 고수해야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설악산'에서 판매되는 음식들이 대부분 우리 돈 1만 원 이하로 책정되어 물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리가의 외식업체 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곳에 속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브랜드와 이미지에 집착해 가격을 높게 잡지 않은 사장의 업무방식이 어려운 시절에 빛을 발한 것이다.

최 사장의 한국 식당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식당에서는 음식보다 한국 자체를 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라'는 선배의 충고가 큰 작용을 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한국음식의 세계화에 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선배의 충고 '한국을 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라'

설악산 식당 최일영 사장과 중국동포 주방장, 개량한복을 입은 현지인 종업원.(왼쪽부터) ⓒ 서진석

그의 말에 의하면, 다른 지역에서 한국 주방장이 일을 하면서 일본 식당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은 안전하게 성공과 수익을 거두기 위한 사업의 한 방향일 뿐 지탄 받거나 비판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리도 아이디어다. 원칙을 유지한 현지화의 아이디어와 맛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면 충분히 한국음식을 앞에 내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단기적인 차원이 아니라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연구와 아이디어 개발이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리가 시내에서도 일본식당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심지어 김치를 일본음식으로 알리는 식당도 다수 존재할 정도로 한국음식의 설자리는 계속 위태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난 주 있던 세계여성의 날 바자회에 직접 김치를 들고 나가 김치가 한국의 음식임을 알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어정쩡하게 현지식으로 번역해 사용하는 대신 우리말을 그대로 라트비아어식으로 병기한 메뉴를 사용한다. 처음엔 종업원들이 '오징어볶음', '돼지불고기' 등 어려운 발음의 음식이름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으나 지금은 메뉴를 보지도 않고 바로 한국식 명칭으로 주문을 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고.

그는 리가 시내에 더 큰 분점을 내고, 빵과 김치, 불고기 등을 결합한 퓨전음식을 개발하는 계획이 있으나, 지금은 라트비아의 경제 상황이 많이 개선되기를 잠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복잡한 현지의 규제법규와 용이하지 못한 한국 식자재 수급 환경 때문에 메뉴의 다양화에는 아직도 복병이 많다.

한국만두를 한국만두라 말하지 못하고...

얼마 전 나는 리투아니아 대형마켓에 들렀다가 두 번 놀랐다. 바로 한국에서 즐겨먹었던 우리식 만두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에 한번 놀랐고, 그 만두가 한국만두가 아닌 일본만두로 판매되고 있어 다시 한번 놀랐다.

단무지와 김치, 당면들이 들어있고 전라북도에 위치한 공장 주소까지 적혀있는 100% 한국만두였다. 한국보다 일본을 앞세워 사업을 했을 때 실패의 확률이 더 줄어들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바로 그 만두 이름을 짓는데 큰 작용을 했으리라 믿는다.

라트비아의 한국식당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강하게 비틀어주는 좋은 예가 되는 것 같다. 한국음식을 한국음식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어서 도래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한국식당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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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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