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치매 선고, 약물 중독... 아, 어머니!

치매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의료원리를 생각하다

등록 2010.01.16 12:31수정 2010.01.19 18:0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어머니 모습. ⓒ 김수복


이제 딱 일 년이 되었다. 일 년 전의 오늘 깊은 밤에 어머니는 젊은 아들 내외가 잠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믐 즈음이었다. 희미한 별빛과 그믐달이 창문으로 비쳐들어 사방이 안개 속처럼 희미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움직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 문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어떤 공포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인기척에 눈을 뜬 며느리가 잠결에 희끗한 그림자를 보고 심장이 멈출 듯이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살이 떨리고 머리끝이 삐죽삐죽 솟아올랐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움직이는 존재가 시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그 정도에서 끝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젊은 아들의 심사는 복잡했다. 자다가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아내를 그토록 놀라게 한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 그 뒤를 잇는 어머니가 왜 저러시는가 하는 의아함, 까닭도 없는 배신감으로 심사가 뒤죽박죽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샌 다음 날이 밝아서 일단 출근을 했다.

며느리는 직장에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시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갔다. 이런저런 검사를 거친 뒤에 의사는 치매라고, 그것도 중증이라고 최종 선고를 내렸다. 며느리는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서 약을 받았고,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큰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중증? 치매가?"
"예."
"밤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너희들 방문을 열어젖히고 그런다고?"
"예."

돌장이 되기로 결심한 뒤 들려온 어머니 치매 소식


통화를 하는 내내 여러 가지 그림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심술궂은, 참으로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꼴이 보기 싫고 미워 죽겠을 때 하는 여러 유형의 행동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았다. 밤중에 아들 내외가 잠자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시다니. 영화나 소설에서나 접했던 그런 일이 내 어머니에게서 나타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일 터이었다. 하늘이 땅이 된다 해도, 다른 어머니라면 모를까 내 어머니는 그런 행동으로 아들 내외를 당혹스럽게 할 리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슬픔을 보면 외면하지 않고 그냥 껴안고 함께 넘어져 버리는 어머니였다. 오랜 세월 병치레를 한 당숙모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먼 하늘이나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표정도 없이 먼 하늘이나 보고 있는 그 모습이 내게는 그 어떤 울음이나 슬픈 표정보다도 슬퍼 보였다. 찢어지게, 가슴이 미어지게 슬퍼 보였다. 그런 어머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치매 아니라 별 것이 왔어도 기본이 있는데 어찌 그렇게 아들 내외가 잠자는 방문이나 열어젖히는 고약한 시어머니로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무렵에 나는 광주에서 돌을 만지고 있었다. 그 나이에 무슨 새로운 일을 배우겠다는 것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나도 나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큰 것은 개당 80kg이 넘는 화강암이나 편마암 같은 돌을 등에 지거나 밀바로 밀어다가 승강기에 실어주고 남는 시간이면 다른 돌을 들여다보는 일로 직업을 삼고 있었다. 나이가 사십을 넘은 사람은 위험하고 성과도 별 것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을,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두 손을 싹싹 비벼가며, 그야말로 어렵사리 얻어낸 견습공 자리였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아주 빡세게 힘든 일을 좀 해보고 싶었다. 내 자신의 어떤 부분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원양어선과 탄광이었다. 그런데 탄광이나 원양어선 같은 데는 조직과 검증력이 워낙 탄탄해서 면접도 보기 전에 탈락, 탈락 소리만 듣다가 기적처럼 발견한 것이 그 일이었다.

듣기 좋고 우아하게 말하자면 스톤아트요,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석수장이 혹은 돌장이가 되는, 거대한 돌을 자르고 깎고 다듬어서 본래의 돌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 일이 내게는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해볼 수 있는 마지막 장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닌 말로 사력을 다해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일에 올인하고 있었다.

서서히 약물에 중독돼신 어머니

그런 와중에 걸려온 아우의 전화는, 그 내용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전화기를 그냥 없애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랬다. 피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의무만 잔뜩 지워주는, 권리는 하나도 없는 장남의 자리를, 큰아들의 자리를 패대기치고 싶었다. 그래서 한 주일 가까이나 시간을 끌다가, 보이지 않는 줄에 코가 꿰인 소처럼 어머니가 계시는 아우 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온 몸이 놀랍도록 부풀어 오른 어머니를, 눈도 거의 안 보일 정도로 퉁퉁 부어오른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주름을 펴준다고 하는 약제 보톡스를 아주 잘못 맞으면 나타난다고 하는 그런 현상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무슨 작용을 했길래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나.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마 제수씨에게 그것을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아우에게 이런 질문이나 했을 뿐이었다.

"엄마가 지금도 한밤중에 너희 방문을 열고 그러냐?"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쓰면서부터는 안 그래요. 잠도 잘 주무시고."

그래, 그것이었다. 약물. 그 약물이란 정신병원 같은 데서 쓰는 신경안정제 계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경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활동하는 세포를 하나하나 마비시키거나 죽여준다고 해석하는 게 아마 정확할 터이었다. 그러니까 아우가 말하는 '잠을 잘 주무신다'는 것은 실제로 잠을 잘 주무신다기보다 일종의 마취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어머니의 동공을 풀려 있었고, 말을 해도 느리게 마치 무슨 실타래가 엉킨 채로 있다가 조금씩 풀리는 것처럼 어눌하고 단어의 조합이 거의 안 되고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그 한심한 시간 동안 어머니는 약물에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우와 그 색시에게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약은 아우 내외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병원해서 처방한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물을 설령 맹신까지는 안 한다 하더라도, 병원이라는 공신력 플러스 알파라고나 할 어떤 신뢰감 같은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해 여름 어머니가 실종되는 바람에 꼬박 하루 한나절을 동분서주 우왕좌왕 가슴을 졸이며 얼굴은 사색이 된 채로 뛰어다닌 제수씨를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여섯 살 여덟 살 두 사내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로 어렵사리 집 지을 때 쓴 융자금을 갚아나가는 살림살이기도 했다. 하우스 농사를 짓다가 왕창 망해 버리고도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아우 내외가 설령 어머니가 계신 방문을 출근할 때마다 자물쇠로 잠근다 해도 나로서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돌장이 되길 포기하고 어머니를 모시다

a

어머니 ⓒ 김수복


돌아보면 어머니를 아우에게 떠맡긴 것부터가 사실은 잘못이었다. 잘못은 잘못이었지만, 그러나 그 당시로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큰아들이 마누라도 없이 혼자 산다고 해서 어머니는 큰아들 보기를 불쌍한 이웃 보듯이 하셨다. 늙은 '홀엄씨'가 홀아비 아들에게 얹혀사는 것은 수치라고, 창피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도무지 밖으로 얼굴 내미는 것을 싫어하셨다. 마을에서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나는 없는 사람이다"하고 구석으로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어머니의 그런 이상한 수치심은 요지부동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육 개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결국 7개월여 만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어머니를 아우에게 모셔가야만 했다. 그 뒤로 일 년 반, 그동안 어머니는 한 차례 실종 소동을 거치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시고 별 큰일은 없었다. 그렇게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라는 말 그대로, 한밤중에 잠든 아들 내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등 치매도 보통이 아닌 중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요양원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안 섰다. 요양원 의자에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서 먼 산을 향해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목구멍에서 그만 핏덩어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간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렵게 얻은 스톤아트 아니 돌장이 견습공 자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사실은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다만 어렵게 얻은 견습공 자리를 포기해야 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을, 그에 따르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었다. 나이가 사십이 넘은 사람은 견습공으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나를 채용해준 사장님에게 그만둔다는 말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내가 만일 사장님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원칙을 깨고 받아들인 견습공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이빨을 뿌득뿌득 갈아가며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헛된 맹세를 하게 될 터이었다.

병원 약보다 효과 있었던 그것은

그런저런 이유로 한 달 반 동안이나 시간을 더 허비한 뒤에서야 나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은 끊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나는 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어머니를.

"왜 그래요?"

아 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다급하게 물어보았지만 어머니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계속 움직이기만 했다. 여기저기 더듬거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다. 어머니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요의가 느껴져서 일어나신 거였다.

그런데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또 왜 그러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고, 불을 켰고, 어머니는 또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그런 일이 아침까지 반복되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화장실 출입은 삼십여 분, 혹은 한 시간여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문득, 하늘의 계시처럼, 조상의 지혜처럼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밤새 불을 켜놓으면 되지 않겠나? 아, 그래,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결코 자식들이 괘씸해서도, 고약해져서도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자다가 일어나서 어둠 속을 헤매는, 잠든 아들 내외를 소스라치게 했던 것은 전등 스위치를 켜고 끄고 하는 방법을 망각해 버린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방황이었을 뿐이었다. 그랬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켜고 끄지도 못하고, 전등을 켜고 끄지도 못하게 되신 거였다.

기억이, 특히 최근의 기억이 사라지는 증세, 그것이 치매인 것을, 그 간단한 원리를 무시하고 약물처방으로 잠만 자게 해주는 의료행정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약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서도 일 년이 다 된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다. 밤새 불을 켜둬야 '낭비'는 있지만 말이다.
#치매 #약물남용 #어머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7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