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먹고 사는 제국주의 문화

The Culture of Make Believe (거짓된 진실)

등록 2010.01.25 16:18수정 2010.01.2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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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국의 사회 환경 운동가인 데릭 젠슨(Derrick Jensen)이 쓴 다른 책 <Endgame>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찾은 책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 두께에 약간 질렸지만 그 안의 내용은 밤잠을 설치게 할만큼 괴롭고 섬뜩한 진실로 가득하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주며 확인사살해 주는 그의 글 한줄 한줄은 먹먹해진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파서 피를 흘리게 한다.

"잘려나간 기도를 통해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나오는 음울한 트럼펫소리(그외의 다른 어떤 표현을 해야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를 듣는 것은 참 측은한 일이었다...."
-본문 중에서-

백인 침략자들의 원주민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간 관련돤 책도 여러권 읽고 다큐멘터리도 많이 봤지만 여전히 이런 부분을 접할 때마다 정말 마음이 찢어진다. 군대가 오기전까지 거짓 평화협상을 하는 척 하다가 한밤중에 마을을 기습해서 원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후 남아 있는 가축들까지 다 없애라는 명령을 수행한 후 한 병사가 남긴 코멘트. 그러나 이 병사의 동정심은 결코 원주민 여성이나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코멘트는 이 병사가 거칠게 날뛰는 원주민들의 말을 쏴죽인 후 남긴 것이었다.


이 책은 이십세기 초반에 흑인들에게 가해졌던 남부 백인들의 엄청난 폭력을 묘사하면서시작된다. 수십페이지에 걸쳐 지난 백여년 동안 미국내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진 끔찍한 살인과 고문 그리고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살인의 증거를 아주 구체적으로 들이민다. 그렇다면 이런 증오(hatred)의 뿌리가 무엇인가 혹은 이런 현상들을 단순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과 함께.

내가 누군가를 그 사람 자체가 싫어서 (이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진 않겠지만) 미워하는 것과 그 사람이 흑인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아랍이기 때문에 동성애자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후자는 내가 그 상대방이 누구인가는 관심없이 그 사람이 내가 용인하지 않는 어떤 범주에 들어있다는 것, 즉 철저히 상대를 대상화시키기(objectify) 때문에 가능한 미움이다. KKK를 비롯한 여러 폭력적인 그룹들의 증오 범죄(hate crime)들은 과연 "미움"의 감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가? 그렇다면 미국 주류 사회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KKK로 대표되는 "나"와 상관없는 일부 극소수(무식한) 백인들의 "상상하기 힘든" 증오 범죄를 제외한다면 피비린내는 인종차별은 미국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고대부터 시작된 노예제, 그 강압된 노동속에 피어난 문명, 유럽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노예제, 그리고 시작부터 원주민에 대한 대량 살상과 철저한 강탈로 시작된 나라 미국의 역사. 서양 문명의 경제적 뿌리와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타인(other)에 대한 대상화와 사람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그 안에 내면화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수탈과 착취의 뿌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금의 자본주의 안에서 임금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 제 3세계의 노동력 수탈로 얻어지는 값싼 소비재들.. 값싼 컴퓨터(조립하는 과정에서 접촉하는 유해물질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암에 걸린다고 함), 신발, 옷, 우리집안을 꽉 꽉 채운 물건들.. 그것으로 이윤을 얻는 기업인이나 그 물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처한 노동조건과 그들이 받는 건강의 위협을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해도 그 착취 시스템의 끝을 잡고 받아먹는 단물을 거부하기엔 우리의 삶은 이미 이 "문명 사회" 안에서 속속들이 길들여져 있다.

공해 산업을 그 오염의 후과를 처리하는데 훨씬 저렴하고 편리한 저개발국으로 옮기는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World Bank 간부나 장시간 열악한 조건에서 하루1-2달러도 안되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제 3세계 노동자를 수탈하는 기업주나 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끔찍한 환경에서 동물들을 사육하고 도륙하는 기업의 동기는 증오가 아니라 이윤이다. 착취당하는 대상에 대한 그런 철저한 무시와 경멸이 함께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윤추구 시스템이다.


"나는 오늘 차 범퍼에 붙은 스티커에 쓰인 이런 문구를 봤다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없애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다' 나는 그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사법 제도도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경찰력도. 그리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도.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도. 부자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믿음 또한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없애지 못하게 한다. 그들과 같이 되고 싶다는 그 욕망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자들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 어떤 이유도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중략..미국의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은 Failure to Quit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문제가 아니라 시민 복종(civil obedience)이 우리의 문제다. 우리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부가 전쟁에 나가라고 강요했을 때 순순히 따르는 것이며 이 복종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과 어리석음과 전쟁과 잔인함에 맞닥뜨렸을 때 그냥 복종해버리는 것이다. 정작 감옥은 좀도둑들로 가득 채워놓고선 정말로 큰 도둑놈들이 나라를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바로 그 도둑놈들에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본문중에서-

부조리하고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세상에 저항하다 모진 일을 당하는 것보다 적당히 임금 노예로라도 살아남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인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게다가 나보다 더 많이 착취당하는 노예들이 제공하는 떡고물이 조금이라도 내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 편안함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댓가라면. 나보다 더 힘없는 어린아이들의 피와 땀에서나온 것이라면. 우리의 선조가 수천년동안 살았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  환경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상황으로 망가뜨리면서 나온것이라면...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우리에게 싼값의 초콜릿과 커피를 대주기 위해 살인적 환경에서 혹사당하고 있는 지구 건너편 사람들, 혹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다가 쫒겨나는 우리 주변의 외국인노동자들, 그리고 일년내내 뼈빠지게 농사짓고 제 값을 받기는커녕 빚만 늘어나는 우리 농부들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사소한 것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corporateglobalization)의 기치 아래 사람과 생명의 가치를 짓밟으며 끝없이 이윤만을 위해 확대 재생산되는 다국적 자본주의안에서 대상화되고 수단화되어 수탈당하는 이 세상 많은 노예 노동자들이 나와 똑같이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 숨쉬는 인격체라는 것을,우선 그 존재를 인정하고 보고 느끼고 알아가는 것부터. 더딘 걸음이나마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지.

( 한국에는 이 책이 <거짓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고 함.)

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아고라, 2008


#제국주의 #증오 #인종주의 #노동착취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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