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는 '노마드'가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1] 밀리언 스타스 호텔을 내 품 안에

등록 2010.01.28 17:21수정 2010.01.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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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겨울 여행의 처음.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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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안 뒤로 '밀리언 스타스 호텔'인 에르미타 익스프레스가 서 있다. ⓒ 지은경


"우리가 묵을 호텔은 별 하나짜리도, 별 다섯 개짜리 호텔도 아니야, 밤하늘이 가득 채워지는 밀리언 스타 호텔(Million Stars Hotel)이야."

바로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그의 노란 르노 승합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자, 밀리언 스타스 호텔을 한 번 둘러볼자. 우선 화장실? 낮에는 여행 중 지나는 레스토랑이나 주유소, 카페다. 밤은 그야말로 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을 머리 위에 얹고 대자연을 눈앞에서 만끽하는 숲 속의 풀들 사이이다.

그다음. 샤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지나치는 마을들의 유스호스텔이나 화물차량 운전자들의 휴게소 등에 설치된 샤워 부스에서 졸졸 흐르는 따뜻한 물을 이백 배 이용해야 한다.

"Petite fille de la grande ville!(대도시의 작은 소녀!)"

수많은 하이힐이 방을 가득 메워도 등산화 한 켤레 가지고 있지 않은, 보이는 자연에만 감탄할 뿐 만지고 느끼는 자연에는 무지했던 나를 일컬어 그는 장난 삼아 그렇게 부르곤 한다. 이런 내가 밀리언 스타스 호텔인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과연 앞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수고한 자에게만 그 아름다운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는 것을 스페인으로 떠나긴 전 한국에서 그와 함께 올랐던 한라산과 북한산의 정상에서 깨달았다.


여행의 첫발을 내디딘 지금, 한 눈에 모두 채울 수 없는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3개월의 수고스러운 여행 뒤에 자연은 내게 어떤 모습을 선사할 것인가? 그리고 가난한 사진작가 세바스티안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될 것인가? 또 이 여행 뒤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

이 모든 물음은 오직 여행의 끝 무렵에만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홀로 움직이는 자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치품이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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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온통 하얀 눈에 파묻혔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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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눈꽃들과 함께 떠나는 에르미타 여행의 처음. ⓒ 지은경


"눈이 오고 있어. 눈은 소리를 내며 내리지는 않지만 주위의 모든 소음을 흡수하지."

한밤중에 그가 말했다. 유난히 고요했던 밤이 지나고 아침에 창문을 열자 그의 말처럼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놓고 있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은 눈의 화려한 하얀색에 싸여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순간은 매우 이른 아침,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 처음 홀로 움직이는 자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치 품목 중 하나같았다. 가장 사치스러움은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짧은 시간을 극도로 빛나게 해주는 그 무엇, 바로 자연인 것이다.

다행히도 그 최상의 사치 품목은 가난한 자이건, 가진 자이건 간에 수고하는 자에게 똑같이 부여되는 기쁨이다. 그리고 길을 벗 삼아, 집 삼아 떠나는 일을 삶으로 하는 '노마드'는 자연이 주는 그 호사스러움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첫 방문지 '소리아 비얄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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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행을 함께할 핀홀카메라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 지은경


온통 하얀 세상을 첫 번으로 밟으며 우리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에 올랐다. 스페인의 신비로운 지형의 눈 덥인 시골 길들, 두꺼운 눈 이불을 들 쓴 노란색 승합차가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굽이굽이 기어가고 있었다.

2시간쯤 뒤에 도착한 마을은 소리아(Soria)의 비얄라로(Villalvavro)였다. 그곳의 비르젠 데 라스 라구나스(Virgen de las Lagunas) 에르미타는 이 고장의 붉은 흙으로 지어진 특별한 건축물이었다. 장식적인 부분을 소박하게 담아내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잘 어울리는 재료 중 하나는 바로 흙이다.

그는 네 번이나 사진을 찍으러 왔었다. 한 번은 빛이 너무 밝은 이유로, 또 한 번은 붉은 땅 위에 푸르게 돋아난 풀들 때문에 계속 촬영에 실패하고 말았었다고 한다. 작년 겨울은 빛도 알맞았고 풀들도 아직 돋아나지 않아 붉은 땅의 황량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진 속의 구도가 문제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그가 말했다.

"이번 해에는 꼭 성공을 해야 할 텐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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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젠 데 라스 라구나스(Virgen de las Lagunas) 에르미타 앞에 세바스티안이 서 있다. ⓒ 지은경


그의 잔뜩 고조된 얼굴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서로 마블링처럼 얽혀 있었다. 하늘색도 짙은 회색빛이었고 붉은 흙과 풀이 돋은 땅의 조화도 눈으로 덮여 있어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마을의 좁은 길과 언덕을 돌아 지나자 멀리 에르미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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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인 비르젠 데 라스 라구나스(Virgen de las Lagunas) 에르미타의 내부 모습. ⓒ 지은경


그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에르미타의 모습이 50미터 앞으로 다가섰다. 이번 역시 꿈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눈앞에 펼쳐진 늙은 에르미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갈라지고 상한 곳을 수리하고 있는 터라 이번 역시 사진 촬영은 불가능한 듯했다.

교정 틀을 끼고 비웃는 듯한 에르미타 앞을 세바스티안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그 주위를 빙빙 돌며 허탈한 웃음을 쏟아냈다.

노마드가 누리는 최소한의 사치는 크리스털 포도주 잔

2010년 에르미타의 첫날, 아무런 수확도 없이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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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 익스프레스에서의 식사. ⓒ 지은경

그는 삼발이와 카메라 가방, 사다리, 옷 가방 등으로 가득 찬 승합차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한쪽 벽에서 침대가 내려오고 다른 쪽 벽을 열자 작은 부엌이 만들어졌다.

여행 떠나기 전 올리브 오일에 담근 구운 채소와 바게트 빵, 그리고 크리스털 유리잔에 들은 포도주가 그날의 저녁 메뉴였다. 모든 것이 최소한의 부피로 최대한의 실용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것이 떠나는 노마드(nomad, 유목민)가 지녀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털 포도주 잔을 치켜들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것이 노마드가 누리는 최소한의 사치야. 가진 것 없는 유목민일지라도 가끔은 이런 작은 사치가 삶을 풍성하게 해 주지."

유난히 크게 울리는 바람 소리는 가끔 승합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빈털터리의 마음으로 가장 작은 공간 안에서 여유로운 크리스털 잔 속 포도주에 취하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에르미타 #노마드 #세바스티안 #스페인 #소리아 비얄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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