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저 잘렸습니다

[공모-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살얼음판 걷듯 살아 온 비정규직 10년

등록 2010.03.07 14:34수정 2010.03.0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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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경의 아내 모습. 이 무렵 아내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러 갔습니다. ⓒ 변창기


한달 월급 70만 원, 도무지 생활이 안돼


지난 2000년 5월경 서울 살다가 울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서울서 한번 살아 볼 거라고 2년 전인 1998년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학벌없고 기술도 없는 내가 먹고 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찾다 찾은 직업이 은행 청원경찰이었습니다. 당시 한 달 70만 원이 월급이었습니다.

은행서 직접 고용하는 게 아니라 보안업체를 통해 연결되는 비정규직이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기엔 늘 부족한 생활비였고 부족분은 친인척에게 빌려 생활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 아이들이 커가자 도무지 은행 청경 자리로는 생활이 유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울산 집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입니다.

울산 내려오고 2개월간 직장을 못 구했습니다. 직업소개소도 가보고 노동부 직업안정소도 가보았습니다. 몇 군데 서류를 넣어 봤으나 나이 많다고 퇴짜 맞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급 2100원 받고 들어갔지만 더운 밥, 찬 밥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7월 초.

서울 생활 2년. 울산 내려온 지 2개월. 그렇게 세월 보내고 나니 여기저기 얻어 쓴 빚이 1000만 원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쉬는 날도 없이 일이 있으면 모두 출근했습니다. 기본 생활비 해결하고 돈을 모아 1000만 원 빚 갚는 데 5년 정도 걸린 거 같습니다. 아내 친인척에 빌려 이자는 싸게 나갔지만 적은 월급에 그 이자도 만만찮아서 5년 후 퇴직금 중간정산해서 모두 갚았습니다.

지난 2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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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위해 비정규직 노조를 탈퇴하면서까지 일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결국 해고뿐입니다. ⓒ 변창기


2005년경 불법 파견 문제가 노동계에 떠올랐습니다. 현대차 울산공장에도 비정규직 노조가 생겨나고 저도 정규직 한번 되어 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정규직화를 내걸고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여 함께 싸웠습니다. 2년여를 싸웠지만 허사였습니다. 법원서 합법 도급 판정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누가 봐도 파견업체인데 말입니다. 도급이라면 작업장 자체를 하청업자가 소유해서 하청을 맡아 함을 말하는데 자동차 공정은 원·하청 함께 일하고 있는데도 합법 도급이라고 합니다. 어처구니 없는 판결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불법 파견 투쟁으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강제해고 당했습니다. 저도 해고될 처지에 놓였지만 비정규직 노조 탈퇴하면 봐준다고 해서 가족의 생계 걱정에 탈퇴하고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제가 일하는 공정이 외주업체로 넘어간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 왔습니다. 그 뒤 매일 출퇴근이 살얼음판 걷는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작년말 새로운 부품공장을 만든다고 발표가  났습니다. 그리고 2010년 2월 드디어 자세한 내막이 드러났습니다.

계획에 따르면 3월 14일부로 공장 가동 멈추고 새 부품공정 라인 증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다고 합니다. 제가 일하는 공정은 매암동 외주 공장으로 이동한다네요. 정규직은 1년간 유급 휴직을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는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태입니다. 얼마 전 하청 소장이 찾아와 말합니다.

"사내 다른 업체에 공문을 보내 다른 일자리 알아보고 있지만 별로 기대할 수 없어요. 무급 휴직 처리하여 1년후 공사 끝나고 다시 부르려 했지만 원청에서 말도 못 꺼내게 합니다."

지난 주엔 기계 설비를 뜯어가 생산할 업체에서 담당자분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10년 일했는데 거기 따라가서 일할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은 시급과 나이를 물어본 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습니다.

"우린 사내 하청에서 받는 만큼 못 드립니다. 최저생계비 정도로 급여가 책정될 것입니다. 나이도 걸리네요. 젊은 사람도 일할 사람 많은데 나이든 사람 쓰려 하겠습니까?"

저의 경력도 인정할 수 없고 사내 하청과는 일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저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절 당한 것입니다.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사내 하청에선 지난 10여 년간 열심히 일해 주었건만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고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미안하다' '이해해 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하긴 하청업자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인건비로 먹고 사는 그들도 5년이면 계약 해지되고 업체를 반납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데요.

이 시련,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다시 출발

3월 14일까지만 일합니다. 다행히 해고 처리 되니 고용보험이 6개월 가량 나온다고 합니다. 당분간 그것으로 어찌 버텨 볼 수 있겠지요. 6개월 안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저처럼 기능없는 단순 노무직밖에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일자리가 생겨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찾아 봐야죠.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까요.

요즘 <오마이뉴스>도 힘겨운 거 같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10년 전에 비해 규모가 많이 커졌습니다. 그렇게 모두 발전해 가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비정규직으로 제자리 걸음 걷다가 이제 뒷걸음질 치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어려운 시기를 힘들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이 시련을 새로운 기회로 여길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마음 정리되는 대로 힘차게 뭔가를 향해 출발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


덧붙이는 글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응모글
#비정규직 #정규직 #기회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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