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54) 재미(在美)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3] '자(自)와 타(他)'하고 '나와 너'

등록 2010.03.08 13:48수정 2010.03.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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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재미(在美)

.. 당시의 문화부장 이석렬(在美)씨는 내게 문단 반세기를 쓸 것을 지시했고, 나는 이런 가벼운 읽을거리 연재에 회의적인데다 ..  <김병익-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2004) 234쪽


"당시(當時)의 문화부장"은 "그때 문화부장이었던"이나 "그 무렵 문화부장을 지낸"이나 "지난날 문화부장을 맡았던"으로 손봅니다. "쓸 것을 지시(指示)했고"는 "쓰라고 했고"나 "쓰라고 말했고"로 다듬고, "가벼운 읽을거리 연재(連載)에"는 "가벼운 읽을거리를 잇달아 쓰는 일에"로 다듬습니다. '회의적(懷疑的)인데다'는 '달갑지 않은데다'나 '마뜩하지 않은데다'나 '입맛이 당기지 않는데다'나 '내키지 않는데다'로 손질해 줍니다.

 ┌ 재미(在美) : 미국에 살고 있음
 │   - 재미 한국인 / 재미 동포 / 재미 과학자 / 재미 작가
 │
 ├ 이석렬(在美) 씨는
 │→ 이석렬(미국에 산다) 씨는
 │→ 미국에 사는 이석렬 씨는
 └ …

글쓴이로서는, 묶음표를 치고 '在美'라는 한자말을 넣어 주면 알아보기에 좋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보기글을 손질해서,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으며 그때 문화부장이었던 이석렬씨는"처럼 적거나, "그무렵 문화부장이었고 요즘은 미국에 사는 이석렬씨는"이나 "지난날 문화부장을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고 있는 이석렬씨는"처럼 적어 주면 묶음표를 구태여 안 쳐도 됩니다. 읽는 그대로 술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어 주면 됩니다.

 ┌ 재미 한국인 → 미국에 사는 한국사람
 ├ 재미 동포 → 미국에 있는 동포
 ├ 재미 과학자 → 미국에 머물러 있는 과학자
 └ 재미 작가 → 미국에서 뛰는 작가

미국에 있으니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 사니까 "미국에 산다"고 합니다. 살고 있는 곳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나 필리핀이면 어떻게 적으렵니까. 몽골이나 버마라면 또 어떻게 적으렵니까. 영국이나 프랑스일 때는 또 어떻게 적으렵니까.


우리는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 글을 우리 글답게 적어야 합니다. 우리 넋을 꾸밈없이 드러낼 우리 말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얼을 살뜰히 담아낼 우리 글을 빛내야 합니다. 어줍잖고 어설픈 모든 찌꺼기 말투와 겉치레 말마디를 씻어내도록 애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ㄴ. 자(自)와 타(他)


.. 주관과 객관, 자(自)와 타(他), 인간과 물건 등으로 인식해 온 삶에서 하나의 큰 전환이었다 ..  <리영희-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16쪽

"주관(主觀)과 객관(客觀)" 같은 말마디는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또는, "내 생각과 다른 이 생각"이나 "내 눈길과 남 눈길"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둔다고 해서 나쁠 일이란 없습니다만, 조금 더 쉽게 풀어내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면 한결 좋습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손봅니다. '등(等)'은 '들'로 손질하고, '인식(認識)해'는 '생각해'나 '느껴'로 손질하며, "하나의 큰 전환(轉換)이었다"는 "큰 갈림길이었다"나 "크게 달라지는 발판이었다"로 손질해 줍니다.

 ┌ 자(自) : x
 ├ 타(他)
 │  (1) 다른 사람
 │   - 그 방면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타의 모범이 되므로 상장을 수여합니다
 │  (2) '다른'의 뜻을 나타내는 말
 │   - 본 업소는 타 업소와는 다른 고기를 사용합니다 / 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 자타(自他) :자기와 남을 아울러 이르는 말
 │   -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 /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
 │
 ├ 자(自)와 타(他)
 │→ 나와 너
 │→ 나와 남
 └ …

먼 옛날까지는 아니고 일제강점기 무렵만 하더라도 적잖은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글을 쓰면서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나'라고 하면 될 말을 '自'라 하고, '남'이라고 하면 될 말을 '他'라 했어요. 이리하여 "나와 너"라 할 말을 "自他"로 적는 일이 생겼으며, 이러한 말흐름은 아직 제대로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늘날에도 이 말투는 널리 자리잡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말투를 말끔히 씻어내기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이른바 "자타가 공인하는"처럼 쓰는 말투는 사람들 입에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너와 내가 모두 인정하는"이나 "누구나 인정하는"이나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이나 "너나없이 받아들이는"처럼 말하거나 글쓰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다른 이는 따를 수 없다 / 아무도 따를 수 없다
 ├ 타의 모범이 되므로 → 사람들한테 좋은 보기가 되므로
 ├ 타 업소와는 → 다른 가게와는
 └ 타 지역에서는 → 다른 곳에서는

우리한테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우리 말은 지식인한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토박이말을 한글에 담으려 하지 않았어요. 한문을 한자에 담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 흐름이 오늘날에 와서는 영어를 알파벳에 담으려는 흐름으로 바뀝니다. 이러는 동안 지난날 얄궂은 흐름이 걷히지 않을 뿐더러 외려 지난날 얄궂은 흐름을 부추기고 있기에, 한문과 영어를 한자와 알파벳에 담으려는 뒤죽박죽 흐름이 맴돌고 있습니다. 돈 되는 장사로 아이들한테 한자와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판을 치고, 나라에서까지 큰돈을 들여 아이들한테 교재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말이 하나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넋과 글이 하나로 엮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마음과 이야기가 하나로 모두어지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일하고 놀이가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동떨어져 있습니다. 가난한 이와 가멸찬 이가 지나치게 벌어져 있으며, 배운 이와 못 배운 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 →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솜씨
 └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 → 모두 받아들이는 일

말을 찾기 앞서 생각을 찾아야 할 텐데, 제 생각을 찾으려는 사람들 움직임은 어지간해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글을 찾기 앞서 넋을 찾아야 할 텐데, 제 넋을 추스르려는 사람들 모습은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찾기 앞서 제 마음을 찾아야 할 텐데, 제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곱씹는 사람들 매무새는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말이 무너지는 자리는 어김없이 삶이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말이 어지러운 자리는 틀림없이 삶이 어지러운 자리입니다. 말이 엉터리인 자리는 그예 삶이 엉터리인 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가 튼튼하고 굳세게 설 자리를 제대로 깨우쳐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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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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