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는 '고 맛'!

[제주도 여행 5] 3월에 눈 쌓인 한라산에 가다

등록 2010.03.16 12:59수정 2010.03.2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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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따뜻해서 3월이면 날씨 완전 좋을 걸?"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을 때만해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 유채꽃이 피는 3월의 제주도는 너무 아름다울 거라고. 그리고 나 역시 그 이야기에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는 나를 배신했다. 


3월 1일. 제주도에 도착한 이래로 근 10일 동안 비가 부슬부슬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춥거나, 폭풍우가 몰아쳐 한시도 하늘이 잠잠할 겨를이 없었다. 완전한 도보여행자인 나는 올레도 못 걷고, 산책도 못했다. 눅눅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서귀포 시내를 방황하며 사람들이랑 놀고, 이야기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특히 전국을 강타한 폭설이 휘몰아칠 때 방에 누워 있었는데 정말이지 밖에서 누군가가 자꾸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서 (물론 바람 소리 때문에) 무서워서 혼났다.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 주 목요일부터 날씨가 갑자기 반짝하더니, 서귀포에서 한라산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 눈 쌓인 한라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화산섬. '그래 이번 주에는 한라산 도전이야.' 이제야 나도 본격적인 제주도 여행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화창한 날씨, 나도 한라산에 올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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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코스 올라가는 길이다.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바위산들. ⓒ 이유하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라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다. 윗세오름까지 오를 수 있는 어리목과 영실, 백록담까지 갈 수 있는 관음사와 성판악,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개방된 돈내코에서 한라산에 오를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그 중 가장 짧은 영실코스. 일단 가볍게(?) 몸을 풀자는 생각으로 선택했다. 물론, 한 톨의 걱정이나 준비는 안 했다. 장난스럽게 하는 말로 '애들이 쓰레빠 신고 가는 코스'라는 설명을 들어서인지 더더욱이나 만만하게 느껴졌다.

미리 준비한 등산복이나 등산화가 없어서 가볍게 청바지에 서귀포에서 구매한 '할매표' 분홍 스웨터를 걸쳐 입고, 가져온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는 걸로 등산 준비를 마쳤다.

차를 타고 영실 코스 초입에 도착하자 뭔가 이상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한라산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오랫동안 자란 나는 많은 눈을 본 적이 별로 없었던 터라 마음이 에드벌룬의 풍선만큼 부풀어 올랐다. 아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

그런데 문제는 운동화! 밑창에 미끄럼 방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일반 운동화라 발이 쭉쭉 미끄러지는 게 위험했다. 하지만 아이젠도 없고 다른 신발도 없었기 때문에 '괜찮겠지'하는 대책 없는 마음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 끝은 참담했다.

눈 쌓인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는 '고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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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코스의 평지 길이다. 옆으로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 펼쳐진다. 마치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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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 오름에서 보는 한라산 정상 모습. 옆으로 살짝 보이는 작은 집에서 컵라면도 팔고, 커피도 판다. ⓒ 이유하


올라 갈 때야 몇 번의 고비만 넘기면 괜찮았다. 굽이 굽이진 산길 옆으로 탁 트인 전망, 칼로 도려낸 듯 반듯한 절벽들, 멀리 보이는 오목한 오름들, 그리고 반지르르한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는 동화 같은 공간이었다.

30~40분 정도의 오르막을 오른 뒤 펼쳐지는 길고 하얀 평지길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오겡끼데스까'와 '라라라라~' 러브 스토리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 한 새하얀 설원풍경. 산책하는 기분으로 올라가니 2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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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컵라면 먹기! ⓒ 이유하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라산 등반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한 그릇! 캬~ 새하얀 눈 사이에서 까마귀들과 함께 컵라면을 먹는 느낌이란, 안 먹은 사람은 모를 거다.

원채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후루룩 후루룩 몇 번 들이키니 금세 컵라면은 바닥을 보였다. 어디 갔어, 내 라면들. 까마귀가 훔쳐 먹었나?

맛있게 컵라면도 먹고, 커피로 입가심도 하고 기분 좋게 산을 내려오는데, 아… 이 때부터 준비하지 않은 자의 고난(?)이 시작될 줄이야. 올라 갈 때 쌓여있던 눈이 화창한 날씨에 금세 녹아버려서 내려오는 길은 질퍽한 흙탕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옆에 쳐진 밧줄이 없었다면 나는 10번은 넘어졌을 듯. 골백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미끄러운 것보다 공포를 이겨내는 법이 시급했다.

발은 미끄럽지, 주책없는 입에서는 자꾸 비명이 쏟아져 나오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지, 내려가는 길은 끝도 없어 보이지, 넘어질까봐 무섭지. 아… 진짜 어깨에 담 걸릴 것 같이 긴장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발이 축축하게, 내 발이 강가를 걷는 것인지 모를 만큼 흠뻑 젖어버렸다. 처음에 몇 번 흙탕물을 피하느라 했던 작은 노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던 것인가를 생각했다. 정신을 조금만 딴 데 돌리면 미끄러지면서, 등골에 소름이 쫙 하면서 머리가 찡 하는 기분을 아는지. 몇 번 넘어지고, 엉덩이로 산을 내려오다 보니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힘들었던 하산길, 하지만 치명적인 등산의 매력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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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내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던 가장 '피크'코스. ⓒ 이유하

하지만 힘들었을지라도 내려오고 보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게 산의 매력이다.

처음에 내렸던 눈은 그저 새하얗게 산을 덮고만 있었을텐데, 그 위에 한 사람이 걸어가고 또 한 사람이 그 길을 밟아 가면서 눈길이 다져진다.

그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궁금함. 코너를 돌았을 때 나타나는 새로운 풍경에 대한 감탄이 등산의 매력 아닐까?

거기에 같은 산을 오르고 내려갔지만, 오를 때 풍경이 다르고 또 내려갈 때 풍경이 달라지는 매력이 더해지면 정말 최고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축축한 신발을 구겨신고 매콤한 낙지볶음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리곤 찜질방에 가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지지자 피로가 단번에 풀리는 것이 개운했다.

"이 맛이 바로 등산이야."

내려올 때의 두려움과 백번 넘어지느라 뻣뻣해진 어깨는 금세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또 다른 한라산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 이번엔 좀 더 무모하게 한라산 정상까지 가는 거야! 뭐 어때?
#한라산 #제주도 #영실 코스 #윗세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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