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55) 비(雨)

[우리 말에 마음쓰기 883] '숙원(宿願)'과 '오랜 꿈' 사이에서

등록 2010.03.21 16:26수정 2010.03.2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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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숙원(宿願)

.. 일본제국 정부에 있어서 한국 부녀자들에 대한 대책은 최종적인 전략이었고, 또 숙원(宿願) 사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  <임종국 엮음-정신대 실록>(일월서각,1981) 14쪽


"일본제국 정부에 있어서"는 "일본제국 정부한테"나 "일본제국 정부가"로 손보고, "한국 부녀자들에 대(對)한 대책"은 "한국 부녀자한테 펼친 대책"이나 "한국 부녀자한테 마련한 대책"으로 손봅니다. '최종적(最終的)인'은 '마지막'이나 '마무리'로 다듬고, "했던 것이다"는 "했다"로 다듬습니다.

 ┌ 숙원(宿願) : 오래전부터 품어 온 염원이나 소망
 │   - 숙원 사업 / 숙원을 이루다
 │
 ├ 숙원(宿願) 사업이기도
 │→ 오랫동안 품은 꿈이기도
 │→ 오랫동안 이루고자 한 일이기도
 │→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기도
 │→ 바라디바라딘 일이기도
 └ …

오랫동안 품은 꿈을 가리킬 때에는 "오랜 꿈"이라고 하면 됩니다. 아예 '오랜꿈'이라는 새말을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오랜-'을 앞가지 삼아서 '오랜뜻'이나 '오랜놀이'나 '오랜문화'나 '오랜얼' 같은 말도 써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 짓는 말마디가 사람들한테 반가이 스며들는지는 모를 노릇입니다. 구태여 이렇게 적을 까닭이 없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오랜놀이' 아닌 '전통놀이'로 넉넉하고, '오랜문화' 아닌 '전통문화'로 넉넉하니까요. 다만 "오랜 문화"나 "오랜 넋"이나 "오랜 얼"처럼 써 보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글흐름을 돌아본다면 이처럼 적는 글줄이 퍽 어울릴 수 있어요.

 ┌ 숙원을 이루다
 │
 │→ 오랜 꿈을 이루다
 │→ 오랜 바람을 이루다
 │→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이루다
 │→ 오래도록 품던 꿈을 이루다
 └ …


그나저나 '숙원'이라는 낱말은 우리한테 얼마나 익숙하거나 알맞을 낱말일까요. 우리는 이 낱말을 쓰지 않고는 "오래도록 품어 온 꿈"을 가리킬 수 없을까요. 말 그대로 "오랜 꿈"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있는 그대로 말하고, 한결 쉽게 말하며, 더욱 살가이 말할 수는 없는 우리들인지 궁금합니다. 1981년에 나온 책에서는 묶음표를 치고 '숙원(宿願)'처럼 적어 놓았는데, 1981년이 아닌 2010년이라고 해서 이 낱말을 묶음표를 안 치고 적어 놓아도 잘 알아들을 만한지, 뭇사람과 쉽고 살갑고 꾸밈없이 나눌 만한지 궁금합니다.


ㄴ. 비(雨)

.. 해석은 자유가 아니던가! 비(雨)의 동굴에는 한 무리의 테리안스로프들이 세 마리의 검은 하마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이것 역시 사냥 장면을 그린 게 아니라 비의 동물을 생포하는 장면을 그린 겁니다." ..  <알렉상드르 푸생,소냐 푸생/백선희 옮김-아프리카 트렉>(푸르메,2009) 107쪽

"해석(解析)은 자유(自由)가 아니던가"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읽기 나름이 아니던가"나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던가"로 손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의 테리안스로프들이"는 "테리안스로프들 한 무리가"로 손질하고, "세 마리의 검은 하마들을"은 "검은 하마 세 마리를"로 손질합니다. "이것 역시(亦是)"는 "이것 또한"으로 다듬고, "비의 동물(動物)을 생포(生捕)하는 장면(場面)을 그린 겁니다"는 "비를 나타내는 짐승을 사로잡은 모습을 그렸습니다"나 "비를 일컫는 짐승을 붙잡은 모습을 그렸습니다"로 다듬어 줍니다.

 ┌ 비(雨)의 동굴에는
 └ 비의 동물을 생포하는

보기글을 적은 이는 "비의 동굴"과 "비의 동물"을 이야기합니다. 왜 이렇게 적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비를 나타내는 동굴"인지 "비를 일컫는 동물"인지 "비를 부르는 동굴"인지 "비와 얽힌 동물"인지 제대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참말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자 "비의 (무엇)" 꼴로 적었을까요. 글쓴이(옮긴이)는 사람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이렇게 적었을까요. 이렇게 적은 글월을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읽을 수 있으며, 이 같은 글월은 우리 말법과 말투와 말씨에 얼마나 걸맞을는지요.

더욱이, '비'라고만 적지 않고 '비(雨)'라고 적어 놓습니다. 눈을 '눈'이 아닌 '눈(雪)'이라고 적어야 하나요? 하늘을 '하늘'이 아닌 '하늘(天)'이라 적어야 하는지요? 땅을 '땅'이 아닌 '땅(大地)'라 적어야 하는가요?

 ┌ 비를 모시는 동굴 / 비를 섬기는 동굴
 ├ 비를 부르는 동굴 / 비를 바라는 동굴
 ├ 비를 나타내는 동굴 / 비를 일컫는 동굴
 ├ 비와 얽힌 동굴 / 비를 낳은 동굴
 └ …

말은 옳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생각은 옳고 바르게 품어야 합니다. 삶은 옳고 바르게 꾸려야 합니다. 일은 옳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놀이는 옳고 바르게 즐겨야 합니다. 사람은 옳고 바르게 사귀어야 합니다. 밥은 옳고 바르게 먹어야 합니다. 집은 옳고 바르게 마련해야 합니다. 돈은 옳고 바르게 벌어야 합니다. 아이는 옳고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마음은 옳고 바르게 가누어야 합니다. 꿈은 옳고 바르게 꾸어야 합니다. 길은 옳고 바르게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옳고 바르게 꾸리는 삶이란 도덕군자나 성인군자 같은 목소리가 아님을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나와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있다면, 옳고 바르게 걷는 길이란 아름답고 알찬 이음고리임을 느끼리라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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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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