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근거지 여주 5일장

변변한 무기조차 없던 의병들 5일장 날 일본군 50여 명 척살

등록 2010.03.26 16:35수정 2010.03.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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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5일장 여주 5일장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반발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 50명을 척살한 곳이다. ⓒ 하주성

▲ 여주 5일장 여주 5일장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반발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 50명을 척살한 곳이다. ⓒ 하주성

25일 여주 5일장을 나갔다가, 여주 5일장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여주 5일장에서 의병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발단은 명성황후 시해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명성황후였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이날 명성황후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가 지휘하는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했다. 이 변을 '을미년 팔월의 변'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여주였다. 명성황후는 바로 여주출신이기 때문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이 된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켰고, 수많은 농민들이 이에 합세 했다.

 

1896년 1월과 2월에 걸쳐서 경기도에서는 각처에서 의병들이 봉기를 했는데 광주·여주·이천을 비롯하여 용인·과천·안산·죽산·포천·연천·양평 등 모든 지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 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제와 맞서 싸운 곳이 바로 여주와 광주였다. 여주 의병들은 초기부터 활동이 두드러졌다.

 

장날 일본군 50여 명 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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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장거리 1895년 2월 5일. 이날 여주 의병들은 행상으로 가장을 해 장꾼들 속에 숨어들어 일인과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일로 여주의 의병활동이 불을 당기는 깃점이 되었다. ⓒ 하주성

▲ 여주 장거리 1895년 2월 5일. 이날 여주 의병들은 행상으로 가장을 해 장꾼들 속에 숨어들어 일인과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일로 여주의 의병활동이 불을 당기는 깃점이 되었다. ⓒ 하주성

여주 5일장은 5일과 10일에 열린다. 1895년 2월 5일, 여주 의병들은 행상으로 가장해 장꾼들 속에 숨어들었다. 여주장은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장으로 남한강 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채소 등이 팔려 인근에서는 가장 큰 장으로 손꼽힌다. 당시에는 더욱이나 5일장이 상거래의 중심이었으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의병들은 이런 여주장으로 모여들었다. 아마도 일본군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장꾼들 속에 숨어있던 의병들은 전선을 끊고, 일본군과 일인 등 50여 명을 척살하였다. 변변한 무기조차 지니고 있지 못한 의병들이 50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척살했다는 것은 대단한 상과였다.

 

여주장에서 시작한 여주의 의병활동은 주변과는 달리 치열하게 펼쳐졌다. 여주에서 이렇게 의병활동이 강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여주 출신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주의 의병활동

 

그 후 여주에서는 의병들의 활동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1907년 8월 10일에는 한강을 항해하는 일본 목선을 습격하여 일인 20명을 총살하였고 적재화물을 빼앗았다. 8월 12일에는 일경 9명과 교전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여주읍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여주 의병들의 활동에 일경과 군인들도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여주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이포를 역습하여 부근의 마을을 소각했다. 이에 9월 김봉기의 의병 400명이 여주의 일병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 일이 있은 후 1907년 10월 3일에는 일군경이 여주군의 암퇴리 민가 50여 호를 방화 소각하는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의병에게 여주읍을 함락당한 일본은 급기야 각 지역에 고립당한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하였다. 증파된 군대마저 여주 장호원과 이천 등에서 의병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이때부터 일본군들은 야만적인 방화, 살육 작전을 실시하여 여주·지평·양근·원주 지역에서 살육당한 민초들이 3,000여명에 이른다고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여주는 의병활동의 근거지였고, 여주 5일장 역시 의병활동이 시작된 곳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는 이곳이 일제에 항거하여 승리를 거둔 곳임을 알리는 비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분들의 숭고한 애국운동이 그저 파묻혀 버리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자손들에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사적비 하나만이라도 건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주장 #5일장 #항일운동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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