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면 진실도 바뀌나? 불안하다

[끝나지 않은 사변] 고창선산 양민학살, 진상 규명됐는데 다시 재조사

등록 2010.03.28 12:40수정 2010.03.2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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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데도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세월이 있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면 끌려가서 얻어맞고 가족들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숨을 죽여야만 했던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세월은 과거형이 아니다. 이 세월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뼛속 깊이, 살점 깊숙이 박혀 혈관을 따라 흐르는 공포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남아서 대를 이어 전해진다.

"명부에 등록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쫓아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피해 버려요. 거부한다고 말은 안 하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추모사업인디, 아 글쎄 이것을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재조사를 한다고 하니 이게, 이게 허헛 참, 소가 웃을 일 아니겄소? 아 그런디, 그놈의 일을 생각해보면 너무 늦게 시작했어라. 김대중 대통령 때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어지간히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을 것인디. 영판 찝찝하당게."

<고창선산 양민희생자 제전위원회> 황긍선(78)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눈물을 글썽인다. 오래 전에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기보다는 차라리 분통이 터진다.
         
고창선산 양민희생자 제전위원회 황근선씨의 기구한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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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긍선(일명 황판옥) '고창선산양민희생 재전위원회' 위원장. ⓒ 김수복


그의 이력은 상투적으로 말해서 기구하다. 한국 현대사를 한 주먹으로 쥐면 이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1950년 6월 사변 직후에 학도병으로 나가는 선배들을 위해 밴드의 선두에서 나팔을 불었고, 빨치산이 마을로 들어온 뒤에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깃발을 들었으며, 국군 토벌대가 지나간 뒤에는 아버지와 숙부를 잃었고, 슬픔이 어지간히 가셔진 뒤에는 사내라고는 씨가 말라버린 마을에서 얼른 씨라도 받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재촉으로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벼락치기 결혼을 했다.

아이가 생긴 뒤에는 반공연맹이나 경찰서로부터 표창장을 받았고, 선거 때만 되면 피가 끓어서 부정선거 하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는 등으로 보안과와 정보과 형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16세의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밴드부에서 나팔을 불었고, 연극부에서 배우 겸 연출을 했다. 사변 직후에 떠도는 소문을 기초로 대본을 만들어 마을 시정에서 연극을 했는데 극중 대사에 '에미나이'라든가 '간나구새끼' 같은 북한 용어가 있었다. 일종의 풍자극인 이 연극의 내용은 나중에 기억도 안 나리만치 즉흥적인 것이었고,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연극을 공음면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하던 사람이 보고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 어린 녀석 반동분자 아닌가?"하는 내용의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 알았다. 어쩌면 끌려가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를 살려준 뜻밖의 사건이 그 무렵에 있었다.

연극을 끝내고 며칠 뒤에 논에서 아버지와 함께 거름뿌리는 일을 하다가 그만 쇠스랑으로 발등을 찍어버린 것이었다. 그때 마침 퇴로가 막힌 빨치산 가운데 일부가 마을에 들어와 임시지휘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 지휘부 내에 의료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달려갔다.

"그렁게 말하자면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그 사건이 나를 살려준 셈이여. 살려준 한편으로 옹삭스런 꼴을 당하게 했던 것이제. 거기서 치료를 받는 동안 빨치산들과 친해졌으니께. 친해진 죄로 깃발을 들어야 했으니께."

노랑개와 검정개를 보면 깃발을 쓰러뜨려라

전쟁이란 이상한 것이었다. 이쪽이 이겼는가 하고 보면 어느새 저쪽이 이겨 있었고, 저쪽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이쪽이 이겨 있었다. 전쟁 당사자들에게는 그런 상황이 손금 보듯 보이는지 모르지만, 전쟁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민간인들에게 전쟁의 상황이란 그야말로 전광석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한밤중에 핑핑 날아다니는 총알이 미친 도깨비불처럼 여겨지면서 내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나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바람처럼 내려와서 면 인민위원회다 마을 인민위원회다 온갖 위원회를 설치해놓고 의용군을 뽑는 등 그야말로 '조선인민공화국' 정치를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그들이 달아난 자리를 빨치산들이 채우고 들어왔다.

"빨치산이 뭐냐 하면 의용군들이었어.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찜뽑기로 해서 뽑은 사람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패해서 후퇴를 하는데 저기 어디냐, 중부전선이 막히니까 도망도 못 가고 마을로 들어온 거여."
"찜뽑기라면, 제비뽑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제. 의용군을 뽑을 때, 누가 지원을 허간디. 지원하는 사람이 없으니께 마을마다 몇 명씩 할당을 해서, 스무 살 안팎의 남자들을 모두 시정으로 모아놓고 종이에다 표시를 해서 그것을 뽑은 사람이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거지. 내가 다 봤어. 뽑힌 사람들은 선운사로 가서 훈련을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고 말이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와 정부가 사라져 버린 마당에서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제비뽑기로 졸지에 의용군이 되고 만 사람들은 전선에 투입되었고,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할 때는 퇴로가 차단되어 태반이 지리산으로 들어갔지만, 그쪽으로도 합류하지 못한 일부는 장성에서 산을 타고 고창 서부 지역으로 스며들었다.

공음을 중심으로 대산, 무장, 상하, 해리 등 이 지역은 지금이야 모두 개간을 해서 수박을 심고 무를 심고 청보리 축제라 해서 초원까지 형성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숲이 울창하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까닭으로 숨어 있기에 딱 좋았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이른바 미수복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때 내 또래 아이들 셋이 말하자면 차출되어서 빨치산 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디, 산꼭대기 초소에까지 주먹밥을 날라다 준다던가, 하루 종일 깃발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뭐 그런 일이었어. 산꼭대기나 삼거리 갈림길 같은 데서 깃발을 들고 한 사람씩 서서 사주경계를 하는 거여. 저 앞에서 깃발이 쓰러지면 나도 깃발을 쓰러뜨리고 산속으로 도망을 치도록 되어 있었어.

숨기 전에 깃발을 쓰러뜨린 저 앞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저쪽에서 노랑개가 온다거나, 검정개가 온다거나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여. 노랑개는 그때 군인들 복장이 노르스름해서 노랑개고, 검정개는 그때 경찰 복장이 검어서 검정개였던 것인디, 하여튼 저쪽에서 들린 그 소리대로 나도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서 뒤쪽으로 그 말을 전해주고 깃발을 쓰러뜨린 채로 산속으로 숨는 거여. 그런 훈련을 빨치산에게서 받고 실제로 한 일주일이나 그 일을 했을라나."

사람의 무리가 물고기떼로 보이다

1951년 1월 5일. 피비린내가 하늘을 찌르고 땅을 적신 운명의 그날. 멀리서 인공기 하나가 쓰러졌고, 이어서 '노랑개'가 온다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앞산, 뒷산, 삼거리, 방죽거리 등등 도처의 깃발이 노랑개 온다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 갔다. 선인봉 꼭대기에서 보초를 서던 이들의 눈에 이윽고 노랑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왼쪽으로도 보이고 오른쪽으로도 보이고, 정면으로도 보이고 저 멀리 뒤쪽 마을 옆으로도 보였다.

전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실 처음부터 전의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빨치산들에게 총이 있기는 했지만 총알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어깨에 둘러매고 있었을 뿐이었다. 활로가 없으니까 일단 진지를 구축해놓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보급을 막연히 기대나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총알도 없는 총을 둘러매고 있던 빨치산들은 산꼭대기의 진지를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의견이 분분했다. 어디로 피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점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점치는 사람에게 쏠렸다. 동남 방향은 절대사구다, 가면 안 된다. 서남 방향으로 약간의 활로가 있다, 그러나 믿음은 적다 등등 나오는 점괘도 하나같이 불온했다. 방향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렸다. 이제 더 이상은 우왕좌왕하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마침내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각자 요령껏 피하거나 숨어서 목숨을 보전하라는, 허무한 명령이었다.

"나도 그렇고, 누구 한 사람도 뭘 깊이 생각하고 어쩔 틈은 없었을 거여. 순식간에 다들 어디로 가 버렸거나, 가고 있더라고. 아 그런디 나는 그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따라가고 싶지가 않더라고. 사람들은 대개 뒤쪽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디, 나는 이상하게도 발이 자꾸 앞쪽으로 가는 거여. 앞쪽이 어디냐 하면 지금 머시냐 그 요새 청보리 축제하는 그곳이 그때는 다복솔이 듬성듬성한 야산이었거든. 이 야산을 타고 남쪽으로 깊이, 한없이 내달렸어.

나중에 생각해보니 군인들은 그쪽에 훨씬 더 많았었는데 말이지. 그런데도 나는 마치 불을 안고 화약통에 뛰어들 듯이 그쪽으로 달렸던 거여. 달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께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선인봉 쪽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더라고. 내가 이거 잘못한 거 아닌가, 그제야 겁이 더럭 나서 나도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미 늦어버린 거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탕, 탕, 총소리나 내며 마을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낸 군인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앞에서, 완전히 포위한 모양새로 주민들을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더라고.

최근에야 그것이, 그러니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위원들의 말을 듣고서야 그때 그것이 토끼몰이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하여튼 그때 그랬어.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한쪽으로만 몰리는 거여. 산 밑으로 밭 한뙈기가 있었는디, 그 밭이 500평이나 될라나 600평이나 될라나, 사람들이 그 밭으로 죄다 몰려서 선인봉 쪽으로 쏟아져 올라가는디, 갑자기 선인봉 쪽에서 총소리가 나는 거여.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다시 돌아서서 몰려가는디, 그 모양이 꼭 냇가에서 송사리나 피라미떼가 한쪽으로 몰려가다가 개구리나 뱀을 발견하고 뒤로 방향을 돌리는 꼭 그런 모양 같더라고.

멀리서 보니께 그렇게 보였던 거지. 하여튼 그것을 그렇게, 보고 있는디, 와따야 갑재기 따따따따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디, 멀리 있는 내 귀에 픽, 픽,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안 쓰러진 사람은 옆으로 빠져나와서 줄행랑을 치다가 또 픽, 픽, 그렇게 쓰러져 버리고, 그러는 거여. 그 뒤로 내가 육십 년이 넘게 살았지만, 그때의 그 장면은 언제나 지금 당장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지, 그럼, 지금도 보여요, 보여, 내 눈에."

당당히 제사 모시고 싶었지만, 말 한 마디 못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공포가 가슴에 쇳조각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웃간에도 그날의 이야기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누구도 함부로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이야기를 해야만 할 때는 좌우를 살피고 문을 열어 밖을 살피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사립문 밖에까지 나가서 또 좌우를 살핀 뒤에서 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58년도에 이르러서야 몇몇 사람이 모여 합동제사라도 지내자는 의견을 교환했다. 이 의견은 순식간에 거의 모든 피해 가족들의 동의를 얻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용감한 한 사람이 나서서 그 일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는데 60년 박정희의 등장 직후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두세 달 뒤에 그는 다시 나타나기는 했지만 합동제사와 관련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일체의 일에서 손을 떼고 예전에 없던 병으로 골골거리며 농사나 짓다가 슬그머니 죽고 말았다.

"참말로 이상하더라고.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그렇게 말도 한 마디 뻥긋 못하고 바보 행세를 하다가 죽어갈 수도 있는지 몰라. 나는 모르겠더라고. 아 그런디 말이지. 죽는 것도 꼭 남몰래 죽는 것처럼 잉? 확실하게 어디가 아파서 병원을 들락거린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아픈 듯이 안 아픈 듯이 있다가는 허헛 참, 어느 하루 죽어 버렸다는 말이 들리더라니께."

소문은 은밀하고 빠르게 지독한 역병처럼 돌았다. 아무도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침묵, 오직 침묵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그렇게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스스로 잘 구분해 가며 살아오던 중에 할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세상이 왔다. 김대중씨의 정치활동 재개와 지방자치 제도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전라북도 의회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되었고, 세월이 더 흘러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담기구가 설치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그것이었다.

진실규명결정서까지 내놓고 다시 재조사,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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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에 훼손된 추도비. 복원 전에 사진을 찍어서 마을회관에 두었는데 원본사진은 모두 사라지고 종이에 복사한 것만 남아 있었다고. ⓒ 김수복



위원회는 일 년여의 조사 끝에 그 사건을 '고창 11사단 사건'으로 명명하고 2008년 4월 14일자로 진실규명결정서를 내놨다.

숫자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전북 도의회 보고서는 군 경에 의한 희생자를 1240명으로 적시하고 있지만 진실 화해위 결정서는 11사단에 의해 273명 이상이 총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숫자에 이처럼 차이가 있는 것은 유족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아마도 불신과 공포감 때문인 것 같지만) 증언을 거부하거나 소재불명으로 확인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족회는 추도비도 세우고 공식적인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몰려와서 추도비를 훼손하는 등 행패를 부리다가 위원회의 결정이 엉터리라고 재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요구의 타당성이 인정되어 재조사에 들어갔다. 위원회의 조사2국 1팀의 담당 조사관이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재조사는 현재진행 중이고, 2010년 7월 말 이전에 공식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유족회 측의 얘기에 따르면 재조사는 진즉에 끝났다고 했다. 그 결과 애초의 273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희생자로 인정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 발표가 바로 안 되고 7월로 미뤄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사실 2010년 7월 말 이전이라는 시점은 보기에 따라 아주 절묘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는 한시적 기구이고, 2010년 7월이면 모든 활동을 종료하고 간판을 내릴 준비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때 어떤 결정이 나든 위원회의 활동 기한이 연장되지 않는 한 그 결정에 불복해서 재재조사 청구든 뭐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족회는 바로 이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다시 황긍선씨의 이야기.

"나는 며칠간이라도 빨치산에 협조를 했으니까 그때 총을 맞아 죽었건 떡매로 맞아 죽었건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 아버지와 숙부는 아니었단 말이거든. 아닌데도 그냥 죽고 말았단 말이거든. 재조사 아니라 별 것을 한다 해도 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그 진실이 뒤집어질 까닭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란 모른단 말이거든.

하도 이상하게 뒤집어지는 것이 많으니까. 혹시라도 그때 총맞아 죽고 떡매로 맞아죽은 사람들은 모두 빨치산이었다, 이런 발표라도 해버린다면 어쩔 것이냐 이거여, 잉? 설마 그렇게까지 엉터리로 뒤집지야 않겠지만, 어쨌든 사람이니까, 사람이 하는 일을 어떻게 그냥 믿고만 있을 것이냐 이것이여. 이놈의 나라가 무엇 하나 꾸준하고 일관된 것이 있어야 말이제."

진실 화해 위원회 1차 결정문 일부
상략

당시 11사단장 최덕신 명의로 9연대에 하달된 작전명령 5호를 보면 '작전지역에서의 이적행위자 발견시 즉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예하 대대장에게까지 즉결처분권이 부여되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11사단의 작전명령에 따라 각 예하 부대들이 '견벽청야(堅壁淸野)' 혹은 '초토화작전'의 방식으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여 작전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공비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에 따라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사살하고 재산, 가옥 등을 파괴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비록 전시라고 하더라도, 군.경이 비무장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살해하였고, 이러한 작전명령을 하달한 것에 대한 책임은 가해부대만이 아니라 이를 관리·감독한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주-견벽청야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히 확보하되 부득이 포기하게 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이 발붙일 수 없도록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앰으로써 빈 들판만 남긴다는 뜻으로, 11사단장 최덕신이 사용한 작전의 핵심 개념이다.

#양민학살 #진실 #재조사 #불안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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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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