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기 좋은 날에 일어난 사건

이웃집 할머니에게 화를 냈다, 왜?

등록 2010.04.23 19:14수정 2010.04.23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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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에 비가 내리면 바람이 피고 싶어진다. 이 바람이 무슨 바람인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책도 안 읽히고 낮잠도 안 자고 싶어지고, 그래서 하다못해 상추 씨앗이라도 좀 뿌려볼까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상추도 아욱도 씨앗은 벌써 전에 다 뿌려버렸다. 심지어는 지금 철이 아니라고 하는 대파 모종까지 다 해버린 까닭에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가만히 앉아 있노라니 이게 또 엉덩이가 자꾸 들썩거려서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야아, 이게 뭐냐 이거, 엄마, 놀러나 갑시다. 봄바람에 미친 듯이 비나 좀 맞고 옵시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이십 리 거리 밖에 안 되는 동호해수욕장을 다녀왔다. 사람의 심사란 다 같은가 보다. 해수욕철이 아닌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 차를 세우고 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주룩주룩 마구 쏟아지는 비라면 아마 이런 정서는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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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일거리를 만들어서 옮겨심은 대파. 지금은 철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게 실험이다 ⓒ 김수복


그러고 보면 봄비라는 것이 이게 그렇다. 이슬 같기도 하고 비 같기도 하고 이름을 붙이기가 애매하다. 게으른 사람 낮잠 자기 좋고 부지런한 사람 일 하기 좋다는 옛말이 있는데 봄에 내리는 비가 대개 그렇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은 아직 5시도 안 되었건만 사방이 벌써 침침해지기 시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인데 이웃집 할머니께서 옴팍 젖은 몸으로 손수레를 밀며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땀박땀박 한 걸음씩을 어렵게 옮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웃집 할머니라는 것조차도 못 알아보았다. 어디서 무슨 고물을 수집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왔다가 비를 만났던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트럭이 있을 것이다. 얼른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서 있는데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행동거지가 낯익다. 손수레에 실린 것도 폐지가 아니다. 고추밭 멀칭으로 쓰는 비닐이며 삽이며 호미 같은 것들이다. 그제야 깜짝 놀라 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아니 지금 뭐 하고 오시는 거예요?"
"아이고 쩌그 머시냐 저, 꼬추밭에……."
"비 오는 날은 일 하지 마시라니까요. 왜 자꾸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는데, 할머니 또한 이상하리만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쩔쩔매며 설명 아닌 해명을 하시고자 애를 쓰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무례하게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까지도 할머니를 윽박지르고 있었고, 할머니는 거의 진땀을 빼다시피 나를 진정시키고자 애를 쓰시는 거였다.


그랬다. 그때 내가 본 사람은 이웃집 할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치매라는 아주 몹쓸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어머니를 그때 나는 만나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할 때는 일하기 딱 좋다고 밭일을 하고, 빗줄기가 세찰 때는 비 오고 나면 밭에 못 들어가니까 얼른 해야 한다는 핑계로 또 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던 시절의 어머니가 그렇게 옴팍 젖은 몸으로 손수레를 끌며 땀박땀박 힘에 부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대체 뭐여. 새끼들 애태워서 죽일 일 있어? 왜 이렇게 비만 오면 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는 거냐고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비 오는 날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도 처량하고 한심하고 불쌍하고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수사를 붙여도 모자랄 정도의 하여튼 참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그야말로 방방 뛰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그럴게."

이 한 마디, 어떻게 그렇게도 이 한 마디는 잘도 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도 당신 입으로 내놓은 말을 금방 잊어버리고 도로 밭에 쭈그리고 앉을 수 있는 것인지. 불가사의도 그런 불가사의가 없었다. 훨씬 나중에서야, 그러니까 내 임의로 땅에 호박도 심고 고추도 심고 참외도 심고 그러기 시작한 뒤에서야 빗속에서 일하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여전히 빗속에서 일하는 노인들을 보면 금방 무슨 사단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이웃집 할머니 또한 그랬을 것이다. 아들내미 딸내미로부터 숱하게 그런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갑자기 화를 내며 지청구를 주는 이웃집 젊은 남자가 순간적으로 당신 아들인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는 할머니에게 더러 잔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처음 만났던 오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그래 왔었다. 오전에 세 시간 오후에 세 시간 그렇게 하루 여섯 시간씩만 일을 하세요. 비가 올 때는 절대로 밭에 가지 마세요. 관절염은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 것이 제일 나쁜 거예요, 등등 그렇게 할머니에게는 그야말로 씨도 안 먹히는 잔소리를 참 많이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보자마자 대뜸 화를 낸 적은 없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언제나 지나가는 말처럼 웃으면서 했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화를 냈다. 할머니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렇게, 여우비에라도 홀린 것처럼 가늘게 내리는 봄비 속에서 잠시 딴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깜빡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서로가 민망해서, 실없는 웃음이나 흘리다가 제대로 된 인사조차도 없이 허둥지둥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야 이거 내가 왜 그랬지? 여든도 넘은 할머니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이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나. 그런데 이게 또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과 같은 것을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잠시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했던 것 같네요.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어찌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소심하게도 그런 걱정으로 밤새 뒤척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가.

밤이 지나고, 아침도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떠오르는 햇살 속으로 여느 때와 똑같이 손수레를 끌고 밭으로 가시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의 밭은 내가 사는 집 뒤편에 있었고, 거기까지는 내가 사는 집을 오른쪽에 끼고 백여 미터나 되는 언덕을 올라야 했다. 때문에 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사는 집 마당 입구에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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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 계절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 꽃구경에 너무 취하면 뱀을 밟을 수 있고, 내리는 빗줄기에 취하면 사람을 잘못 볼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호박 모종에 취해서 깜빡 정신을 놓으면 밤새 내린 서리에 모두를 태월버릴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할 것이 참 많다, 이 계절에는. ⓒ 김수복


오늘도 그랬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랐다. 다른 때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주고받다가 헤어지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인사말도 없이 그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그것조차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하고, 슬쩍 외면하는 자세로 엷은 웃음을 깨물며 뭔가 사건이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으로 한참을 서로 바라보았다.

"오, 참말로, 쩌그 머시냐 저, 호박모종 있소? 나는 지난 번 서리에 타 버렸어라."

할머니가 먼저 사건을 만들었다. 나는 역시 소심한 남아인가 보다. 호박모종이라면 충분히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호박모종을 구경시켜 드리고, 덤으로 옥수수 모종도 있으니까 언제든 말씀하시라고, 그렇게 호기롭게 떠들고 난 뒤에서야 겨우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분으로 일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정말로 호박 모종이 필요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닌 것 같다. 할머니 댁에는 비닐과 보온덮개로 지붕을 덮은 하우스가 있지만 내 집에는 그것이 없었다. 서리가 내려서 모종을 태운다면 내 것이 먼저이지 할머니 댁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륜이라는 것은 역시 속일 수가 없나보다.
#이웃집 할머니 #연륜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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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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