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당첨? 구질구질한 공약이 달라 보이네

선거 후보자 명함에서 20대 유권자가 본 정치

등록 2010.05.08 12:40수정 2010.05.0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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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동네가 요즘 들어 북적거립니다. 가끔 구정소식 전단에서라도 한 번씩 스치며 봤던 얼굴부터 난생 처음 보는 얼굴까지. 다양한 얼굴과 목소리들 모두 '동네 지킴이'임을 자처하며 나타나니, 6.2지방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네요.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나 처음 선거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처음 유권자로서 첫 투표를 한 것도 2006년에 있었던 지방선거였네요. 누구를 뽑을까, 어떤 공약이 더 좋을까, 길을 가다가도 후보자 포스터가 보이면 잠시 멈춰서 공약을 유심히 읽어보곤 했었죠. 아직까지도 처음 투표소에 들어설 때의 이상한 떨림이 희미하게나마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뒤 몇 번의 선거를 더 겪고, 딱 그만큼의 실망을 더 마주하다보니 저는 어느새 정치에 관심 없는 2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듯, '88만 원 세대'의 굴레를 쓰고 등록금 마련을 위한 각종 아르바이트와 스펙 쌓기의 쳇바퀴를 굴리며 살아가고 있었죠.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보면 그냥 바라만봐도 골치 아픈 정치는 슬슬 피해가기 마련이죠.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아저씨들이 언성을 높이고 같은 말들만 반복하며 싸우는 정치판에, 하루하루 겨우 먹고살아가는 20대가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똑같은 정치판,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내 인생이란.

선거 홍보전, 거의 테러 수준입니다

이렇듯 평범한, 아니 어찌 보면 참으로 무능력한 20대 유권자인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용산'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용산. 재개발 붐으로 땅값이 엄청 올랐다고들 하죠? 제 주변에도 이때를 노려 차익을 받고 떠나느냐, 아니면 더 버티느냐로 고민하는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토박이들이 떠나고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어수선해진 동네, 이와 같은 뉴타운 재개발의 그늘 속에서 참사가 벌어진 곳도 바로 이 '용산'입니다. 여느 선거 때처럼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이번 선거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마 이러한 용산의 분위기 때문이겠죠.

6.2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용산에서 출마한 정치인들의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예비후보의 딱지를 달고 있는 상태라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이들의 홍보전은 거의 '테러' 수준입니다. 왜? 바로 '명함' 때문입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던 제가 봐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잠시 약속 때문에 집 밖으로 나섰다가 골목골목 포진해 있는 후보들을 거쳐 다시 집에 들어오면 벌써 여러 장의 명함을 받게 되지요. 그동안 이 동네에서 제가 받은 명함만 해도 그 수가 10여 개에 이릅니다. 거기에 오가다 몇 번씩 더 받는 것과 다른 가족구성원이 받아오는 것까지 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납니다. 아직 한 달 가까이 선거운동기간이 남아 있는데, 그 사이 얼마나 더 많은 명함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유권자에게 후보자의 명함은 정보 전달의 접촉 빈도가 가장 높은 수단입니다. 다른 선전물보다 먼저, 그리고 더 가까이 유권자들과 만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구요. 이 때문에 후보자의 명함은 그 어떤 선전물보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집안 한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명함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심심하고 지루합니다. 명함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면 명함의 행태가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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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선거 명함들. 어딘가 하나같이 뻔한 모습이다. ⓒ 고수진


가장 보편적인 선거 명함의 모습입니다. 동네에서 받은 명함 대부분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요. 이들 명함의 앞면을 보면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후보자의 얼굴이 명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확실히 알린다는 목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누가 누구인지, 모두 한 사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친근함을 주기 위해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묵직한 권위가 느껴져 조금 불편하네요. 명함 뒷면도 한 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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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약력과 공약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 고수진


뒷면 또한 비슷비슷한 내용입니다. 주로 약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앞면, 혹은 뒷면에 후보의 공약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작은 명함 안에서 후보가 다수의 유권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약력과 공약, 그리고 이들 간의 관련성일 텐데 하나씩 살펴봐도 후보 대부분의 약력은 그저 자기 자랑에 그치고 있을 뿐, '용산 지킴이'로서 내세운 공약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작은 명함 안에 담긴 고루한 권위의식

용산을 살맛나는 동네로 만들겠다는 후보자들에게, 용산 살리기와 관련 없는 약력은 무슨 의미일까요? 작은 명함 안에 꽉꽉 들어찬 약력들은 불편하고 고루한 권위의식을 다시금 실감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유권자의 시선엔, 아니 명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소한의 관심의 행위를 하는 저의 눈은 의미 없이 빽빽한 활자들로 인해 금방 피곤해질 뿐입니다.   

사실 모든 후보자의 명함들이 지루한 옛 방법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유권자들에게 맞춰 각종 Day 한정 명함을 내놓은 후보도 있고, 아예 여성, 노인, 청년층 등등 명함을 받는 대상의 나이대나 성별을 고려해 명함을 찍는 후보도 있다고 하지요. 이외에도 사각의 답답한 명함모양에서 벗어나 나비, 거북선 등 자신의 지역과 공약에 맞는 모양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명함들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희 동네 명함 중엔 어떤 재미있는 명함이 있을까, 명함의 산을 뒤적여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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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명함의 모습. 명함에 복권을 끌어들였다. ⓒ 고수진


일단 답답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 참신합니다. 공약과 상관없는 약력 자체를 지워버리고 공약 설명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즉석복권처럼 명함의 은박(?)을 긁으면 각각의 공약이 드러나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후보들의 공약과 약력을 피곤하게 읽는 것보다는 직접 긁어서 공약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신기하긴 합니다. 이 후보가 공약들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명함 덕에 친구와 길거리에 서서 오랜만에 동전으로 긁어봤네요. 복권은 예전에 본전치기한 것이 다였는데. 처음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부모님 내복 한 벌 사기 전에 복권부터 한 장 샀었던 불효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고. 공약대로 이뤄진다면야 용산 주민으로서 그깟 복권이 문제겠습니까마는.      

물론 제가 너무 어려서 재미있거나 신기한 것만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답답하고 지루한 것은 살아남기 힘들지요. 특히나 한 번 보고 말 것을 두 번 보게 하고, 세 번 보게 하는 것이 선거 홍보물의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 선거 홍보물이 담고 있는 공약들로 인해 앞으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이 바뀐다면? 다시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진부한 정치는 '외면' 당한다

이번 6.2 지방선거를 위해 뿌려진 명함들을 보고 있자니, 정치인과 연예인은 어떤 면에서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로 주름 없는 얼굴들이 실제 나이보다 참 젊어 보인다는 점이고(현대 의학시술에 기댄 건지, 사진과학의 힘을 빌렸는지 모르지만^^:) 둘째로 직업 혹은 평소의 성품에 따라 웃는 표정의 숙련도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모두 환하게 웃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예인도, 정치인도 모두 자기 직업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요. 결국 자신의 좋은 모습, 좋은 성품, 스스로 지켜온 나름의 철학과 신념을 대중에게, 혹은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한다는 면에서요.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과 연예인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연예인이 출연하는 방송은 새롭고 재미있어요. 아니, 새롭고 재미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연예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더욱 나아가기 위해 매번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연예인으로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정치인들은 어떤가요? 너무나도 재미없습니다. 진부합니다. 유권자들에게 권위가 아닌 친근함으로, 화려한 약력이 아닌 마음 깊이 와닿을 수 있는 참신하고 진심어린 공약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은 답답합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차세대 디자이너를 뽑는 한 케이블 프로에서 이렇게 말하죠. '진보'한 디자인은 박수를 받지만, '진부'한 디자인은 외면당한다구요.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해봅니다.

'진보'한 정치는 박수를 받지만, '진부'한 정치는 외면당한다.

재미없는 선거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상상력 없는 선거 역시 지겹습니다. 파괴와 창조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세상 모든 만물의 법칙인데, 정치는 그 발전이 더딘 것이 명함 하나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력이란, 곧 변화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부함을 벗어난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는 명함, 그리고 그 명함의 후보들에게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은 것이 유권자의 당연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작 명함 몇 장으로 너무 앞서간다고요? 명함 몇 장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 정치판 돌아가는 현실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고루하고 답답한 정치를 해왔다는 거,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 제발 유쾌하고 재미있게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 제발 진부한 사람들은 이제 그만 정치의 사각링에서 '루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쾌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정치를 보고 싶은 20대 유권자의 꿈이, 그냥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6.2 지방선거 #명함 #선거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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