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명이 사람 이름이네

강변길따라 찾아간 경춘선 김유정역

등록 2010.05.18 11:53수정 2010.05.1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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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처럼 기차역 이름도 가지각색인데 그런 기차역명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곳이 있다. 서울 청량리에서 강원도 춘천을 오고가는 경춘선의 기차역 김유정역이 그곳이다. 원래 역명은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에 개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역 이름이 사람 이름으로 지정된 첫번째 기차역이라고 한다.

키가 질 안크는 꼬맹이 점순이와 결혼을 하네 마네 하며 주인공이 예비 장인영감과 머리 끄댕이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웃음이 나고 영화를 본 것처럼 기억나는 소설 <봄봄>의 배경인 마을이 있는 곳. 그 소설의 작가 김유정님이 귀향하여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야학을 운영하고 글을 쓰며 살던 동네다. 종점인 춘천역이 가까이에 있는 아담하고 한적한 분위기의 간이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는 12월로 기차역 김유정역은 사라진단다. 대성리역, 강촌역 등의 다른 경춘선역들도 사람들과 추억을 싣고 오랜 시간 달렸던 무궁화호 기차와 함께 작별을 고하게 되다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경춘선이 이젠 춘천 가는 봄(春)길을 달리는 마지막 기차길이라고 생각하니 짧은 봄이 더욱 아쉬워, 각종 경조사로 꽉찬 오월의 주말 약속들을 제쳐두고 애마 잔차와 함께 경춘선 기차에 올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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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기차를 타고 백양리역에서 내려 강촌역을 지나 강변과 차길과 농촌길을 따라 김유정역까지 잔차를 타고 달려갔다.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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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안에서 먹음 유난히 맛나던 과자와 맥주와 마주볼수 있는 좌석에서 나눈 이야기와 창밖의 풍경은 잊지 못할 경춘선만의 추억이다. ⓒ 김종성


속도를 얻고 낭만과 이야기를 잃다

철도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표를 예매하려고 했더니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지 기차의 좌석들은 이미 매진이다. 하는 수 없이 1시간 넘게 서서 가는 것을 각오하고 (사실은 객차 사이 공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갈 수 있다) 입석으로 가기로 한다.

언제부터인지 경춘선 기차를 타러 갈 때는 청량리역으로 가지 않고 6호선 전철의 거의 종점인 화랑대역으로 간다. 육군사관학교옆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이 간이역은 언제가도 오랜 친구 집처럼 편하고 정감있다.

청량리역에서 춘천까지 경춘선 기차는 1시간 50분 정도를 걸려 달려간다. 서울 춘천간 민자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자가용으로는 1시간도 안 걸리게 되자 사람들은 경춘선 기차의 느린 속도를 못견디고 복선 전철화 공사를 하고 있다. 앞서 파주를 거쳐 임진각을 향해 달리던 경의선 기차처럼 말이다.


내년 1월 1일부터 복선화된 전철을 타면 춘천가는 데 1시간 30분, 추후 몇 년 안에 1시간 정도로 빠르게 갈 수 있다고 한다.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슨 비즈니스로 출장가는 것도 아닌데, 효율과 편리함을 위한 이런 시간 단축이 기껍지만은 않다.

이제 사람들은 기차안을 다니는 작은 스낵카트의 과자와 맥주의 맛과, 마주앉아 나누던 이야기와 기차가 주는 여정의 낭만을 잃어버린 채, 전철의 딱딱하고 길다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MP3를 듣거나 DMB를 보면서 강촌이나 춘천에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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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은 못들어오는 강변길을 따라 가평역쪽이나 강촌역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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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 가는 길에는 이런 풋풋한 농촌풍경을 만날 수 있어 좋다. ⓒ 김종성


봄기운 충만한 강변길과 농촌길을 달리다

타거나 내리는 사람이 드문 백양리역에 내린다. 강촌역처럼 강가에 붙어있는 백양리역 바로 옆에는 강변길을 따라 보행로를 겸한 자전거길이 나있다. 오월의 화사한 봄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눈이 부신 강변길을 따라 애마 잔차를 타고 강촌역을 향해 룰루랄라 신나게 달린다.

주말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평이나 강촌을 오간다. 여름처럼 햇살이 살을 태우듯 뜨겁지도 않고, 땀을 식히라고 강에서 봄바람까지 불어주니 오월은 자전거타기 참 좋은 계절이다.

등뒤에서 불어주는 강바람 덕분에 강촌역에 금방 도착했다. 기차역 담벼락과 기둥에 그래피티(Graffiti)라고 하는 벽화와 사랑의 맹서를 쓴 낙서들로 가득한 강촌역엔 친구들과 놀러나온 젊은이들과 가까운 삼악산에 등산하러온 아저씨, 아주머니들로 기차역 주변이 오일장처럼 시끌벅적하다.       

강촌역 철길위에는 유인 건널목이 하나 있는데 나이 지긋한 직원분이 밥을 해드시려는지 코펠에 쌀을 넣어 수돗물에 바락바락 열심히 씻는 뒷모습이 왠지 애처롭고 한편으론 웃음이 나기도해 김유정역 가는 길을 물어보며 괜히 말을 붙여 보았다.   

물어보길 잘해서 강촌역 앞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삼악산 초입의 등선폭포까지 나있는 강변 산책길을 알려주신다. 경춘선이 전철화되면 주로 지하와 터널속으로 달리기 때문에 기차를 타며 즐기던 창밖의 풍경들은 보기 힘들 거라는 우울한 정보(?)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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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쳐 지나갈뻔 했던 보일듯 말듯 아담한 간이역 김유정역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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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에는 그를 기리는 문학촌이 있어 책도 읽어보고 그의 삶과 시대를 엿볼 수 있다. ⓒ 김종성


봄날처럼 짧게 살다간 작가의 삶이 녹아 있는 김유정역

걷거나 자전거타고 달리기 좋은 강변길과 차길을 잠깐 달리다가 운좋게도 풋풋한 봄날의 농촌길을 만나기도 한다. 짧은 의암터널을 지나자마자 물통도 채울 겸 도로변의 주유소에 들러 김유정역 가는 길을 물어보니, 자전거 타고 가면 좋을 거라며 고맙게도 인근의 팔미천을 따라 가는 풋풋한 농촌길을 알려 주신 거다.

봄기운이 충만한 논밭에는 사람들이 나와 땅을 갈고 새생명들을 심고 있다. 흙내음과 거름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페달을 밟다보니 얼마 안있어 금병 초등학교와 김유정 문학촌이라고 써있는 팻말이 나타난다. 동네 한켠에 숨어 있는 듯한 작은 기차역 김유정역에 다 온것이다. 대합실에 3인용 소파 2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는 정말 작은 간이역으로 잘못하면 모르고 스쳐 지나갈수도 있을 뻔했다.

이 간이역을 품은 동네는 서른살 창창한 나이에 돌아가신 작가 김유정(1908~1937)님의 생가가 있는 고향으로, 실레 마을이라는 동네 이름도 그의 작품처럼 친근하고 정겨웁다.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 김유정의 생가와 문학촌에 들어가 글자가 세로로 써져 있는 그의 책들도 읽어보고, 그가 살다 간 마을의 풍경을 둘러보니 소설 <봄봄>의 주인공들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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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마을이라는 동네이름만큼이나 수수한 금병산길에는 김유정님의 작품을 딴 길들이 나있어 흥미롭다. ⓒ 김종성


김유정 문학촌의 안내 브로셔에 실레마을이 들머리인 금병산(652m)길을 추천하기에 산 중턱까지 걸어가 보았다. 산속 갈래길마다 김유정님의 작품을 딴 <금 따는 콩밭길> <산골 나그네길> <동백꽃길> 등이 팻말과 함께 나있다. 산세도 험하지 않고 잣나무등의 울창한 수목들이 만든 시원한 그늘과 낭랑한 새소리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고요한 흙길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평상복의 사람들이 여유로이 오가는 한가로운 금병산에서 내려와 동네 어귀 어느집 앞 양지바른 담자락밑에 홀로 앉아 있는 할머니와 눈길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할머니"하고 외지인의 예의를 보이자, 친구는 어디 가고 혼자 다니냐며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할머니의 순수한 표정이 고마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할머니, 얘(자전거를 가르키며)가 제 친구예요" 싱거운 내 대답에 그냥 웃는 할머니의 자그마한 체구가 마을의 소담한 풍경과 아담한 간이역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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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인 경춘선은 마주오는 기차에게 길을 양보하기 위해 이렇게 잠시 서있곤 한다. ⓒ 김종성

덧붙이는 글 | 5월 15일에 다녀 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5월 15일에 다녀 왔습니다.
#경춘선 #김유정역 #자전거여행 #금병산 #실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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