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있는 온누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53] 버나드 볼프, <안나가 사는 조용한 누리>

등록 2010.05.30 14:29수정 2010.05.30 14:29
0
원고료로 응원

 

a

장애인 삶을 다룬 버나드 볼프 님 사진책 두 가지. ⓒ 최종규

장애인 삶을 다룬 버나드 볼프 님 사진책 두 가지. ⓒ 최종규

 

 

- Bernard Wolf, < Anna's Silent World >(Lippincott,1977)

 

버나드 볼프라고 하는 분이 일군 <Connie's New Eyes>(Lippincott,1976)라는 사진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커니라고 하는 사람한테 길동무개 한 마리가 찾아들어 커니한테 새로운 두 눈이 되어 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룬 사진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분한테서 2002년에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가 쓴 헌책방 이야기를 읽고 나서 미국에 있는 헌책방에 틈틈이 마실을 가신다고 하는 분인데, 그무렵에 미국에 있는 어느 헌책방에 찾아가 <Connie's New Eyes>를 만나 기쁘게 읽고는 저한테 보내 주셨더군요. 그러고 나서 다섯 해 뒤인 2007년 가을, 서울 노고산동에 자리한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서 <Connie's New Eyes>를 일군 버나드 볼프 님이 내놓았던 또다른 사진책 <Anna's Silent World>를 만났습니다. 빛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꾸리지만 누구보다 빛나는 삶인 커니라고 하는 사람 이야기를 다룬 <Connie's New Eyes>라면, 소리 없는 누리에서 삶을 보내는 여섯 살배기 안나한테는 그 누구보다 고운 소리가 마음속에 가득한 이야기를 다룬 <Anna's Silent World>입니다.

 

두 가지 사진책을 나란히 놓고 틈틈이 들여다보고, 둘레 이웃이나 동무한테 보여주곤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님 삶을 다룬 사진책은커녕 귀머거리 삶을 다룬 사진책조차 만나기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나라에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없을는지요.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님'과 '귀머거리'라고 하는 토박이말을 놓고 '장애인 차별'을 한다고 이야기하며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라는 낱말을 쓰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이인이라는 낱말이든 장님이나 귀머거리라는 낱말이든, 똑같이 눈과 귀가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이름일 뿐입니다. 장애인을 일컫는 이름이 어떠하든 우리 스스로 장애인을 고운 이웃이자 동무로 삼거나 지내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장애인을 비장애인하고 어깨동무하는 살가운 목숨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이름 하나 갖고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올바른 정책이 없음을 탓하지 않고 이름 하나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a

속 사진. 아이가 옆에서 책장을 넘겨 주어 더 재미나게 찍었습니다. ⓒ 최종규

속 사진. 아이가 옆에서 책장을 넘겨 주어 더 재미나게 찍었습니다. ⓒ 최종규

 

아무래도 이런저런 우리네 안쓰러운 삶자락 때문에 장님 삶을 다룬 사진책이든 귀머거리 삶을 보여주는 사진책이든 일구지 못하겠지요. 내 이웃을 내 이웃 그대로 껴안지 못하는 우리들이니까, 내 동무를 내 동무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이니까, 내 살붙이를 내 살붙이 그대로 돌보지 못하는 우리들이니까.

 

일본사람 준코 카루베 님이 일군 만화책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와 <신, 엄마 손이 속삭일 때> 스물세 권이 있습니다. 귀머거리인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을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이 만화책 스물세 권이나 장애인 삶을 다룬 또다른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를 보면서 새삼 느꼈는데, 장애인 아닌 사람은 장애인을 마주할 때에 장애인 눈높이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외국사람을 마주하면 한국말이 아닌 영어를 쓰려고 용을 쓰는데, 귀머거리인 사람을 마주할 때에 손말을 써야 하는 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느덧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고등학교에서는 두 번째 외국말을 가르치지만, 정작 우리네 학교에서는 손말이나 점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깨동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사진책 <Anna's Silent World>를 들여다보면 여섯 살배기 안나한테 손말을 쓰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안나한테 소리를 듣도록 하려고 애쓰고, 입으로 말을 하도록 가르치려고 힘씁니다. 식구나 동무나 교사 가운데 스스로 손말을 익혀 안나한테 가르쳐 주면서 서로 소리없는 말을 나누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a

속 사진. ⓒ 최종규

속 사진. ⓒ 최종규

 

다리가 없거나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 못하는 사람은 바퀴걸상을 탑니다. 이들한테 걸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팔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밥을 떠먹을 수 없습니다. 이들보고 숟가락질 잘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를 바라보며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여린 어린이한테, 힘없는 어르신한테, 가난한 이웃한테, 고단한 동무한테, 어떤 모습과 매무새와 생각으로 마주하고 있을는지요.

 

사진기를 움켜쥐고 있는 우리들은 사진기를 바라보고 있는 취재원이나 피사체가 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눈높이인지 궁금합니다. 사진기를 들이밀고 있는 우리들은 사진에 찍히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매무새인지 궁금합니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은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 어떤 사람들 어떤 삶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사진 하나로 이루거나 나타내거나 밝히거나 보이려고 하는 삶자락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소리 넘치는 누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은 숫자라 할 수 없는 꽤 많은 사람들은 소리 없는 누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넘치는 누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곱거나 빛나거나 좋은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리가 없는 사람들한테 곱거나 빛나거나 좋게 다가서는 삶일는지, 갖가지 자질구레하고 구지레한 소리만 넘치는 삶일는지 모르겠습니다.

 

확대 ( 1 / 7 )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10년 6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5.30 14:29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10년 6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사진책 #사진읽기 #책읽기 #삶읽기 #장애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