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전봇대는 몇 살일까

[골목길 사진찍기 17] 일흔한 살 묵었지 싶은 나무전봇대 앞에서

등록 2010.06.07 10:16수정 2010.06.0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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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 나이는 얼마쯤일는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골목동네 골목집에 눈길을 두는 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나 기자가 없는 만큼, 나무전봇대 하나를 눈여겨보는 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나 기자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학과 교수한테 여쭌다고 알 수 없고, 건축학과 교수한테 여쭈어 본들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옛 체신부 자료를 들추면 알 길이 있는지 모르며, 오늘날 한국전력 자료 어딘가에 꼼꼼히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나무전봇대를 이야기하면 요즈음에는 동네 골목길 문화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전기를 실어 나르는 전봇대란 가난한 사람들이 쓸 수 없는 문명이었습니다. 나무전봇대를 처음 박았던 지난날 세월이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들어온 전기를 가난한 어느 누가 쓸 수 있었겠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삶이나 문화하고 잇닿아 있던 나무전봇대입니다. 아니, 전기는 돈있는 사람이 쓰고 나무전봇대는 돈없는 사람들 마을에 박아 놓고 전기가 흐르도록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숱한 송전탑은 바로 산과 들과 가난한 동네 한복판에 서 있기 일쑤이니까요.

나무전봇대가 나무전봇대로 남아 있는 곳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나무로 만든 전봇대가 이 나라에는 거의 남아나지 않습니다. 나무로 박는 전봇대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쓰는 어마어마한 전기를 댈 만큼 무거운 전깃줄을 받치기 어려운 탓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전기를 많이 쓰는 탓에 나무전봇대를 세울 수 없다 할 만하지만, 전봇대를 나무로 촘촘히 박자면 나무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야 하는데, 이 나라에는 전봇대로 삼을 만한 굵고 튼튼하고 키큰 나무가 얼마 안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무로 짠 책꽂이를 좋아하고, 나무로 만든 책상을 좋아하며, 나무로 빚은 물건을 아낄는지 모르지만, 정작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 수 없도록 우리 숲은 초라하거나 쪼그라들어 있습니다.

따로 나무전봇대만 만나고자 골목마실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무전봇대가 아직 튼튼하게 서 있는 자리를 점으로 하나하나 찍어 놓고 이곳에서 저곳까지 움직이면서 골목동네 삶터를 느껴 볼 수 있습니다. 오늘까지도 튼튼하게 서 있는 나무전봇대를 비롯하여 길바닥 가장자리 눈에 잘 안 뜨이는 구석진 곳에 목아지만 살짝 남아 있는 나무전봇대 자국을 헤아리면서 지난날 전기줄이 어디에서 어디로 뻗었는가를 돌아봅니다.

한국전쟁 때 옛 사진을 들여다보면 어디에나 어김없이 보이는 나무전봇대요, 일제강점기 시가지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도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나무전봇대입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새로 심은 나무전봇대는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맨 첫 나무전봇대라면 일제강점기일 테고, 골목마실을 하노라면 '틀림없이 일제강점기에 박은 나무전봇대로구나' 하고 어림할 녀석들을 만납니다. '昭 14 9'라는 글월이 새겨진 쇠딱지 붙은 나무전봇대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인 '소화 14년(1939년)'에 박아 놓은 나무전봇대가 아니랴 싶고, 이 나무전봇대가 비바람과 햇볕에 낡고 닳은 매무새와 엇비슷한 나무전봇대들은 나이가 얼추 비슷비슷하리라 느낍니다.

한 해 두 해 묵으면 묵을수록 더 빛이 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전봇대 하나입니다. 나무전봇대한테도 '그루'라는 말마디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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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 하나. ⓒ 최종규


81. 인천 동구 송림4동. 2010.6.2.07:41 + F13, 1/80초
나무로 박은 전봇대는 달동네 골목집보다 오래도록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날에는 전기를 나르는 구실 한 가지만 했다면, 오늘날에는 골목동네 나무전봇대는 빨래줄 노릇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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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 둘. ⓒ 최종규


82. 인천 중구 경동. 2010.5.30.12:48 + F11, 1/80초
머잖아 잘려 없어질 나무전봇대 하나입니다. 지난해 겨울까지는 막다른 골목길 한켠에 서 있던 나무전봇대였으나 공영주차장을 늘리며 이제 목아지 달아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나무전봇대가 되었습니다. 어른 키보다 높은 자리에 붙은 쇠딱지 하나 비바람과 햇볕에 슬어 글자가 아스라한데, 오동나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이 나무전봇대 쇠딱지에는 '昭 14 9'라는 글월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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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 셋. ⓒ 최종규


83. 인천 동구 송림6동. 2010.6.2.08:18 + F14, 1/80초
집자리 하나 헐린 자리에 조용히 남은 나무전봇대입니다. 빈 집터는 조그마한 동네 텃밭이 되면서 마음 짓궂은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자리가 됩니다. 조용히 서 있는 나무전봇대는 착한 동네사람 손길을 타며 풀꽃하고 어우러져 있는 한편, 나쁜 동네사람 손길 때문에 쓰레기 냄새에 함께 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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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 넷. ⓒ 최종규


84. 인천 동구 만석동. 2010.6.3.17:10 + F16, 1/80초
전기 나루는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나무전봇대는 한국전력에서 싹둑 베어내기 마련입니다. 나무전봇대가 온나라 수만은 있었을 테니까 이들 모두를 박물관으로 모실 수 없었을 터이며, 새로 시멘트전봇대를 박을 때에는 거치적거렸겠지요. 그러나 경인전철하고 맞붙은 골목집으로서는 빨래대 하나 박기 어려웠기에, 제구실을 마친 나무전봇대는 아주 좋고 반가운 빨래대가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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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 다섯. ⓒ 최종규


85. 인천 동구 송림1동. 2010.5.2.09:34 + F7.1, 1/80초
목아지 잘린 나무전봇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만큼은 나무전봇대를 고이 쓰다듬습니다. 사람 손길과 눈길을 타지 않는 나무전봇대에는 해마다 새싹이 돋아 푸른 기운이 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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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 잘린 모습.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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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 서 있는 골목길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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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를 품은 호젓한 골목.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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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를 껴안은 골목집 계단.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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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는 시멘트전봇대와 함께.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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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전봇대 나이를 가늠하도록 돕는 쇠딱지 하나.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나무전봇대 #골목길 #인천골목길 #사진찍기 #골목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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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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