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식 영어 발음, 정말 파리때문이었구나

[네 바퀴로 가는 호주 아웃백 12] 찰빌에서 버즈빌까지

등록 2010.06.13 10:42수정 2014.12.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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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라에서 버즈빌로 가는 비포장 도로 윈도라에서 버즈빌로 가는 약 270여 Km의 비포장도로는 길이라보다 들판에 가깝다. 광막한 황무지를 그레이더로 밀어 길을 내었다. 비포장을 주행할 때는 공기압을 줄여 접지력을 늘리는 것이 좋다. ⓒ 오창학


또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출발을 준비한다. 4시에 일어나 5시 갓 넘은 시간에 패트롤의 시동을 걸었다. 야생동물 때문에 위험한 밤 시간을 피하며 시간을 버는 방법은 새벽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캥거루나 다른 동물들이 출몰할 시간이지만 날이 밝아오리라는 희망으로 당장의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심장이 멎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정지해서이니까.

내비게이션에 455Km 직진 후 우회전 안내가 뜨는데도 놀라질 않는 것을 보니 이제 아웃백의 광막함에 적응해 가는 것 같다. 아내의 말대로 지 좋아서 하니 가능한 일이지 돈받고 일하는 것이면 하루 800Km를 운행하고 한뎃잠 자며 돌아다니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캥거루와 함께 호주를 대표하는 '에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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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에서의 그림자 밟기 놀이 떠오른 태양을 등으로 맞는다. 직선으로 뻗은 단조로운 길에서 길게 뻗은 그림자를 밟으려 열심히 뒤쫓지만 언제나 한 발치 앞에 있다. ⓒ 오창학


가곡 '님이 오시는지'를 크게 틀고 달리는데 사이드 미러에서 해가 떴다. 엷은 주황이 검은 지평선과 아직 남빛으로 남은 하늘 사이에 띠를 둘렀다. 서서히 뒤통수가 밝아온다. 퀼피(Quilpie)를 목전에 두고 차 그림자가 정면으로 길게 뻗어 먼저 달린다. 꼬리를 밟을 듯 다가서면 그림자는 저만치 앞서 있다. 내게서 나왔으되 결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다.

그림자 놀이를 하며 달리는 무인공도에서 이따금 방목하는 소들이 길을 막는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낮캥거루들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들판의 이색적인 존재들은 에뮤다. 아웃백의 야생 사파리 느낌을 물씬 자아내게 하는 존재인데 현지에서 '이뮤'라 발음하는 에뮤(Emu)는 타조 다음으로 큰 새다. 시속 40~50Km로 뛰는 달리기 선수이고 계란 12개만한 알을 수컷이 두 달 동안 꼼짝 않고 품는 부성애 강한 새이기도 하다.

차를 멈추니 슬금슬금 경계를 하는데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파르르 달아났다가 다시 다가온다. 얼핏 봐서는 타조나 에뮤나 다 같다 생각하기 쉬운데 결정적으로 목에 털이 있으면 에뮤, 없으면 타조다. 세밀하게는 발가락이 세 개면 에뮤, 두 개면 타조. 정말 정밀하게는 깃털을 주워봐서 하나의 깃대에 두 개의 털이 달려있으면 에뮤, 그렇지 않으면 타조다. 그러나 굳이 구분하려 애쓸 필요 없다. 호주에서 마주치는, 달려다니는 큰 새는 다 에뮤라 여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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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뮤 타조와 흡사한 에뮤는 호주 국가 문장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새다. 뛰어다니는 새. ⓒ 오창학


오죽하면 호주의 국가 문양에 캥거루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에뮤일까. 호주에만 존재하는 수천 종의 동물 중 캥거루와 에뮤가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뒤로는 가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앞으로 향하는 진취적 기상, 그것을 호주의 정신으로 삼고 싶었을지 모른다. 뒷걸음질 할 수 없는 운명은 저 동물과 새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일본보다 넓은 지역에 1200명이 살아요"

중간기착지 퀼피(Quilpie)에 들렀다. 퀼피는 지도상의 굵은 마을 표지에 비하면 생각보다 작고 한산한 곳이고, 이제껏 지나친 작은 촌락에 비하면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아파트 한 두 개 동에 거주하는 인구에 불과하지만 아웃백에서 인구 600여 명의 마을이라면 무시할 만한 규모는 아니다.

일종의 마을 역사박물관이라 할 안내소 전시관에는 이 마을의 내력을 알 만한 사진자료들이 있고 개척기 당시의 전화교환기나 소소한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친절하게도 안내소를 지키는 아주머니가 구석구석 전시된 사진들을 짚어가며 마을의 내력과 특성을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독 산불(들불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려나?)이 많은 아웃백 지대의 '파이어 파이터(소방관)'들, 개에게 먹이를 주는 목장 주인, 그리고 마을 앞에 정차한 역마차가 흑백의 자태로 이곳의 역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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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피 전경과 마을 전시관 작은 마을에 그 마을의 역사를 알 있는 전시관이 있어 유용했다. 흑백 사진 속 인물들과 옛 물건들을 보노라면 지나가는 땅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 오창학

인근 지역(Adavale)의 홍수피해로 1973년 기차선이 이곳으로 옮겨져 이 마을이 번창했다니 저 흑백사진이 말하는 과거는 엄밀히 이 지점의 역사는 아니지만 이 광대한 지역에서 이 정도라면 한 마을이나 진배없다. 인구를 물으니 마을 인구 605명에 지역 전체 인구 1200명이라며 우스개소리처럼 이렇게 덧붙인다.

"일본보다 넓은 지역에 1200명이 살아요."

또 얼마간의 설명 끝에 이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일본인이라 생각하나 보다. 어디까지를 한 권역으로 잡고 일본보다 크다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웃백의 광막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임에는 공감한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안내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 부럽다는 아내와 경숙의 말에 공감하며 안내소를 나왔다.

퀼피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타이어 가게를 발견했다. 심슨 사막을 목전에 두고 단 하나뿐인 예비타이어 때문에 내내 갈등을 해왔던 터였다. 어제를 기해 예비타이어를 하나 더 확보해야 된다는 것까지는 중론을 모았었는데 오늘 동부아웃백의 거점타운인 찰빌을 새벽에 떠나야 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물가 비싼 버즈빌에서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가게에서는 우리 차에 끼운 것과 같은 규격의 타이어가 없단다. 회사의 종류와 규격이 다르더라도 유사한 제품을 살까했지만 이왕 휠까지 사야하는데 가급적 일치하는 것으로 준비하고 싶어 주인에게 심슨사막을 건널 생각인데 예비 타이어 한 개로 위험하지 않겠냐 물으니 희망적인 대답을 준다.

"솔직히 예비타이어가 필요 없을 수도 있어. 천천히만 간다면 말이지. 대개는 두 개를 준비하지만 난 하나를 준비하기도 하거든. 충분한 물과 연료, 그리고 여유만 갖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람은 본시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습성이 있어서 주인의 위안이 예비타이어가 하나 뿐이어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렸다. 버즈빌에서 알아보고 거기도 없으면 그냥 가지하는 마음으로 굳어졌다. 대신 20리터 제리 캔 하나를 더 샀다. 지금 두 개 외에도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가져갈 상황도 안 되고 해서 부족한 부분은 10리터, 15리터 생수통을 활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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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의 길들 (왼쪽 위)전형적인 아웃백의 길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길 왼쪽의 흰 푯말은 여름 우기 때 물이 범람하는 곳으로 수심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너머 왼쪽에 차에 치인 왈라비 사체가 누워있다. 지평선 끝으로는 아지랑이 같은 신기루 사이로 차 한 대가 달려온다. (오른쪽 위) 버즈빌로 가는 비포장길 (왼쪽 아래) 종종 신기루들이 보인다. (오른쪽 아래) 아웃백에서 보기 드문 강의 모습. 퀼피로 가는 길. ⓒ 오창학


이럴 때 한국에 두고 온 '백구'(실크로드 여정을 함께 했던 필자의 무쏘 스포츠) 생각이 간절했다. 렌트카에 애매한 돈을 들이기가 아까워 이것저것 미루게 되는데 이 점이 불안하다. 백구였다면, 그리고 그 안에 준비된 것들을 모두 가져올 수 있었다면 이렇게 타이어나 기타 장비 때문에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하지만 백구는 한국집에 있고 지금 내겐 패트롤이 함께하고 있을 뿐이다.

가격도 더 고가이고 전체적인 성능도 우수한 데다 광활한 대륙지형에 특화된 우수한 차량과 함께 하면서 멀리 두고 온 내 것을 그리워해봐야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다. 어떻게 패트롤 이 녀석과 함께 앞길을 헤쳐 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산다는 것도 이런 식이지. 불안하니까 계속 준비하는 것. 보험도 들고 저축도 하고, 그러다 그렇게 늘어난 짐에 치어 살다가 때되면 가는 거지. 다 놓고. 소중한 무엇인가가, 혹은 누군가가 옆에 있어도 더 좋은 무엇인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지난 사람이 더 좋았던 건 아닐까 싶고. 좀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싶은데 쉽지 않다.

전교생 8명인 학교의 '첫 스폰서'가 되다

찰빌에서 210Km 이동한 곳이 퀼피이고, 퀼피에서 278Km를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 윈도라(Windorah)다. 윈도라는 오늘 목적지 버즈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지막 마을이다. 이곳 펍에서 간단한 스낵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때가 지났다고 식사류는 팔지 않았다. 이렇게 펍에 들르면 묘한 긴장과 안도가 동시에 느껴진다. 낯선 곳, 그리고 낯선 사람과 다시 조우하는 긴장과 먼 길을 달리다 이제 잠깐 쉴 수 있다는 평온함. 나는 기껏 콜라 한 잔에 영혼을 의탁하지만 아내와 경숙, 최 감독은 그토록 그리던 시원한 맥주에 가슴 설레했다. 우리 차에 있는 냉장고에도 손이 시릴만치 차가운 맥주가 있었지만 펍의 테이블에 앉아 먹는 맛은 또 다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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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라의 펍 펍은 마을의 사랑방이자 나그네를 위한 정자이다. 비슷한 듯 개성적인 모습들이어서 아웃백 마을들을 대표한는 상징이기도 하다. ⓒ 오창학


음주의 여부를 떠나 펍에서는 색다른 냄새가 났다. 아웃백 마을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고 색깔이 있지만 사실 작은 아웃백 마을들의 전모는 펍으로 응집되어 표현되는 것 같다. 펍은 술집이요, 식당이자, 숙소이면서 안내소이다. 그런 역할을 통해 마을사람들을, 혹은 마을사람과 외지인을 엮어주는 매개의 장소가 되고 있다. 정보 교환과 사교, 갈증과 허기의 충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랑방이다. 펍의 인테리어나 음식, 운영체계에는 어떤 전형이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이 느껴진다.

인구 80명의 작은 마을이라는데 서빙하는 젊은 처자는 워킹 홀리데이로 온 아일랜드 아가씨다. 버즈빌 숙소를 예약해 놓고 가고 싶었는데 여긴 휴대전화가 안 되는 지역이란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자긴 그래서 평화롭단다. 아일랜드 아가씨가 이 깊은 아웃백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 감성은 있는 사람이겠지. 우리도 공중전화로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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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라에서 놀이용품 구입을 위한 학교 스폰서 프로그램에 첫번째 기부자가 되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와 우리 얼굴에 엄청난 파리떼가 달라붙는다. 얼굴에 있는 검은 점이 파리들인데 입과 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 오창학


펍에서 늘어지게 쉬다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려는데 자전거를 탄 어린 학생 둘이 멈춘다. 스스럼없이 무슨 종이쪽지를 내미는데 윈도라 초등학교 아이들의 스폰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내용이다. 기부금을 모아 놀이용품을 구입한다나 어쩐다나.

수학 과목을 좋아한다는 마크라는 아이가 인터뷰를 하는 사이 정신없이 파리가 달려드는데 그의 눈 속으로 들어설 것처럼 맹렬하고 억세 보인다. 말하는 와중에도 입에 담길 것처럼 위태롭다. 말로만 듣던 호주 파리의 명성을 이제 현실에서 겪게 되는 것을 보니 여기가 아웃백은 아웃백인가 보다. 오죽하면 입을 오물오물하는 것처럼 하는 호주식 영어 발음이 파리 때문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방인들에게 말을 건네준 정성이 고마워 재정담당관인 아내에게 기부액을 물었다.

"1달러 줄까? 아니면 2달러?"
"그냥 1달러만 줘."

역시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아내답다.

"그런데 이미 기부명단에 국적을 썼어."

아이들에게 너무 깔보이는 게 아닌가 싶어 아내에게 재청한다.

"그럼 2달러 줘."

나는 개인이지만 이 아이들에겐 '한국인'의 이미지로 남을 것이니 이도 저도 못하게 된 셈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번지 점프를 할 때 마지막 순간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국적을 묻는다지. 그러면 열에 아홉은 이를 악물고 뛴다더니 딱 그 꼴이다. 놀이용품 구입을 위한 프로젝트에 우리가 첫 번째 스폰서가 되었다.

"너희 학교는 학생이 몇 명?"
"8명"
"엥? 겨우 8명? 학교가 저렇게 큰데......"

인구가 80명인 마을에 초등학생이 8명이나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8명을 위한 학교를 유지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때론 삶의 시동을 꺼야 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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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빌 가는 길 조금 더 들어가면 비포장 길이 시작되고 저 광야를 건너면 심슨 사막의 초입 마을 버즈빌에 도착하게 된다. ⓒ 오창학


윈도라를 나와 포장길로 109Km 가다가 제이씨 호텔 유적(JC Hotel ruins)에서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이제 277Km만 가면 버즈빌(Birdsville)이다. 해가 눕고 있다. 대지가 붉어지고 다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명색이 도로라는 게 황무지를 그레이더로 광활하게 밀어놓은 것이다. 때문에 캥거루가 갑자기 뛰어드는 부담에서는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후다닥 후다닥 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 밤길을 가게 되었다.

비포장길에 맞게 공기압을 조정하고 상향등을 켠 채 달렸다. 따르는 차도, 마주 오는 차도 없는 광막한 어둠에 덩그러니 던져져 그저 갈길을 간다. 꽁지에 매단 긴 먼지구름과 바퀴에 튕기는 잔돌 소음만 친구가 되어 동행한다.

어느 구릉쯤을 넘을 때였다.

"잠깐만요."

최 감독이 잠깐만 차를 세우란다

"왜요? 무슨일 있어요?"
"잠깐만 차 좀 세워보세요."

그의 말대로 시동을 끄고 전조등을 죽이는 순간,

"아!......."

일시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전면 방풍창에 별이 가득하다. 튕기듯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길이 닿는 모든 하늘과 그렇지 못한 공간까지 영롱한 빛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지평선에서부터 별이 시작되는 이 진기한 세상을 어떻게 형용해야 하나. 이마를 훑는 바람마저 소리를 죽이고 감촉으로만 존재하는 어둠의 공간, 그 위에 흩뿌려진 경이로운 광채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오래 서 있었다. 오직 어둠을 뚫고 목적지에 가는 것만 생각했던 나와 달리 최 감독은 전조등 속에서도 저 별빛을 감지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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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빌 가는 길에 접한 밤하늘 시동을 끄고 잠깐의 여유를 내니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진다. 별이 눈 높이에서 시작되는 황홀한 광경이 천지에 있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면 볼 수 없다. 우리 일상에서도 시동을 끄는 시간이 필요하다. ⓒ 오창학


잠깐의 여유가 주는 충만과 행복에 그렇게 몸을 맡겼다. 쫓기듯 살지 말자. 그저 바람에 먼지가 쓸리듯 불어지는 대로 그렇게 살지 말자. 브레이크 없는 어제의 관성에 오늘을 얹어 묻어가지 말자.

인생에서도 여행처럼 반 박자 엇갈리는 휴식이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를 체감한다. 기껏 목적지에 빨리 가겠다고, 늦은 밤을 탓하며 열심히 달리기만 했더라면 과정이 주는 이 아름다움을 놓칠 뻔 했다. 여행을 끝내고 돌이켜 생각하면 목적지인 버즈빌보다 그곳에 이르는 이 길의 추억이 더 소중하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삶의 질주에서 내려 일없이 밤하늘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별이 뿌리는 빛의 은총과 감동을 누릴 필요가 있다. 

현기증이 일만큼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두고 온 공간을 떠올렸다. '경쟁' 혹은 '스펙'이 신앙이 되는 광기의 시대, 효율 앞에 묵살되는 원칙과 대의, 내일을 위해 저당 잡히는 오늘을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공포스런 세상에서 우린 한 박자만이라도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스치는 이 아름다운 삶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저 살아가는 대로 살아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884년 지어진 아웃백의 아이콘 버즈빌 호텔

오후 9시 30분이 넘었을 무렵 광야 저편에 핀 대지의 별무더기를 보았다. 작은 마을 버즈빌이 뿜어내는 인공의 조명이 눈물나도록 반갑다. 비포장길 270여 Km를 포함해 875Km를 16시간 만에 도착한 오늘의 목적지다. 야음을 틈타 들어섰던 새로운 세계가 어디 한 둘이었을까만 심슨사막 진입을 앞둔 마지막 마을 버즈빌에서는 안도와 비장함이 버무려진 묘한 감정이 든다. 

일주일 만에 '숙소'라는 곳에서 자는 날이다. 이곳도 캠핑장이 있긴 하지만 1884년 지어져 지금도 아웃백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버즈빌 호텔'에 묵어보지 않는다면 알맹이를 빼놓은 버즈빌 체험이 될 것 같아 낮에 예약까지 하며 찾아온 곳이다.

짐을 풀자마자 버즈빌 호텔의 펍으로 갔다. 나이트 클럽을 방불케 하는 강한 비트의 음악이 심장을 울린다. 이곳 태생이 아닌 대부분의 거주민들과 여행자들이 이 외진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펍에 모여 맥주와 음악에 젖는 것일 게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인 만큼 날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선을 보일테니 사람 만나는 재미도 적지 않을 테고.

성탄 전야의 축일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오늘만큼은 모든 걸 잊어도 좋아. 내 직업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는 묻지 말아줘. 그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지, 하는 그런 분위기. 그 북새통에도 짤막한 네 명의 동양인은 눈에 띄나 보다. 연신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하고 말을 걸어온다.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고 그저 좀 더 이방인스러운 자에 대한 관심이라고나 할까.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여인은 아예 나와 최 감독 앞에 자리를 깔았다. 알근하게 취기가 올라 깔깔거리길래 '이거 뭐야, 작업인 거야?'하고 오해를 했는데 그보다 더 취한 남친이 가세하고 저 쪽에 있던 경숙과 아내마저 합류해 그냥 술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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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빌 호텔 아웃백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버즈빌 호텔답다. 1884년부터 자리를 지켰던 펍이다. 맥주와 음악, 사람에 젖을 수 있다. ⓒ 오창학


최 감독이 펍 분위기를 캠코더로 촬영하고 싶어 주인에게 물으니 알 에프 디 에스 (R.F.D.S)모금함에 기부금을 넣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단다. 기꺼운 마음으로 돈을 넣었다. 인적이 드문 아웃백 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시스템 때문이니까.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al Flying Doctor Service)는 1928년 호주 태생의 장로교 선교사 존 플린(John Flynn)이 창설한 항공의료서비스다. 호주 전역에 22개 기지가 있어 각 권역별로 약 600Km 반경의 지역을 담당하는데 응급상황시 의료설비가 탑재된 경비행기가 날아와 1차 진료를 하면서 거점 병원으로 후송하게 된다.

호주 대륙의 80%는 이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고, 1년에 18만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니 아웃백 지역을 다니는 한 나도 언제 저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몇 푼의 기부금이 아까울리 없다. 이 단체의 운영비는 정부에서 대고 있지만 안전을 위해 10년마다 교체하는 항공기나 의료 장비 비용은 기부로 해결한다.

그래도 기부한 만큼 본전을 회수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료보험이 되는 호주국민은 무료지만 외국인의 경우 막대한 실비를 물게 될 것이다. 우리야 여행자 보험이 있으니 경비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그래도 모금함이 보이면 기꺼이 돈을 넣을 것이다. 성황당에 나그네의 안전을 기원하며 돌 하나를 얹는 마음이면서 이 서비스가 갖고 있는 정신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우린 널 절대로 버리지 않아."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조직과 단체를 위해 개인이 늘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시스템 속에 살아온 나로서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부럽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고 정부기관이 국민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수도 있는 사회에서 온 사람의 눈에는, 오지의 소수자를 위해 막대한 항공기 유지비와 의료진 비용을 감당하는 지극한 비효율이 눈물나도록 고맙다. 그러면 또 누가 그럴려나? 이 사람아, 그건 놀고 버려지는 땅이 없도록 하기 위한 국가적인 투자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말 긴 하루를 마쳤기 때문일까. 드디어 심슨사막의 경계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버즈빌 호텔 펍에서 간만에 푸근한 마음을 녹였다. 펍의 음악소리가 잦아들 무렵 잠자리로 돌아왔다. 텅빈 마을의 가로등 몇이 어둠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호주 #아웃백 #자동차 여행 #대륙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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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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