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이지 않았는데, 증거는 넘쳐난다?

제프리 디버의 <브로큰 윈도>

등록 2010.06.20 16:48수정 2010.06.2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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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윈도> 표지 ⓒ 랜덤하우스코리아

<브로큰 윈도> 표지 ⓒ 랜덤하우스코리아

어느 날, 경찰들이 찾아와 '당신'을 어떤 여자의 살인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한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된다고 여기는 당신은 경찰들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믿을 것이다.

 

당신은 살해당한 여자가 누군지도 모를 뿐더러 살인이라는 행위를 저지를 만한 무모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찰을, 혹은 변호사가 진실을 쉽게 알아낼 거라 믿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조사를 하면 할수록 '당신'의 범죄가 확실하다면 증거가 나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당신은 살해당한 여자와 같은 동호회의 정모에 나간 적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비밀스러운 연인이라는 증거가 나왔다. 또한 그녀가 살해당한 날에 그녀의 집에는 당신의 흔적이 있었고 당신의 집에는 그녀를 살해했다는 몇 가지 증거가 나왔다면 어떨까?

 

하필이면 여자가 살해당하던 시간에 '당신'은 알리바이가 없고 하필이면 누군가가 목격자처럼 전화를 했고 하필이면 당신이 살해할 만한 동기, 예컨대 여자 친구가 짜증나게 한다는 메일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적이 있다. 물론 당신은 그런 메일을 보낸 적이 없지만, 경찰이 조사해보니 당신의 메일함에 그런 메일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당신'이 범인이라고 할 것이다. 정황상 그런 것이 아니라 분명한 증거들까지 있다. 당신은 결백하다고 말하지만 변호사조차 그것을 믿지 않는 눈치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없다. 졸지에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의 여덟 번째 이야기 <브로큰 윈도>의 살인마는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소설 속에서는 인간의 자료를 수집한다는 '데이터 마이닝' 회사가 있다.

 

회사는 미국을 넘나드는 수억 명의 인간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 자료는 테러나 범죄 방지 등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연쇄살인마가 그것에 접근한다면? 범인은 자신의 범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있다. 자료를 조작할 수 있고 증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디지털을 이용한 완전 범죄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브로큰 윈도>의 법의학자 링컨 라임이 이것을 눈치 챈 것은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사촌 아서 라임이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모든 정황이 아서 라임이 범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법의학자는 오히려 그가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특히 증거들이 너무 뚜렷한 것이 의심스러웠다. 링컨 라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비슷한 범죄들이 있나 찾아보고 곧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아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했다는 것을. <브로큰 윈도>는 그렇게 시작한다. 천재 법의학자와 타인의 신분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의 대결이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다.

 

<본 컬렉터>를 시작으로 그동안 발표하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켰던 '링컨 라임 시리즈'가 벌써 8편에 이르렀다. 이 정도 됐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징후가 보일 법도 한데, 제프리 디버의 소설에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매번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전편의 악당들을 우습게 만드는, 새롭거나 더 강렬한 범인을 창조하고 그것에 맞춰 주인공인 링컨 라임 역시 진화하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이번 작품의 범죄자는 인간 데이터베이스를 자신의 집인 양 마음껏 돌아다니며 자신의 기준에 맞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골라내는 인간이다. 과거의 범인들처럼 '법의학'으로 상대하기에 쉬운 인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링컨 라임이나 그의 파트너, 혹은 친구들의 정보까지 조작할 수 있다.

 

그런 범인을, 링컨 라임은 어떤 방법으로 상대할 것인가? '용호상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대결,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작품의 스릴감을 넘어, 시리즈가 지치지 않고 더 앞장 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얼마나 장수할까?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시리즈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사라져간 것과 달리 '링컨 라임 시리즈'는 그런 식의 종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리즈의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그렇지만 <브로큰 윈도>만 보더라도 그것을 확신하게 해준다. 스릴감 넘치는 긴장감과 정밀한 트릭,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브로큰 윈도>, 잘 쓰인 추리소설을 넘어 잘 쓰인 '시리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2010.06.20 16:48 ⓒ 2010 OhmyNews

브로큰 윈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8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제프리 디버 #링컨 라임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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