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남편 흉보다 보니 아뿔싸!

육십 바라보는 나이에도 철 없는 나, '누가 좀 말려줘요'

등록 2010.06.23 15:32수정 2010.06.2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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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던가?


엎질러진 물이란 말이 있다. 쓸데없는 말을 뱉어놓고 후회를 할 때 꼭 이 말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곤 한다. 한 달여 전, 어느 모임에서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이 목에 걸려 내내 괴로워하고 있다.

어찌 한 달 전 일뿐이랴. 수십 년 전 친구와 장난치다 경박스럽게 내뱉은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할 만큼 후회와 후회를 거듭하는데도 이 나이 먹도록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천성이 경박하다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달 전 어느 모임에서였다. 평소에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속이야기 털어놓긴 그지없이 좋은 자리였다. 여자들 이야기라는 게 남편 얘기, 자식 얘기 빼놓으면 소재가 궁하다.

마침 그 날 아침 남편이 어찌나 내 속을 뒤집어 놓았던지 큰소리를 내며 말싸움을 했었다. 그래서 말끝에 자연스럽게 싸움내용을 털어놓으며 남편 흉을 신나게 보고 말았다. 남이야 어찌 되건 간에 구경 중에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부부 싸움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이 재미있다고 박장대소를 하는 와중에 아뿔싸, 같이 웃고 있지만 웃는 모습이 우는 모습처럼 보이는 한 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 내 마음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나잇값도 못하고 이 무슨 수다란 말인가.


두 시간도 채 안 돼 병원 영안실에서 다시 마주친 남편

남편 1주기 기일이 돌아오는 저 여인네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흉이랍시고 제 남편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다니. 바가지 긁을 남편이 이제는 옆에 없다는 막막함과 외로움. 병나면 약봉지 들이대며 빨리 먹으라고 성화를 대는 사람이 없어진 빈자리. 딸아이가 중학교 졸업 최우수상을 타도, 아들이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 되었어도 같이 기뻐할 사람이 없는 그 고통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고 떠든 게 한순간 너무나 부끄러웠다. 출근하는 남편 등 뒤에서 잘 다녀오시라고 다정하게 인사했는데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지인의 남편은 출근 도중 빗길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남편과 헤어진 지 두 시간도 채 안 돼 병원 영안실에서 다시 마주친 남편. 지인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남편이 떠난 1년 내내. 지인은 꿈속에서 남편과 해후했다. 꿈에서 못 보는 날이면 가슴이 막힌다고 울고 있곤 했다. 보다 못해 협박을 했다. 네가 자꾸 그러면 그 양반이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없다고, 그냥 편하게 보내드리자고. 공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가시처럼 마른 지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했다. 틈틈이 불러내 차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외로움을 덜어주고자 애를 썼지만 가슴을 꽉 막은 한스러움은 좀처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여 안심을 했는데 곧 돌아오는 남편의 1주기. 누르고 있던 설움과 남편의 빈자리가 폭풍처럼 몰려오는 시기라는 걸 어쩌자고 헤아리질 못했던가. 친구한테 어처구니없는 말실수를 했던 스물두 살은 철이 없어서라고 하겠지만 지금 내 나이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말이다.

몸 아픈 내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이런 병신 같은"

스물두 살, 그 때 나는 전자공장 '공순이'였다. 얼굴과 그 모습은 어제 본 것처럼 생각나는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 친구. 나와 동갑인 그 아이는 명랑소녀였다. 같은 라인 근무가 아니었는데도 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와 내가 노조 부분회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웃음보다는 우울 모드가 주종이었던 나와 달리 친구는 귀엽고 발랄하고 웃음이 많은 그런 아이였다.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정강이 아래까지 오는 레이스 달린 플레어 스커트를 즐겨 입었기 때문에 그 친구를 생각하면 꼭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떠오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무슨 수다를 떨다 그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런 병신 같은~~"이란 단어는 확실하게 기억난다. 그 말을 뱉고 나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쩔쩔맸던 순간까지 고스란히 생각나니까.

'병신'은 격의 없는 친구들한테 던지는 짓궂은 농담 앞에 자주 쓰이는 수식어다. 적어도 우리 어렸을 땐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한테는 쓰지 말았어야 했다. 하도 밝은 아이라 친구가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엄연히 신체가 온전치 않은 '병신'이었기 때문이다.

내 말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친구 앞에서 한참을 허둥댔는데 친구는 내 말을 개의치 않았는지 혹은 민망해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안심시키려 그랬는지 내 말 끝에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친구한테 한 말실수를 잊지 못하고 있다. 말이란 게 뱉으면 상황 끝인데,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인데,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를 못한다. 이래서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가 보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의 인격은 재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입을 열면 본전을 감추기는 그리 쉽지 않은 터.

인격수양이 덜 된 인간인 내가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을 길은 자나 깨나 과묵이 첩경인데...입 다물고 있으면 중간은 갈 터인데...에휴 방정맞은 이 입을 무엇으로 막을거나?
#말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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