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동이?... 실제 최숙빈은 '냉혈 터미네이터'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등록 2010.08.02 10:30수정 2010.08.02 11:44
0
원고료로 응원
a

장희빈(이소연 분)을 누르고 후궁이 된 동이(한효주 분). ⓒ MBC

7월 27일 제38부를 분수령으로 MBC 드라마 <동이>는 중요한 고비 하나를 넘겼다. 장 희빈(이소연 분)이 폐위되고 인현왕후(박하선 분)가 복위하며 동이 최 숙빈(한효주 분)이 후궁이 됨에 따라, 궁중의 여인천하는 '동이 대 장 희빈'에서 '동이·인현왕후 대 장 희빈'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한동안 궐 밖에서 죄인 생활을 한 인현왕후는 장 희빈의 폐위를 계기로 여인천하 무대에 컴백하게 되었다.

장 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며 동이가 후궁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 희빈 측과 청나라의 불법 커넥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조선의 왕세자는 조선 국왕의 책봉뿐만 아니라 청나라 황제의 책봉까지 받아야 했다. 장 희빈 측은 장 희빈과 숙종 사이의 첫아들인 이윤(훗날의 경종)에 대한 청나라의 책봉이 별탈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은밀한 불법거래를 시도했다. 청나라가 필요로 하는 조선의 국경 수비기록인 <등록유초>를 넘겨주는 대신, 청나라로부터 왕세자 책봉을 무사히 받아내려 한 것이다.

거래가 무사히 성사되는가 싶었다. 청나라에서는 책봉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고, 장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 분)는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등록유초>를 청나라 사신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장희재가 고급 요정(기생집)에서 <등록유초>를 넘기는 순간 내금위 군대(국왕 경호부대)가 현장을 덮치는 바람에 양측의 불법 커넥션이 결국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의 추종세력이자 집권여당인 남인 당파는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정권을 내주어야 했고,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 희빈은 중전에서 정1품 빈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동시에, 인현왕후는 복위하고 동이는 후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좀 그럴싸하지만, 위 이야기의 대부분은 허구에 불과하다. 드라마 속에서 <등록유초>니 불법 커넥션이니 하는 것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또 너무나 진지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서는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장 희빈이 몰락하고 최 숙빈이 후궁이 되었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독자나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들을 4개 테마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테마①] <등록유초>은 어떤 책인가?


드라마 속에서 동이와 장 희빈이 서로 확보하려고 다투었던 <등록유초>란 이름의 책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첩보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아니, 첩보 가치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드라마 속에서는 대단한 기밀문서인 것처럼 다루어졌지만, 실제의 <등록유초>는 실록을 통해 이미 공개된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 책에 불과했다.

그럼, <등록유초>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 책의 내용 중 일부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역로(驛路), 봉수(烽燧), 군정, 변경사무, 외교 등에 관한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국방과 무관한 문제, 이를테면 관직이라든가 목축이라든가 재정이라든가 하는 것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문서를 두고 장 희빈 측과 청나라가 비밀 거래를 할 필요는 없었다.


[테마②] 남인 정권은 왜 붕괴했나?

a

중전 자리를 내주고 후궁으로 강등된 장 희빈(이소연 분). ⓒ MBC


광해군의 자주외교(중립외교)를 무너뜨린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조선의 정권은 율곡 이이 및 성혼의 추종세력인 서인 당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런 상태가 50년 정도 지속되다가 1674년 제2차 예송논쟁(1659년에 죽은 효종의 위상을 둘러싼 정치투쟁)을 계기로 조선의 정권은 남인 당파에게 돌아갔다. 1674년에 즉위한 숙종은 남인 정권 하에서 등극한 군주였다.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한 숙종은 여느 군주와 달리 당쟁을 교묘히 활용하는 정치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당쟁에 휘둘리지 않고 특정 당파가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느 당파든지 간에 국왕의 말을 듣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집권당의 힘이 너무 강해지기 전에 야당과 제휴하여 집권당을 교체하는 통치스타일을 선보였다. 일례로, 1680년 경신환국('경신년의 정권교체'라는 의미) 때에는 서인 당파에게 정권을 넘겨준 숙종은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남인 당파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조정의 당쟁이 궁중의 여인천하와 긴밀한 연동을 보였다는 점이다. 경신환국 이후에는 서인의 지원을 받는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고 기사환국 이후에는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 희빈이 중전이 된 사실은, 숙종이 집권당과 중전 자리를 동일선상에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의 집권당을 배척하는 김에 기존 집권당의 지지를 받는 중전까지 함께 교체했다는 사실은, 숙종이 부인을 부인으로가 아니라 정당의 대리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숙종이 권력유지에 민감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을 계기로 남인이 권력을 재장악했지만, 남인의 세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인이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탄압하고 이를 계기로 서인 당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려 하자, 남인의 독주를 우려한 숙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고 남인을 배척하는 갑술옥사('갑술년의 대대적 투옥'이라는 의미, 1694년)를 단행했다. 이때 장 희빈은 남인 정권과 함께 몰락하여 후궁의 자리로 원위치되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남인 정권이 붕괴했다고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위와 같이 서인에 대한 남인의 숙청작업에 불안감을 느낀 숙종이 당쟁에 개입함에 따라 남인 정권이 붕괴했던 것이다. 

[테마③] 최 숙빈은 어떻게 장 희빈을 몰락시켰나

a

당파 대립을 활용해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안에 있다. ⓒ 서오릉 홈페이지


드라마 속 동이는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을 폭로하여 장 희빈을 몰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 동이는 장 희빈의 몰락에 가슴 아파하며 장 희빈 측 궁녀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와 전혀 달랐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여당인 남인과 야당인 서인이 대립한 갑술옥사 당시, 남인은 "서인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 한다"며 공격을 가했고 서인은 "중전 장씨가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며 반격을 가했다. 장 희빈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서인의 주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서인은 자칫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인의 주장이 참말"이라며 서인을 편들고 나선 것이 바로 최 숙빈이었다.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이 집필한 <단암만록>에 따르면, 숙종의 유모를 통해 서인 소속 김춘택과 전략을 상의한 최 숙빈은 한밤중에 숙종을 찾아가서 장 희빈의 독살 시도가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안 그래도 남인의 독주를 경계하던 숙종은 이 보고를 근거로 장 희빈과 남인에 대한 정치적 공격에 돌입했고, 이를 계기로 권력은 남인에서 서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 숙빈은 장 희빈의 불법 커넥션을 폭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독살시도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장 희빈을 몰락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 희빈의 독살 시도를 보고하던 날, 최 숙빈이 숙종에게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 희빈이 나를 죽이려 했노라고 그냥 말로만 보고했고, 숙종은 그런 최 숙빈의 말을 근거로 정치적 숙청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는 숙종이 평소에 최 숙빈을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한편, 숙종이 그만큼 남인 정권을 붕괴시킬 빌미를 찾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장 희빈의 폐위가 충분한 명분 없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 숙빈의 보고가 거짓이라면 장 희빈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폐위를 당한 셈이다.

최 숙빈의 보고가 참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몰락하는 장 희빈에 대해 최 숙빈이 연민의 정을 느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남을 살인미수죄로 몰아넣을 수 있는 사람이 드라마에서처럼 따뜻한 연민의 정을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이는 최 숙빈이, 평소에는 어떤 성품을 보였든지 간에, 정치적 투쟁의 현장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승부에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의 최 숙빈은 그처럼 '냉혈 터미네이터'였던 것이다.

[테마④] 최 숙빈은 언제 후궁이 됐나?

a

최숙빈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의 청와대 경내에 있다. ⓒ 문화재청


드라마 <동이>에서는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을 몰락시키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여세를 몰아 동이가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점과 관련하여서도 사실과 드라마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최씨가 숙원에 책봉된 것은 숙종 19년(1693) 4월 26일이었다. 이때는 중전 장 희빈이 아직 건재하던 시점이었다. 갑술옥사(1694년)가 발생하여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이 몰락하기 1년 전에 이미 최씨는 후궁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최씨가 후궁 자리에 오른 이유는 명확하다. 최씨가 후궁이 된 숙종 19년(1693) 4월 26일로부터 5개월 정도 경과한 시점인 10월 6일에 최씨는 자신의 첫아들이자 숙종의 셋째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므로 4월 26일 시점은 최씨의 임신 사실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이후였던 것이다. 이는 최씨가 정치적 공로가 아닌 임신 사실을 발판으로 후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장 희빈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복위된 숙종 20년(1694) 시점에는 최씨가 이미 후궁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최씨의 신상에 생긴 변동사항이 있다면, 인현왕후가 복위된 다음날인 숙종 20년(1694) 6월 2일에 종4품 후궁인 숙원에서 종2품 후궁인 숙의(淑儀)로 승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인 정권과 장 희빈이 몰락하는 과정이나 최 숙빈이 후궁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 <동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등록유초>라는 책이 쟁점이 된 적도 없고, 청나라와의 불법 커넥션이 남인 정권과 장 희빈 몰락의 원인이 된 적도 없다. 또 최 숙빈은 장 희빈-청나라 커넥션을 폭로하는 방법이 아닌, 자기에 대한 장 희빈의 독살시도를 숙종에게 보고하는 방법으로 장 희빈을 몰락시켰다. 한편, 최 숙빈은 장 희빈과의 대결과 관계없이 임신 사실을 발판으로 이미 후궁에 오른 상태에서 장 희빈과 남인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동이 #최숙빈 #숙빈 최씨 #장희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세계 정상 모인 평화회의, 그 시각 윤 대통령은 귀국길
  5. 5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