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봉사,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누미들과 함께 한 순천효산고 진로캠프 수기

등록 2010.08.06 09:40수정 2010.08.0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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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순천효산고 학생들에게 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막 차에서 내렸다. ⓒ 안준철


8월 초입의 교정이 뜨거웠다. 낡은 부채라도 없었다면 머리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늘 것만 같은 무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여름이 더 여름답던 날, 그 여름다움으로 인해 교정에 서 있는 나무들이 한층 더 푸르러보이던 그날에 학교를 찾아온 젊은이들의 열정 때문이었다.

지난 8월 2일, 땡볕이 쏟아지는 교정 속으로 손에 여행용 가방을 든 한 무리의 선남선녀들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6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순천효산고 50여명의 학생들에게 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먼 길을 내려온 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 학생들은 서울에서 순천까지 다섯 시간 남짓한 긴 여행에도 피로한 기색 대신 입가에 소박하고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프로네시스(Phronesis)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지식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데서 처음 시작된 용어다. 에피스테메(episteme)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다면 테크네(techne)는 노하우나 실질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프로네시스는 특정한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는 실천적 지혜를 뜻한다. 젊은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액 과외와 낭만의 해수욕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땀내 나는 나눔실천 현장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프로네시스'가 한 일이리라.

서울대학교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은 취임 때부터 지성인의 나눔 실천을 강조해온 이장무 총장의 제안으로 2006년 11월에 발족하여 주로 방학 기간 동안 교육시설이 열악한 소외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봉사를 진행하고 있는 학생봉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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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 장면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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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조별 오리엔테이션과 전체 아이스브레이킹(위),서울대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멘토링 회원 가입을 하고 있다.(아래)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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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에서는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기 전 잠재 되어 있는 선천적 심리 경향을 알 수 있는 MBTI(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 무료 검사가 진행되었다. ⓒ 안준철


2010년 하계 '나눔교실'은 멘토링, MBTI 적성검사, 언어․수리․외국어 등 과목별 공부법, 시간관리법과 노트정리법, 롤 모델 설정하기, 1:1상담, 자신에게 주는 상 만들기, 요가 및 스트레칭, 골든벨, 레크리에이션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시기의 지역 청소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전문계 학교로서는 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의 첫 수혜학교가 된 순천효산고(교장 유금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며 환골탈태중이다. 1980년 개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명 변경, 학과 개편 등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이 변해야 학교가 변할 수 있다. 학생들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 학교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까?

이번 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 초청은 그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의 일환인 셈이다. 개회식에서 유금주 교장은 "캠프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자", "언니 오빠 형들을 살갑게 대하자", "지금 창조적인 변화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여성 교장다운 감성의 언어로 학생들을 격려하였다. 그런 엄숙한 시간에도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자꾸만 말을 걸고 있는 한 녀석에게 다가가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너 여기 왜 온 거야? 누가 너 등 떠밀어서 온 거야?"
"아닌데요 제가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왔는데요."
"그래! 너 멋지다. 그럼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잘 들어야지?"
"예. 알겠어요."

참 맹랑한 녀석이다. 아이들이 이렇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갈팡질팡하면서도 호박넝쿨 방향 잡아 주듯 잘 잡아주면 제 길을 찾아 무한히 뻗어나가는 것이 아이들의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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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모델 정하기 나누미 학생이 세 명의 롤모델 중 하나인 이승복 국가대표 체조선수를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롤모델을 정한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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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산고 복지실에서 1:1 개인 면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 안준철


개회식에 이어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시간이 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녹거나 깨지지 않고 얼음인 채로 떠도는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하지만 프로네시스 나눔단 학생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만나고 있었다. 기술과 속도에 길들여진 전문교사들과는 행동거지가 사뭇 달라보였다.

첫날 일정은 학생들이 프로네시스 나눔단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멘토링 신청을 하는 것으로 갈무리되었다. 멘토링은 4박 5일 동안의 진로캠프에서 나눈 소중한 경험들은 잘 숙성시켜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작년부터 도입한 일종의 추수지도 프로그램이다. 나누미 학생들은 일정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 1대1 멘토링을 통해 아이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올해로 8번째 교육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박용(지구환경과학부 4년) 단장은 멘토링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섬지역인 전남 노화중에서 나눔단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아이들과는 지금도 몇 년째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 그때만 해도 멘토링 제도가 없어서 개인적으로 소통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작년부터 멘토링 제도가 도입되어 지금은 자연스럽게 후속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둘째 날인 3일, 과목별 공부 비법을 가르치는 시간에는 유난히 귀를 쫑긋 세운 학생들이 많았다. 수학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단원간의 연관성을 이해해야하며, 내가 지금 어느 지점을 공부하고 있는지 영역을 분리하지 말고 하나로 유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새 학년이 되더라고 앞 학년에서 배운 내용을 반드시 점검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버리지 말고 잘 간수해야한다는 말도 놓치지 않았다.

오후에는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순천만을 다녀왔다. 함께 버스에 탄 이병주(법학과 4년) 학생은 올해 처음으로 나눔단 신청을 했단다. 고교시절에는 봉사활동을 자주 갔는데 대학에 들어와 개인적인 공부에 몰두하다보니 봉사활동을 하지 못했노라고 했다. 그는 졸업 후 유학길에 오를 계획이지만 그 후의 진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진로상담을 해줄 그도 아직 암중모색중인 것이다. 섣불리 진로를 결정하기 보다는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신뢰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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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상장을 만들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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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자신의 롤모델을 정하여 미래의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안준철


셋째 날인 4일이 되자 학생들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고 태도도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 반 연진이가 무슨 상장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어서 물어보니 자기가 받고 싶은 상장을 만들어 내면 나중에 진짜 상장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단다. 나는 연진이의 상장을 살펴보다가 모처럼 오랜만에 환히 웃었다. 자기에게 주는 상이어서 그랬을 테지만 상을 주는 기관 이름이 '내 마음의 주최 협회'였던 것이다.

도서실과 영어전용교실에서 롤모델 설정하기, 자신의 미래상 그려보기, 자신에게 주는 상 만들기 등의 진로 관련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 동안 복지실에서는 전체 참여 학생에 대한 1대 1 상담이 이루어졌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나 할까? 사전 준비를 잘 한 덕인지 큰 톱니바퀴와 작은 톱니바퀴가 어긋나지 않고 잘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막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한 아이를 급히 불러 세웠다.

"은지야, 상담 어땠어? 좋았어?"
"예. 정말 좋았어요. 저 정말 이번에 진로캠프 신청하기 잘했어요."
"그래! 어떤 점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취업을 할까 진학을 할까 결정을 못하고 걱정만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 해결 됐어요."

"정말? 취업을 할지 진학을 할지 오늘 상담으로 네 진로가 결정되었다는 말이지?"
"취업할지 진학할지는 아직 결정 못했어요."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할 만큼 어떤 도움을 받은 거야?"
"예. 나누미 언니가 많은 경험담을 말해주었어요. 취업을 먼저 하고 나중에 진학을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조금 더 있다가 결정을 하려고 해요. 어떤 결정을 하던 잘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와, 정말 너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맞아요. 저 자신 있어요. 자심감이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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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및 스트레칭 배우기(좌), 골든벨(우)이 진행되고 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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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봉사단원들의 해맑은 표정들. 그들은 만나 뒤 나눔과 봉사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안준철


1대1 상담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간 것일까? 나는 자못 궁금했지만 아이가 보여준 자신감의 실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나누미 학생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대강은 짐작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순수하고 진정어린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왜 아이들이 변한 것인지. 교육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넷째 날이 되었다. 오전에는 강당에서 간단한 요가와 스트레칭을 배우고 다시 도서실로 돌아와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오전 마지막 프로그램은 '칭찬합시다!'였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만의 개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기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신가요? 아래에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에 대해 자유롭게 써보세요.'

쪽지를 읽고 나자 권정생 선생의 소설 <강아지똥> 생각이 났다. 만약 강아지똥에게 그의 쓸모를 알려준 친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강아지똥이 눈부신 민들레꽃으로 다시 태어나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미더운 일인가?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듯 바싹 구워질 것만 같은 이 뜨겁고 무더운 여름에 이 세상에는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귓속말을 전해주기 위해 먼 길을 와준 12명의 젊은이들이.

서울대 프로네시스 나눔실천단과 함께 하는 진로캠프는 6일 오전에 수료식을 갖는다. 4박 5일 동안 형과 언니가 되어 값진 인생의 교훈과 함께 아이들의 가슴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떠나는 아름다운 그들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빈다.  
#순천효산고 #프로네시스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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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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