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정운찬 "민간인 사찰은 부끄러운 일"

10개월 임기 마친 총리 이임식 10분 만에 끝나

등록 2010.08.11 11:35수정 2010.08.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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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이임식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정운찬 국무총리는 11일 오전 10시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강당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공직자의 소명"을 강조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정 총리는 "(공직자는)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며 "정책 효과를 조기에 구현하려는 의욕이 앞서 '선의(善意)의 관치(官治)는 무방하다'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정책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한 정 총리는 "민간인 사찰 같은 구시대적인 사건은 그 어떤 목적이나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 총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나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나라와 국민에게 똑같이 해악을 끼친다"며 "정책의 기본방향을 바로 세우고, 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문제점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개월 남짓, 재임한 기간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며 "크고 작은 국정 현안을 챙기는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총리로서 하는 마지막 말에 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지, 지난달 29일 사의 표명 기자회견을 할 때보다 긴 분량의 이임사를 정 총리는 차근차근 읽어내려갔다.

정 총리의 마지막 연설을 듣기 위해 5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정부중앙청사 강당에 모였다. 일부는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해 서서 이임식을 지켜봤다. 이임식이 끝난 후 장·차관 등 50여 명의 고위공직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정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10개월간의 임기를 끝낸 정운찬 총리의 이임식은 10분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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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이임식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며 취재진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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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이임식을 마친 뒤 직원으로부터 꽃다발을 건네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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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이임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에 앞서 육동한 국정운영실장이 빗을 꺼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자 환하게 웃고 있다. ⓒ 유성호


다음은 이임사 전문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자리를 함께하신 국무위원과 전국의 공직자 여러분, 저는 이제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도록 격려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부족한 저를 도와 헌신적으로 일해주신 전국의 공직자 여러분께도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와 성원이 없었더라면 국내외적인 격동기에 국정의 한 축을 떠맡은 저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취임 직후부터 오랫동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용산 사건을 원만히 매듭지으려고 노심초사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일자리 창출, 학력 제한 철폐, 저출산 해소, 사회적 통합, 국가의 품격 향상 역시 제가 심혈을 기울여온 핵심 과제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경제는 지금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를 헤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국민과 정부가 하나로 뜻을 모은 소중한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10개월 남짓, 제가 재임한 기간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국정 현안을 챙기는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도 적지 않습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이 시대 경제학자의 과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비단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공직자 여러분도 항상 가슴속에 새겨두고 음미할만한 경구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나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나라와 국민에게 똑같이 해악을 끼칩니다. 그렇다면 바른 정부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정책의 기본방향을 바로 세우고, 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문제점은 최소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공직자 여러분은 우리 정부의 국정운영 비전인 중도․실용․서민 정신을 다양한 측면에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여 보다 따뜻한 사회,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이 시대 공직자의 소명입니다.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정책의 절차적 정당성 또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서민 중심의 중도실용 정책을 추구하다 보면 때때로 순수한 시장경제 원리를 보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때, 정책 효과를 조기에 구현하려는 의욕이 앞서 자칫 정책 집행의 절차적 정당성을 망각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선의(善意)의 관치(官治)는 무방하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민주정부의 모든 정책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철학을 구현하는 정책이라도 추진 방식이 잘못되면 국민적인 호응을 얻기 어렵고 당초 기대했던 정책효과도 거두기 힘들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선배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피땀 흘려 지켜온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입니다.

공직자는 언제나 국가권력의 전횡을 염려하고, 만의 하나라도 국민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제 임기 중에 일어난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민간인 사찰 같은 구시대적인 사건은 그 어떤 목적이나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정부의 역할은 단순히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모든 국민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고 행복 추구를 지원하는 것만큼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정부의 책무도 많지 않습니다. 우리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는 참으로 많고 넓습니다.

민생이 따로 있고 상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동 성폭력, 청년 실업, 사교육비 급증, 그리고 나날이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부와 빈곤의 대물림 같은 사회문제 역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직자 여러분, 이명박 정부는 이제 집권 후반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새 내각 명단도 발표됐습니다. 그동안 저를 도와 국정에 매진해온 노고를 치하하며, 다시 한 번 심기일전하여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고 대통령을 보좌해 드릴 것을 당부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위대한 우리 국민의 저력이라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저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세대간․계층간․이념간 갈등을 조정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땀과 눈물, 기쁨과 보람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국민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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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열린 이임식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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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무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서 열린 이임식에 참석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민간인사찰 #이임식 #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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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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