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없는 것들과 열애하는 설치미술가

양혜규의 <셋을 위한 목소리> 전 아트선재센터에서 10월 24일까지

등록 2010.08.30 18:10수정 2010.09.0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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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선재센터입구 및 1층 로비 및 예술전문서점(The Books). 전시장은 2층·3층에 있다 ⓒ 김형순


소격동에 있는 아트선재센터 2층·3층에서 10월 24일까지 양혜규의 '셋을 위한 목소리' 전이 열린다.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비디오 작업 '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들'을 비롯하여, 사진, 영상, 설치 등 2000년 이후 현재까지 해온 작업을 총망라했다.

그는 깨지기 쉽고 다치기 쉬운 것에 대한 연민과 결핍된 것에 대한 애정으로 존재감 없는 것들의 주체성을 설치미술로 시각화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세계 문화의 중심인 유럽이나 미국미술계를 떠돌면서, 결핍에서 풍요를 보는 역설적 미학으로 우리도 모르게 훈육된 서구적 모더니티에 대한 모순을 걸러낸다.


설치미술로 철학하고 비디오로 문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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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작가 양혜규 ⓒ 아트선재센터


양혜규(Haegue Yang)는 1971년 서울에서 나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가 프랑크푸르트 조형예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추상을 구현하는 감각적 '개념설치미술가' 양혜규는 지난 16년간 작업장을 제공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여 영국·일본·프랑스·네덜란드·미국·독일에서 작업을 해왔다. 그래서 '노마드'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는 독일 '카피탈지' 선정 세계적 미디어작가 100인에 이불 작가와 함께 올랐다. 2009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초대받아 작품을 전시했고, 그 해 여름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라는 책도 냈다. 특히 올해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그의 작품 '살림'이 1억4천만 원에 소장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는 설치미술로 철학을 하고 비디오로 문학을 한다. 이름 없는 이웃들의 사건을 작업에 도입시켜 개체와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읽어낸다. 회화를 빼고 설치, 비디오, 사진, 오브제, 퍼포먼스 등 두루 여러 장르에 도전한다. 2011년에도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등에서 전시회를 앞두고 있다.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공존'이 양혜규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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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30번지' 폐가에 장소특정적 설치 2006 ⓒ 양혜규홈페이지


양혜규는 이름이 조금 알려질 무렵인 2006년 국내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 장소는 뜻밖에 그의 외할머니가 살았던 폐가(인천 중구사동 30-53번지)였다. 관객들이 지도를 보고, 초대장에 적힌 열쇠번호를 입력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방식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지붕과 부엌, 문간방이 나온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종이접기와 조명기구, 거울, 선풍기 등을 통해 박제된 미술관개념을 깬다. 이 폐가는 개인적 추억을 담은 집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된 삶을 산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이 간직된 곳이다.

이 작품은 인류가 아직 해결 못한 공존(co-existing with the Other)의 문제를 다룬다. 양혜규는 이 같은 연장선에서 아현동에서 작업하기를 즐긴다. 예술을 멀리 두지 않고 바로 발꿈치 옆에서 찾는다. 그는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재개발지역에서 예술을 탐구한다.

하나가 모여 전체가 됨을 상징하는 광원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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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근성-약장수' 빨래대(hanger), 전선, 전구, 전선, 소켓, 체인, 금속 링, 바퀴, 끈, 약통, 계수기, 다양한 안마기, 플라스틱 과일, 플라스틱 채소, 방울, 말린 인삼, 말린 마늘 200×100×90cm ⓒ 김형순


이제부터 2층으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작품을 감상해보자. '서울 근성(根性)'이란 주제로 한 '황금휴가' '약장수' '얼굴 없는 미녀' 등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받은 인상을 담은 야심작이다. 이 연작은 이미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여준 '살림' 등의 서울버전이다.

'약장수'는 빨래건조대에 알전구에 전원을 연결하여 빛을 발하게 하는 작품으로 작가는 이를 '광원조각(light sculpture)'이라고 부른다. 한 명의 개인이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듯 각각의 알전구가 하나의 전원으로 연결되어 전체를 환히 밝히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발상은 화엄불교에서 말하는 '하나가 전체고 전체가 하나다'와도 통한다.

양혜규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봐도 서울처럼 안마기, 마른 인상 등 건강식품에 열광하는 곳이 없다고 느꼈나보다. 월·화·수·목·금·토·일 주일별 약통이 특히 눈길을 끈다. 하여간 우리 눈에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것들이 여기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놀라운 조형미를 낳는다.

서울에서 본 우아한 멋쟁이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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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멋쟁이(Seoul Dandy)' 잡지스탠드, 전선, 전구, 소켓, 체인, 금속링 바퀴, 우산 끈, 다양한 휴대폰 장식줄 207×90×90cm 2010 ⓒ 김형순


위 작품 '서울 멋쟁이(댄디)'는 서울 출신인 그가 서울거리에서 본 우아한 멋쟁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각종 휴대전화 장식고리들이 치렁치렁 매달린 건 서울풍경의 응축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이렇게 사물에 생명과 숨결을 넣어 '의인화' 시킨다. 실제로 서울 멋쟁이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 같다.

이런 작품은 예술품이라면 무언가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관객의 기대를 뒤엎는 것이다. 양혜규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임파워먼트(empowerment)'다. 정확한 우리말 번역은 없지만 '(대상에게) 권력을 이양하여 자율성을 최대로 보장한다'는 뜻이다. 양혜규는 하찮은 오브제에도 임파워먼트를 주어 이미 관객을 크게 당황스럽게 했다.

적막한 자연과 삭막한 도시에서 건진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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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삼부작' 단채널비디오, 컬러, 사운드, 영어, 한글어 자막, 펼쳐지는 장소, 18분 2004; '주저하는 용기' 18분 2004; '남용된 네거티브 공간' 29분 2006(위). '쌍과 반쪽-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들' 단채널비디오, 컬러, 사운드 총 121분 내레이션 영어와 한국어 각 20분 2009(아래) ⓒ 김형순


양혜규는 보기와 읽기로 미술과 문학 둘을 경계 없이 넘나든다. 그가 찍은 적막한 자연과 삭막한 도시의 비디오에 자연친화적이고 문명비평적 에세이를 쓴다. 현대인에게 사색과 성찰의 장을 열어준다. 그의 탁월한 문학성에 작가의 독서이력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부족한 것 결핍된 것이나 깨지고 쉽고 부서지기 쉬운 것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면서 거기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다. 하긴 예술가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람 아닌가.

고정관념을 깨고 경계를 넘는 풍부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마드적 삶과 연관된다. 그는 독일에 살지만 그곳이 꼭 맞춰 살지는 않는다. 한국에 오면 아현동에서 작업을 즐기는 것도 이 때문인가. 마치 선사시대 주술처럼 첨단의 현대예술을 하는 것 같다.

사라져 버리기 쉬운 것들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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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 도는 노을' 장소특정적 설치 약 500개의 소금상자. 2010 오른쪽 소금봉지 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천일염의 3요소는 해, 바다 바람이라고 합니다. 상자에서 비워낸 소금을 다시 바다로 돌려주려합니다. 시간을 내서 바다를 여행하며 이일을 하고 싶은 분은 소금봉지를 가져가세요. 물론 드셔도 좋습니다" ⓒ 김형순


2층 전시실 창문 쪽으로 설치된 '소금기 도는 노을'은 1kg 소금 상자 500개를 격자무늬로 만든 작품이다. 독일에서 살 때 먹던 소금상자의 표장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 책상에 놓아두다가 오브제로 활용한 것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24시간 그 명암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빛과 어둠, 음과 양이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는 공존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양혜규의 주제가 존재감 없는 것들의 소중함이듯, 소금 역시 녹아버리면 형체도 없다. 이 작품은 그런 점을 반영한 것이리라. 전시장에 소금을 나둬 가져갈 수도 있다.

경계가 있으면서 없고, 객체이면서 또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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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 특정적 설치 알루미늄 블라인드, 무빙라이트, 거울, 가습기, 적외선 히터, 사운드스테이션, 향 분사기, 미디 전환기 2008. '적색의 파열된 미로 산맥(Red Broken Mountainous Labyrinth)' 2008(아래) ⓒ 김형순 양혜규


이제 삼층으로 올라가보자. 제목은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다. 기성품 블라인드가 결합된 이 작품 역시 장소 특정적이다. 처음엔 좀 어지럽다. 사방에 조명기, 적외선히터, 선풍기, 사운드스테이션, 향 분사기 등이 동원되어 열과 향과 바람이 공감각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면서 너와 나 우리가 객체이면서 공동운명체임을 보여준다.

양혜규는 모 월간지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블라인드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만드는 울타리 역할을 하지만, 사실 블라인드에 의한 경계는 벽처럼 정확하게 공간을 나누는 게 아니라 임의적이고 투명한 구분을 만들죠. 경계가 있되 경계가 아닌 상태는 절대 완전한 전체가 될 수 없어요."

다시 말해 경계가 있되 경계가 없는 상태다. 오른쪽 아래작품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김산(1905-1938)과 그의 전기 <아리랑의 노래(1941)>를 쓴 미국작가 님 웨일즈(Nym Wales)의 만남을 다룬다. 경계를 넘을 수 없는 두 사람의 극적 만남으로 사건이 일어나듯 우리에게 경계가 있지만 동시에 경계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내비친다.

움직이는 색면추상 같은 블라인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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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 특정적 설치 알루미늄 블라인드, 무빙라이트, 거울, 가습기, 적외선 히터, 사운드스테이션, 향 분사기, 미디 전환기 2008 ⓒ 김형순


양혜규의 이런 블라인드 작품은 빛과 소리와 향기와 바람이 흐르는 움직이는 색면추상 같다. 19세기 프랑스시인 보들레르는 언어에 소리와 향기와 색채의 공감각은 첨가했는데 양혜규는 그런 요소를 IT기술에 힘입어 설치미술로 가시화한다.

우리가 평상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이런 상호의존적 주체성과 기존의 공동체의 경계를 넘는 공동체를 언급한다. 그 관건은 물론 상호신뢰와 관용성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언제나 다치고 깨지기 쉽다. 그러나 양혜규는 그런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이런 점이 바로 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는 이유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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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Detruire, dit-elle, 100분 흑백 1969년)' 중 한 장면 ⓒ 아트선재센터


양혜규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다. 양혜규는 오랫동안 그를 연모해 왔다. 양혜규가 그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사회나 대중에 영합하거나 쉽게 타협하지 않는 그의 기질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전시와 함께 단편소설 '죽음에 이르는 병(La maladie de la mort)'을 직접 연극으로 양혜규작가가 연출해 9월 11일과 12일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다. 모노드라마형식의 연극에는 아나운서출신의 유정아씨가 출연한다(문의 02)758-2000). 또 '인디아 송'과 '파괴하라, 그는 말한다' 등 뒤라스가 만든 영화 5편이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씨네코드 선재에서 상영된다(문의 02)730-3200).

덧붙이는 글 | 양혜규홈페이지 http://www.heikejung.de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http://www.artsonje.org/asc


덧붙이는 글 양혜규홈페이지 http://www.heikejung.de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http://www.artsonje.org/asc
#양혜규 #광원조각 #베니스비엔날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설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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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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