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처마 밑에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렸네

[여행] 제주 비바리, 전주 한옥마을 걷다

등록 2010.09.04 14:18수정 2010.09.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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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찻집 한옥마을 찻집 ⓒ 김강임


참으로 오랜만에 걸어 보는 길이었다. 가슴 설렘도 부족해서 콩당콩당 뛰었다. 그것은 20여년만에 고향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제주 비바리로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으니 '이제 내 고향은 제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26일, 30여명의 선생님과의 비교연수 일정을 끝내고 나선 길이 바로 전주. 일정에 의하면 전주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다. 고향 길을 언제 혼자서 걸어 보았던가. 때문에 이번 한옥마을 만큼은 혼자 느릿느릿 걸어 볼 요량이었다.


내 가슴에 남아 있는 한옥마을은 눈이 많이 내렸던 학창시절로 기억된다. 눈 오는 날 자투리 시간만 생기면 전주 풍남동 한옥마을을 이유 없이 걸었다. 그때는 한옥의 정취나 아름다움을 미처 알지 못했던 때였다. 그저 그 길이 좋았을 뿐. 나무가 주는 정취와 흙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서울에 가서 자투리 시간만 나면 경복궁을 산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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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 한옥마을 토담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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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표시판 주차장 표시판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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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한옥마을 창문 ⓒ 김강임


나무와 흙...안정감에 빠져 들다

8월 26일 오후 3시, 전주 한옥마을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역시 고향 마을은 따스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절집처럼 한옥의 기왓장이 담벼락에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각양각색인 한옥은 제멋대로 돼 있는 것 같았으나 질서가 있었다. 제주 초가와 같은 점이 있다면 흙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흙과 나무가 주는 안정감에 빠져들 수 있었다. 띠를 이용한 제주초가가 자연적이라면, 한옥의 기와는 고풍스럽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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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한옥마을 올레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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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옥마을 창문 ⓒ 김강임


한옥마을 올레길을 걷다


그리 넓지 않은 한옥마을 올레길을 걸었다. 한옥마을의 프리미엄은 처마 밑에 대롱대롱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때는 양반들이나 살았던 한옥이 지금은 상권을 형성하고 있어 한옥마을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뭔가 서민적이다.

음식점, 카페의 간판은 다소 토속적인 것 같지만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가 한옥의 처마 끝에, 한옥의 마당에, 장독대에, 그리고 한옥의 올레길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심의 세련미는 어쩌면 각박하고 빈틈이 없지만 한옥마을 투박함은 여유가 있다.

호령치는 정승의 집이 아니라,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나는 서민의 터, 한옥마을 정취는 가슴으로 느껴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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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올레 한옥마을 올레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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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옥마을 풍경 ⓒ 김강임


제주 올레와 한옥마을 올레의 다른 점

대문에서 작은 길까지 연결되는 한옥마을 올레는 제주올레와는 다르다. 제주올레는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꼬불꼬불 놓여있다. 하지만  한옥마을 올레는 흙과 기와가 어우러진 토담이 멋스럽다. 이웃과 이웃의 경계선이 바로 올레며 골목길인 셈이다.

제주올레에 바람막이와 경계선, 이웃과의 소통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면, 한옥마을 올레는 구수한 이야기가 피어나는 길모퉁이 골목길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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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풍경 돌담 ⓒ 김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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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한옥마을 굴뚝 ⓒ 김강임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세미가 가을을 알린다. 구수한 이야기가 저장된 한옥마을 담벼락과 골목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푸근해졌다.

추억을 잘근잘근 씹을 수 있었던 길, 좁은 길모퉁이에 핀 맨드라미와 쓰러져 가는 토담, 하늘을 향해 치솟는 한옥 지붕의 고운 선, 그리고 한옥마을 카페에서 새어나오는 구수한 이야기가 아직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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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강임

전주한옥마을은...
1905년 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 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이다. - 한바탕 전주 문화관광정보

#전주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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