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100주년과 기회주의 지식인

등록 2010.09.10 12:00수정 2010.09.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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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인물 중에서 100년 뒤에 기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중근 의사 순국100주년 등 올해는 기억할 인물과 사건이 많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분이 매천 황현이다. 향리에서 국치소식을 뒤늦게 들은 매천은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56살로 자결했다.

관직에 있지 않아서 망국에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니었다. 매국노·벼슬아치·다수의 식자들이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터에 산림의 처사가 죽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달랐다. 국망신사, (國亡臣死), 나라 망하면 신하는 책임감을 갖고 죽어야 한다는 춘추대의에 따른 것, 망국에 필부도 책임 있다는 유교의 정학을 실천한 것이다.

 새 짐승 슬피울고 산하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했구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되새겨보니
 글 아는 선비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의 처신이 이랬다. '글 아는 선비'의 구실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 유교 500년 사직에 국망에도 책임지는 선비가 없다면 빈껍데기 학문이란 이유였다.

한말 3대 시인으로 불린 지우 이건창과 김택영이 상경하여 구국운동에 나서자고 불렀다. 신기선·이도재 등 대관들도 거들었다. 매천은 "어찌 나를 미친 귀신들이 설치는 조정에 끌어들여 귀광(鬼狂) 이 되게 하려느냐" 호통치고, 역사의 죄인보다 이들을 고발하는 사필을 들었다.

소 갈데 말 갈데 가리지 않고 권부를 좇는 타락한 지식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망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좌절 속에 날을 보냈다. 서실에는 중국 역사에서 난세에 지절을 지키며 고결하게 산 10인 열사의 화상과 시로 10폭 병풍을 만들어 비치하고 어지러운 심사를 달랬다.

면암 최익현이 을사늑약을 반대하고 왜적에게 쓰시마로 끌려가 단식 끝에 숨졌다. 운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매천도 달려가 곡하고 만사를 썼다.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 면암의 죽음을 한탄했던 매천이 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을 택했다.


매천은 음풍농월의 유약한 선비가 아니었다. 편년체 사서<매천야록>을 펴내 백년 동안 권력을 농단한 노론 일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라 망친 제일의 책임은 고종과 민씨에게 있다고 대놓고 지적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민씨 척족들의 매관매직을 고발했다.

필봉이 얼마나 매섭고 공정했던지 "매천 필하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 는 말이 나돌았다. 비판적 지식인, 양심적 선비였다. 또 <오하기문>과 <동비기략>을 저술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전말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도 시대적 한계는 넘지 못해 동학농민군을 동비·동도 등으로 폄하했지만 사실기록에는 충실하여 동학혁명연구에 텍스트가 된다.

매천의 학문은 강렬한 현실비판 정신과 엄격한 사필, 주체의식과 애국사상에 바탕한다. 기정진의 유학, 이익·정약용의 실학사상에서 영향받았다. 보수지식인이면서도 개혁이념·자주의식을 갖고, 청빈한 생활·고결한 정신으로 지식인의 모범을 보였다.

'개화의 본' 9개조의 상소에서는 언로개방·법령공평·형벌공정·불요토목공사중지·척신징계·군제개혁·공정인사·관료혁신·양전제실시를 제시했다. 학자이면서 경륜가이고 사가이고 시인이었다. 매천은 시속의 고루한 선비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썩은 권부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시류에 따라 곡필을 쓰지않고 '글 아는 선비'의 책임을 다하였다.

도도한 기품 속에서 지식인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실천한 매천 100주기에 오늘 이땅의 기회주의 지식인, 곡필 언론인들의 타락상에 "아, 세상에 글 아는 사람이 가장 괴롭구나!"라는 매천의 개탄이 겹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 기자는 전 독립기념관장입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 기자는 전 독립기념관장입니다.
#황현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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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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