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 원래 모든 여자한테 다 잘해줘"

[중년의 사랑⑤] 여고에서 몰래한 사내연애...짜릿한 15년

등록 2010.09.24 17:44수정 2010.09.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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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부부의 결혼반지. 올해로 결혼 15년차 이제 손가락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 이정희


마침내 나는 지난 달 왼손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빼버렸다. 5년 전, 잃어버린 반지가 침대 밑에 있었던 것을 모르고 몇 달 지낸 걸 제외하곤 결혼 생활 내내 내 왼손에 있으면서 이름 없는 손가락, 무명지에 의미를 갖게 해주던 그것을 과감히 화장대 서랍 속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사실 몇 년 전에도 결혼반지 빼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땐 아내의 도끼눈에 기가 질려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감하게 시도해 성공했다. 아내의 저항(?)도 전혀 없었다. 아주 순순히 너그러이 나의 거사를 용인해 준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혹시나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큰 문제가 생겼거나, 아내 몰래 총각행세를 하려던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사실 이번에 내가 결혼반지를 빼게 된 것은 순전히 불어나는 몸무게 때문이다.

유난히 습하고 무덥던 지난 여름, 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이 불어난 몸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두꺼워져 반지 주변이 허옇게 헐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본 아내가 몇 년 전의 태도와는 다르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노라'며 빼어낸 반지를 받아 화장대 서랍 속에 넣었다.

우리 부부, 올해로 티격태격 한 지 20년, 함께 산 지 15년이 되었다. 초임발령지 학교에서 처음 만나 교무실 연애 5년, 그 후로 결혼하여 두 아이 낳고, 대출금 통장과 월급통장 사이의 긴장관계에도 아슬아슬 줄타기 할 줄 아는 결혼 15년차가 된 것이다.

짜릿했던 5년, '교무실 연애'를 아시나요?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난 건 대학을 갓 졸업한 90년 봄, 시골 여학교의 교무실이다. 한 날 한 시에 부임한 우리들은 일반 회사로 따지면 이른바 입사동기인 셈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사람이 전혀 여자로 보이질 않았다. 대학만 졸업했다 뿐이지 선생 이미지는 고사하고 아직 젖살도 덜 빠진 스물세 살 아가씨로 밖에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사실 당시에는 아내보다 한 살 많은 3학년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회사가 그렇듯이 입사동기들은 뭉쳐 다니기가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10여명 부임 동기들은 젊은 혈기에 주말이면 산으로, 바다로 몰려다니곤 했다. 청춘남녀가 자주 만나면 정이 드는 것은 만고의 진리. 내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그런데 철없는 아가씨는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이다. 그냥 잘해주는 같은 과 예비역 오빠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다 한 가지 구실을 만들어 냈다. 아이들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처리를 해야 될 시기가 된 것이다. 지금이야 학생들의 성적을 모두 전산으로 처리하지만 당시만 해도 모두 손으로 채점하고 성적일람표도 볼펜으로 기입하여 전자계산기로 총점내고 평균을 내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성적 일람표를 엉터리로 만들어 제출해버렸다. 그것도 성적처리 마감일 직전에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성적처리 업무를 지금의 아내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처리는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전체 업무가 마비되기 때문에 업무 담당자는 오류를 찾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김 선생 정말 미안해. 내가 제출한 단표가 모두 틀렸다며, 미안해서 어쩌지 정말 미안한데 내꺼 좀 다시 계산해줘라. 내가 영~ 숫자에는 젬병이라서 말이야(이건 완전 거짓말이다. 사실 난 상업 선생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내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공인 1급 주산 실력 덕분에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날 밤 늦은 귀가 길을 책임진 건 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여차저차해서 우리는 동료교사에서 연인이 되었다.

사내연애 수칙 1호, 애인 주변 여성들에게 잘해줘라

사내 커플의 짜릿함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난 세상에서 가장 스릴 있고 짜릿한 것을 말하라면 자신 있게 사내 연애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도 남들 눈치 못 채게 숨어서 하는 데이트, 게다가 그 장소가 수천 여학생들의 눈초리가 감시하고 있는 학교였으니 짜릿함의 필요충분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연인이 되고 보니 매사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동기들의 눈을 피하거나 따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모든 동기들에게 잘해주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 이외의 모든 여성들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다(덕분에 아내 여자 동기들에게 쓸데없이(?) 들어간 밥값이 부지기수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 눈초리였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마땅하게 시내를 함께 돌아다닐 수도 없는 처지라, 컴컴하고 구석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 죽치는 것이 예사였다. 당시만 해도 커피숍 따위에는 청소년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던 시절 이었다. 하지만 꼭 어느 학교나 가지 말라는데 꼭 가고야 마는 일부 잘나가는(?) 언니들이 있기 마련… 가끔씩 그 애들 레이더에 걸리곤 했다.

레이더에 걸린 다음날 학교에 오면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그것도 동기들이 모두 깔끔히 해결해 주었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아이들이 자기와 친한 선생님을 찾아가서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아낸 양 "선생님 누가 그러는데요(사실은 자기가 봐 놓고) 어제 상업 선생님이랑 영어 선생님이랑 읍내 카페에서 데이트 하는 것 봤데요, 정말이에요?"하고 일러바치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확증은 내 동기들의 말에 여지없이 헛소문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야, 이정희 선생님 본래 그래, 그 선생님 모든 여자들한테 다 그래. 그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야, 호호호~" 이런 식으로 말이다. 졸지에 난 바람둥이 취급을 받았지만 아무튼 매번 이런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곤 했다.

이렇게 5년을 지내고 결혼 발표를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이란 각양각색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체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어쩌면 나까지도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냐 이건 배신이야 배신" 등등. 심하게 표현해 맞아 죽을 뻔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짜릿한 데이트 5년 만에 동료들과 학생들의 축하 속에 결혼을 했다. 그 후 서로 다른 학교로 이동하게 되었고 올해까지 결혼 15년차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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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359일 차이 꽉찬 연년생. 지금은 이 아이들이 커서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 이정희


"창피해서 어떡해"... 첫 애 돌잔치 다음날 둘째를 낳다

살면서 위기 한두 번 없었던 부부가 있을까?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성질대로 이혼도장 찍었으면 수십 번도 더 찍었을 터. 그래도 굳건히 버티는 것은 위기 때마다 부부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올해로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인 이 아이들은 말 그대로 꽉 찬 연년생이다. 말이 연년생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딱 359일 차이다. 그러니까 오빠와 동생의 생일이 딱 6일 차이인 것이다. 다행이 둘 다 생일이 4월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오빠가 1월에 태어났다면 12월에 동생이 태어났을지도 모를 아찔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아마도 첫애의 백일 무렵에 아내가 둘째 애를 임신하게 된 모양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이유는 단하나 창피하다는 것.

"애 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벌써… 어휴 난 몰라 창피해서 어떻게 출근해 난 몰라 당신이 책임져. 짐승 같으니라고…."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늘 억울하다. 어찌 그 꽉 찬 연년생의 책임이 나에게만 있단 말인가? 지금도 우리 부부는 그때 황당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한다. 그런데 정작 더 웃기는 일이 첫 아이 돌 무렵에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둘째 아이 출산예정일이 첫아이 돌날과 겹치게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돌떡 먹다 병원 갈 수는 없는 일, 부랴부랴 돌잔치를 일주일 당겨서 조촐하게 할머니 집에서 치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난데없이 아내가 배가 아프다며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둘째 녀석이 일주일이나 빠르게 세상 구경을 하겠다고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날 저녁 둘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그 아이가 바로 '하람'이다. 아내 은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하늘이 주신 사람이란 뜻이다.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하늘이 주신 사람이 확실한 것 같다. 우리 부부가 한 일 중에 가장 장한 일이기도 하고.

"마누라 아킬레스건 끊어진 것도 모르는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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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29인치 TV를 혼자 들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내가 밖으로 나돌 때 생긴 일이다. 그 벌로 요즘 밤마다 통증에 시달리는 아내 다리를 주물러야 한다. ⓒ 이정희


'아킬레스건'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우리들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진 결정적 약점을 뜻하기도 한다. 나에겐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결코 피해가지 못 할 경험이 있다.

2006년 여름 어느 날 밖에서 일을 보던(당시 지역운동에 몰입하면서 거의 집을 비우던 날이 많았다) 내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아내는 아직도 날 이렇게 부른다) 어디야? 집에 좀 잠깐 왔다 가면 안 돼? 지금 막 필 받아서 청소 중이거든, TV를 옮겨야 하는데 혼자서는 못하겠어. 지금 잠깐 좀 왔다 가면 안 돼?"

나는 잠시 뒤에 가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어찌하다 저녁 늦게야 귀가를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한 아내가 무거운 TV를 혼자 들었고, 그러다 그만 '우두둑' 소리와 함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처음에는 그냥 발목이 삔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저녁에 다녀온 응급실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밤새 아프다고 절절 매는 아내에게 꾀병이라고 놀려 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던 모양이다.

결국 통증이 며칠 계속된 후에야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고, 거의 6개월 동안 깁스와 목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결국 그날 한 번의 실수로 평생 아내에게 부자유스런 걸음걸이와 통증을 안겨주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다.

요즘 그 죄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수술 후유증으로 딱딱해진 종아리를 자주 주물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가락 두개로 딱딱해진 힘줄을 마사지 하는 일이 때론 은근히 힘에 부치기도 한다. 그 때 아내에게 탈출 자세를 취하며 넌지시 한마디를 던진다.

"사랑하는 여보, 오늘은 여기까지."
"사랑 좋아하네… 가긴 어디를 가 잔말 말고 빨리 더 세게 주무르기나 하셔! 꾀병 부리지 말고… 나 잠들 때 까지… 알았어?"

하지만 아내의 눈 흘김 협박에 본전도 못 찾고 다시 마사지 자세로 돌입한다. 이제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서 더 이상 지난 시절 '교무실 연애'의 짜릿함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티격태격 20년, 이렇듯 내 인생의 아킬레스건은 아내에게 꽉 잡혀 버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언제부턴가 이런 상황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졌다는 것이다. 예전같으면 꼭 시시비비를 가려야 직성이 풀렸던 성격이었는데 말이다. 이젠 모든 상황이 다 자연스러워졌다. 15년 된 결혼반지를 빼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나는 아내의 부름(?)을 받고 침실로 간다. "부디 오늘 밤 아내의 코고는 소리가 빨리 들리게 해주소서…"라고 주문을 외면서 말이다. 하하하~
#결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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