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할머니와 주고 받는 품앗이

공치사로 품앗이 하시는 할머니

등록 2010.09.19 13:34수정 2010.09.1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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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유월 쯤에 아랫집 할머니가 콩 심는 날이라고 서울 사는 큰 딸이랑 친정 온 어릴 적 친구까지 다 불러 모아 콩밭으로 나오셨다.


할머니네 콩 심을 일꾼들이래야 환갑 지난 큰 딸이 가장 어리고 다 8순이 넘으신 할머니들이고 보니 왠지 어설퍼보였다. 우리 어머니랑 동갑인 이 할머니 친구 둘은 여든 아홉 전후 되시는 분들이다. 아무리 농사일에 이력이 난 분 들이라 해도 서 마지기나 됨직한 넓은 밭의 풀을 얼마나 맬지가 염려스러웠다. 

유월 땡볕에 풀을 매야 뽑아 낸 풀이 쉬이 말라 죽는다는 할머니 설명이 있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한 낮에 네 사람이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비지땀을 흘리며 풀매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내가 나섰다. 쓰지 않고 모셔 둔 내 유일한 농기계인 이름도 찬란한 '아세아관리기'를 몰고 나가서 한 시간 만에 풀을 다 매 드렸다.

로터리 날을 얕게 하고서 밭 표면을 살짝 긁어내듯이 로터리를 치니 잡풀들이 아주 깨끗해졌다. 뜻하지 않게도 한 순간에 풀을 다 매 버리자 아랫집 할머니는 그날로 콩을 다 심었고 물을 줘 가며 고구마도 심고, 도라지도 옮겨 심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나랑은 신종 품앗이가 시작되었다.

먹을거리가 시대 때도 없이 담장을 넘어 왔다. 우리 밭에서는 산 짐승이 작살을 내서 한 통도 따지 못했던 옥수수를 할머니가 틈만 나면 한 소쿠리씩 갖다 주셨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 갔다가 늦어지면 마당에 널어놓은 삶은 나물가지도 거둬들이고 비라도 오면 우리 집 빨랫줄부터 둘러 보셨다.

도리어 내가 품을 되갚아야 할 처지가 된 듯 싶을 때에 할머니 집에 전기가 나갔다. 뇌성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여름날 전기가 끊기자 할머니는 깜깜절벽이 되어 즐겨 보시는 티브이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차단기를 올리면 덜컥 하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었다.


내가 테스트기를 동원하여 회로를 점검했더니 마당 옆에 있는 자동 펌프모터가 물에 잠긴 탓이었다. 그쪽 전선을 분리하자 불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가을에 심는 끌감자를 한 소쿠리 갖다 주신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엊그제는 아침 일찍 할머니가 올라 오셨다. 택배를 부쳐야 할 것이 있어 택배회사를 불러야 하는데 어떤 놈의 회사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라 농협에서 나온 전화번호부 책이 있지만 전화를 할 수 없으신 게다. 내가 두 군데 전화번호를 크게 써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 했던 대로 할머니가 다시 올라 오셨다. 전화를 해도 어떤 데는 안 받고 어떤 데는 신호가 안 간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숫자도 모른다는 걸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전화를 했더니 두 군데 다 못 온다고 했다. 추석 전이라 너무 바빠 이 깊은 산동네까지 올 수가 없다고 하니 낭패였다.

할머니가 다른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읍내로 싣고 나가 택배를 부쳐 드렸다. 딸네 집 주소도 내가 대신 전화를 해서 받아 적었다.

다음날이었다.
고추를 손수레에 가득 따 와서 하나하나 행주로 닦고 다시 밭으로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웃으며 소쿠리에 가득 고추를 따가져 오셨다. 내 대신 고추를 따 주신 것이다.

"우리 동네서 고추 농사 일등이여. 고추가 왜 이리 잘 됐디여?"
"나는 농약 통 지고 살아도 병이 오는데 약도 안치고 뭔 재주여. 고추가 익케 깨그셔(이렇게 깨끗해)?"

택배 잘 받았다는 자식네들 전화를 받고 기분이 더 좋으셨는지 이번 품앗이는 덤으로 공치사도 얹어 주셨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http://cafe.naver.com/mobo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http://cafe.naver.com/mobo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품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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