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원수지요, 적게 먹고 살 수밖에..."

아내의 추석장보기 '짐꾼'으로 따라간 청량리 경동시장

등록 2010.09.21 16:32수정 2010.09.2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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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시장 풍경 ⓒ 이승철


"집에 갈 때 경동시장에 잠깐 들러 가요."
"집 근처에도 대형마트가 있는데 웬 경동시장?"


청량리 쪽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경동시장에 들러 가자고 합니다.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으니 구입할 물건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근처에도 대형마트가 두 개나 있는데 복잡한 경동시장에 들러 가자니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집에서 나올 때 미리 준비를 하고 나온 듯 손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담아갈 커다란 주머니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내는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이 경동시장을 찾았습니다. 그러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요, 벌써 몇 년째 계속 되고 있으니까요.

시장에 들러도 그리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4형제 중 셋째인 우리 집에서는 차례상을 차리지 않아 특별히 재수용품을 구입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례는 맏형님 댁에서 형제들이 함께 하고 있거든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입구에 들어서니 길을 메운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추석대목이라고 해도 요즘 재래시장들은 장사가 안 되어 한산하다고 하지만 이 시장은 전혀 다른 풍경입니다. 없는 물건 없고, 값도 가장 저렴한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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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 1500~2000원씩 하는 단감 ⓒ 이승철


"우선 청과시장 쪽부터 한 번 돌아보고..."


아내는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며 걸어갑니다. 그런데 앞장서 걷고 있는 아내의 뒤를 좇아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깨 부딪치며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끔씩 아내를 놓치기 일쑤, 결국 몇 번인가 핸드폰으로 연락하여 다시 합류하곤 했지요.

"저 사과랑 배 좀 봐요? 이 시장이 확실히 값이 싸긴 싸네요. 여기선 한 개에 3천 원씩 하는 사과가 백화점에선 5~6천 원은 줘야 사겠던 걸요, 저 커다란 배도 값이 두 배 차이는 나는 것 같고, 대형마트도 이 시장보다는 훨씬 비싸 비교가 안돼요"

올여름 늦더위로 아직 덜 익은 것처럼 빛깔이 어설퍼 보이는 크지 않은 단감도 1개에 1500원~2000원씩입니다. 예년 같으면 1천 원에 2~3개씩 팔렸을 것 같은 단감입니다.

평소 물건 값은 고사하고 집안 살림에도 별로 관심 없이 사는 남편이 미덥지 않은 아내는 어느새 구입할 상품들의 가격조사를 해놓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전 그저 아내가 물건을 사면 무거운 물건이나 들고 따라다니는 '짐꾼'일 수밖에요. 그렇게 과일가게들을 돌아보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 몇 개와 복숭아를 사고 야채가게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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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값이 저렴한 북한산 고사리 ⓒ 이승철


시장 골목은 양쪽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길 가운에 좌판들이 이어져 있어서 길은 더욱 복잡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껴 지나기에도 비좁은 길에서 상인들과 흥정하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50대 이상의 노년층들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두 명씩 보이는 젊은 층은 상인이거나 노인들과 함께 온 가족으로 보였지요.

"해마다 명절 때면 이 시장을 찾습니다. 없는 것 없이 다 있고, 값도 제일 싸거든요"

면목동에서 부부가 함께 왔다는 60대 후반의 노인도 해마다 이 시장을 찾는다고 합니다, 노인은 비좁고 복잡한 시장골목이지만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는 재미로 벌써 한나절이 다 되었다며 두둑한 짐 보따리를 들어 보입니다.

"올엔 추석물가가 너무 비싸네, 저 조그만 시금치 한 단이 4천 원이래, 예년 같으면 5백 원 짜리인데, 쪽파 좀 봐? 너무 비싸니까 아예 반 줌씩 나눠놓고 2천 원에 파는구만"

잡채용으로 시금치를 사야하는데 너무 비싸다고 망설이던 아내가 할 수 없이 거금 4천 원을 주고 한 단을 삽니다. 얼마 전까지 천원에 4~5개씩 팔던 오이도 3개에 2천 원, 조림고추도 6천 원을 주고 1근을 샀습니다. 그리고 북한산 고사리가 1근에 3천 원이라 값이 싸다며 사들고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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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에 2천원씩 파는 쪽파 ⓒ 이승철


"정부에서 추석물가 대책을 세운다고 법석을 떨더니만 말뿐이었나 보네요?"

우리들 옆에서 2천 원을 주고 쪽파 한 줌을 산 아주머니가 물가가 너무 비싸다며 한숨을 쉽니다. 남편의 수입이 줄어 주머니는 가벼워졌는데 추석물가가 너무 비싸 어느 것 하나 선뜻 집어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가가 가장 저렴하다는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이 아주머니는 강북구 수유동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올해는 장사가 안 되는 편이에요. 오가는 사람들만 많지, 물건 값이 비싸다고 조금씩 사거나 값만 물어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좌판에서 야채를 파는 상인도 너무 비싼 물가가 탐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 했습니다. 시장 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들 때문에 와글와글 복잡하지만 실제 팔리는 물건은 매우 적다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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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림용 풋고추를 사는 아내 ⓒ 이승철


"살기 힘든데 추석이라고 많이 쓸 돈이 어디 있나요? 물가가 너무 올라 예년 수준의 돈을 가지고 나왔지만 물건은 반도 안 되는 것 같네요"

연신내에서 이곳까지 왔다는 할머니 부부가 들어 보이는 시장 주머니가 달랑 가벼워 보입니다. 너무 비싼 추석시장 물가에 서민들의 시장바구니도 가볍고 상인들도 재미없는 풍경이었습니다.

"할 수 있나요. 가난이 원수지요. 적게 쓰고, 적게 먹고 견딜 수밖에..."

어느 늙수그레한 부부의 힘없는 푸념이 일 년 중 가장 풍성하다는 한가위를 쓸쓸한 느낌이 들게 하였습니다.
#추석장보기 #경동시장 #노부부 #이승철 #짐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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