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였던 제자, 20년 전 내 말에 웃음치료사 되다

첫배새끼 제자, 웃음치료사가 돼 나타났습니다

등록 2010.11.14 17:36수정 2010.11.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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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러브스토리 웃음치료와 레크레이션 시간에 두 모자가 서로 사랑의 눈길을 주고 받고 있다. ⓒ 안준철


우주 센터가 있는 고흥 나로도로 1박2일 가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정부가 교육복지투자사업의 일환으로 지원한 이번 여행의 공식 명칭은 <가족러브스토리>입니다. 바닷가에서 가족과 함께 하룻밤을 묵으면서 사랑의 역사를 써보라는 얘기일 텐데, 사정상 가족 대신 친구나 담임선생님과 함께 참여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12일(금) 오후 3시 경 학교를 출발하여 고흥 나로도로 향하면서 우주선 발사가 성공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돌아오는 길엔 제 생각이 사뭇 달라져 있었습니다. 제 생각이 바뀐 것은 졸업한 지 약 20년 만에 웃음치료사 되어 돌아온 한 제자 덕분이었습니다.

김두수(39, 한국웃음치료교육원장). 그는 제 첫배새끼입니다. 학교에서는 첫 담임을 맡은 학생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정년이 겨우 5년 남짓 남다보니 첫 담임을 맡은 그들을 어떻게 지도했고,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주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러니 저 대신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여름 학교로 저를 찾아와 제 손을 잡고 그가 들려준 말입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팝송을 많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사이먼과 가펑클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를 배울 때였는데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앞으로 너희들이 어떤 인생을 살든 그것은 너희들의 몫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기억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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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러브스토리 웃음치료사가 된 제자가 강의를 하고 있다. ⓒ 안준철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말에 힘을 얻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때는 사업이 번창하여 꽤 많은 돈을 만지기도 했지만 IMF 구제금융 이후 회사를 처분하고 노숙자 신세가 되어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가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날 웃음치료 강사로 초대된 그가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니까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주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아쉽고 억울할 수가 없었어요. 오래전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해주신 그 말씀. 그 희망의 불씨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한 사람의 청중이 되어 오래전 첫배새끼였던 제자의 강의를 듣는 그 심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의 강의를 듣다가 어쩔 수 없이 눈앞이 흐려지고 말았는데, 잠시 후 흐려진 시야 속으로 한 남학생이 들어왔습니다. 오래전 제자와 지금의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가 자못 흥미로웠습니다.         


"자, 크게 한 번 웃어봐."
"전 본래 안 웃습니다."

"나도 그랬어. 난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거든. 실업계를 나온 것도 창피했고,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창피했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난 고졸 출신이지만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할 때도 있어. 거기 가면 늘 자랑스럽게 말해. 내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라고 말이지. 난 내 가슴에서 창피함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꿈을 심은 거야. 이 험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다리가 되어주자고 말이지. 그래서 웃음 치료사가 된 거야.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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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러브스토리(세족식) 가족과 친구의 발을 씻어주고 있는 효산고 학생들. ⓒ 안준철


'한강에 돌 던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강에 돌을 던지면 아무 흔적도 없이 그냥 가라  앉고 말겠지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돌을 던지는 것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마음에 작용한 탓이겠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한강에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말을 해줄 때가 많습니다. 예정된 실패를 무릅쓰고 말을 던지면 역시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렇듯 그 메아리가 20년 만에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퍽 고무적인 일입니다.   

문학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가는 영상시대의 아이들에게 오행시나 패러디, 혹은 시 이어쓰기를 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입니다. 장원으로 뽑힌 학생들의 작품을 한 번 감상해보시지요.  
   
오행시(나로도여행)

나로도에 왔습니다
로켓 나로도를 2번이나 발사한 곳입니다
도중에 2번 실패한 곳이기도 하죠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발사준비를 하고 있는 연구원들
행운을 빌어요 ~화이팅!


패러디(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개비의 담배도 피우지 않기를
호기심 이는 제안에도
나는 거절했다
금연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담배를 부러 뜨려버려야지
그리고 나에겐 주어진 은단을 먹어야겠다
오늘밤에도 2500원을 저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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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러브스토리(숲길 산책) 고흥군 나로도 봉래산 숲길을 걷고 있다. ⓒ 안준철


시 이어쓰기(시나브로)

목마름이 없는 아이들
억지로 물 먹이는 일도 지겨워
수업하다 말고
하릴없이 창밖을 내다보는데
한 아이가 뜬금없이 내게 묻는다


"선생님, 인생은 한 방입니까?"

아무 문맥도 없이 날아온 질문이
조금은 귀찮기도 하고
조금은 재밌기도 해서
아이의 손을 잡고 창가로 가
이렇게 되물었다.


("인생을 다 살아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여백으로 남겨두었던 괄호 부분은 원래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기 저 나뭇잎들이 한 방에 물이 들더냐?
시나브로 물이 들더냐?"


졸업한 지 20년 만에 웃음치료사가 돼 나타난 멋진 제자도 인생을 한방으로 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경과 실패를 발판삼아 시나브로 오늘의 성공에 이른 제자에게 존경과 사랑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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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러브스토리 나로도 우주센터를 구경한 뒤 온 가족이 함께 포즈를 잡았다. ⓒ 안준철

#순천효산고 #김두수 #가족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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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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