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병국 가옥, 초대받지 못한 자의 방문

한때는 최신식이었을 99칸 한옥... 장독대에서 만난 새로운 사실

등록 2010.11.19 15:03수정 2010.11.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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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병국 가옥(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 소재)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해가 1984년이니까 26년이 훌쩍 지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선병국 가옥이라는 곳도 오늘에서야 알았으니 말 다했지 뭐.

아무튼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여행지로 삼는다는 건 조금은 불편한 일이다. 나 역시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우리집에 불쑥불쑥 들이닥친다면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을 것 같다. 매일매일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어야 하고, 그들의 눈에 비춰지는 게 걱정되어 집안 곳곳 말끔하게 청소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처음 보는 얼굴들은 행동 거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실들을 생각하면서도 안면몰수하고 지난 13일 그곳을 찾았다.

'그래도 찾아온 손님을 내쫓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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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앞 담장길 ⓒ 최지혜


입구에서부터 그 크기가 짐작되어 나를 압도한다. 99칸의 한옥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집안을 감싸고 있는 진한 황토빛의 담장이 길가로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이 가을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다. '연인과 함께 손잡고 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솟을대문(정문)으로 들어서니 또 문이 있다.

선병국 가옥은 이렇게 안채, 사랑채, 사당의 공간이 각각 안담으로 쌓여져 있고 그 모두를 통틀어 바깥담이 한번 더 감싸고 있는 형태다. 그 규모가 엄청나서 마치 한 채의 가옥이라기보다는 작은 한 마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 같은 첫 방문객은 자칫 집안에서 길을 잃기도 십상이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은 그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일어나고 말았다. 안채 옆 한층 높은 돌마당 위 즐비하게 늘어선 장독에 시선을 뺏겨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다. 가옥의 안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인기척을 느끼고 바삐 나와 가리막을 치고는 들어가지 말라는 문구를 적고 있다. 가지런히 늘어선 장독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여기 잠깐만 올라가면 안 될까요?"
"안돼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 사이 누군가가 나와 같은 욕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올라섰나보다.

"내려오세요."

뒤를 돌아보니 한 방문객이 삐죽대며 올라선 발을 내려놓고 있다. 지난 2006년 이곳에서 만든 간장이 500만 원에 팔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조금은 야속하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고 나니 안채로는 발을 들여놓기가 영 불편해져서 그 길로 돌아 나와 사랑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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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랑채 ⓒ 최지혜


조심스럽게 들어선 사랑채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라 그런지 조금은 편안하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에 기와를 얹는, 흔히 생각하는 한옥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 특색있다. 선병국 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H자형의 구조와 시멘트와 벽돌을 사용하는 등 그 시대 한옥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니 또다른 안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맞이한다. 주워들은 말에 의하면 안채에서 마주친 분은 작은며느리, 사랑채에 계신 분은 큰며느리라고 한다.

사랑채는 현재 도솔천이라는 찻집으로도 운영되고 있다. 따뜻한 방안에서 향기로운 차 한잔 내어놓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한옥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아쉽지만 이미 방안을 점령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있어 앞마당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잠시 바람을 느끼는 것으로 대신해 본다. 

사랑채와 마주보고 있는 중문을 나와 오랜 세월 그곳을 감싸고 있었을 담쟁이 넝쿨에 시선을 고정하며 발길을 틀다보니 불청객의 서러움을 단번에 날려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장독대!!

안채 앞에서 봤던 장독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규모다. 보물이라도 찾은 것 마냥 신이 난다. 장독대 앞 절구통에 올라서서 풀지 못한 예술의 혼을 맘껏 발산해본다.

'이럴거면 괜히 안채 앞에서 기웃거렸잖아?!'

그런데 신기한 모습을 포착했다. 얼핏 보기에는 다 똑같은 단지들이 자세히 보니 그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전라도 단지, 경상도 단지, 평안도 단지, 충청도 단지 등 선두에 각 지역별 푯말을 세워 가지런히 줄을 세워놓았다. 따뜻한 남쪽 지방일수록 직사광선을 최대한 차단시키기 위해 입구가 좁고, 추운 위쪽 지방일수록 입구가 큰 것이 특징이다.

다 같은 줄만 알았던 장독들도 저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생활용품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여행의 순간 순간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행복이 곱절이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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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옆 장독대 ⓒ 최지혜


예쁜 벽화가 인상적인 마을들, 옛 가옥들이 자리잡고 있는 고즈넉한 민속마을 또는 누군가의 고택으로 알려진 가옥들.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곳들을 방문할 때면 그들의 생활이 구경거리라도 된 것 마냥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대받지 않았으면 어떠하리.

우리가 누군가의 초대를 받고 이 세상에 나온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여행은 인생과도 같은 것 아니겠는가? 불쾌한 불청객이 되느냐, 유쾌한 불청객이 되느냐는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방문을 끝낸다.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18352569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http://dandyjihye.blog.me/140118352569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선병국가옥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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