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살 고운 날 사진 살며시 찍어 주소서

[책읽기가 즐겁다 388] 김지연, <근대화상회>(아카이브북스,2010)

등록 2010.12.06 17:15수정 2010.12.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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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화상회 (김지연 글·사진,아카이브북스 펴냄,2010.6.30./18000원)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박태희 님이 우리 말로 옮긴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를 읽으며 나라밖 수많은 사진가들 삶과 넋을 헤아립니다. 이 가운데 '알렉 소스'라는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살피면 "사진가의 첫 번째 책은 대단히 훌륭한 경우가 많다. 보통 10년은 걸리니까(185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그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래, 열 해쯤은 한 가지 사진길을 꿋꿋하게 걸어야 비로소 사진책 하나로 영글 수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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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아카이브북스

사진쟁이 안승일 님이 일군 <굴피집>(산악문화,1997)이라는 사진책 또한 열 해라는 횟수에 걸쳐 담은 사진이 갈무리되었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정년을 맞이하여 물러난 다음, 해마다 새로운 사진책을 한 권씩 내놓는 전민조 님 작품을 들여다보면 한두 해에 뚝딱 하고 만들어 낸 사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주섬 오름을 담은 김영갑 님 사진책을 돌아보면 두고두고 삭이며 가다듬어 피어난 꽃송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퍽 이름난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를 여럿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들이 '다큐 사진을 찍는다'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다큐 사진 흉내를 낸다'고만 느낍니다. 알렉 소스라는 분도 "보통 10년은 걸리니까" 하고 말했습니다만, 어떠한 '다큐 사진 찍기'를 하든 '소재도 주제도 먼저 잡으며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만, '기껏 열 해라는 나날을 채우지 못하'며 섣불리 '다큐 사진'이라며 선보이는 일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요. 아니, 즐겁게 웃으며 찬찬히 넘길 만하지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한 가지 이야기를 놓고 열 해뿐 아니라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남짓 사진으로 담곤 합니다. 온삶을 바쳐 한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는 사진길을 걷는 멋진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온삶을 바쳐 걷는 곧은 사진길이란 더할 나위 없이 멋스럽습니다. 다만, 더할 나위 없이 멋스러이 사진 한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이분이 일구는 다큐 사진이 다큐 사진답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틀림없이 "보통 10년은 걸리"도록 사진길을 걸어야 맞습니다만, 횟수를 알뜰히 채운다고 해서 좋은 사진이나 고운 사진이나 참된 사진이나 맑은 사진이나 너른 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고작 한두 해 반짝하듯 사진기를 움켜쥐었어도 착한 사진이나 고른 사진이나 밝은 사진이나 예쁜 사진이나 기쁜 사진이나 슬픈 사진을 빚을 수 있어요.

전라북도 진안 계남마을 한켠에 자리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꾸리는 김지연 님이 빚은 사진책 <근대화상회>(아카이브북스,2010)를 읽습니다. 사진을 담고 글을 쓴 김지연 님은 책 머리말에서 "요즘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사실들을 우리 또래의 사람들은 단 몇 마디 이야기 안에서도 모스부호처럼 판독해 내며 은밀한 경험자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시큼 쌉쌀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서 나는 은밀한 경험이 아닌 100년도 채 못 된 50∼60년 전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와 함께하려고 한다(5쪽)."고 밝힙니다. 이러한 머리말 그대로 사진책 <근대화상회>는 시골 삶터 곳곳에 얌전하면서 어여삐 뿌리내리어 고즈넉하게 이어오는 작은 가게 삶과 이야기와 모습을 사진과 글로 보여줍니다. 시골 삶터 작은 가게이든 도시 골목동네 작은 가게이든 으레 '구멍가게'라 일컫지만, 어느 곳이든 이 작은 가게를 가리킬 때에는 '가게'라고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저런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요. "가게에 좀 다녀오너라."라든지 "가게에 다녀올게요."입니다.

사진쟁이 김지연 님은 말합니다. "시골에서는 마을회관 신축이나 새 집을 짓는 데 획일화된 건축양식을 고집한다. 한 노인은 건축가인 아들이 모던한 형식의 집을 지어 주었는데 남들과 다른 형태의 유별난(?) 집을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이곳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부터 지금까지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겨울에 지나다 보면 호빵 통에서 팔리지 않는 빵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39쪽)." 다른 가게를 들러 가게 임자한테서 미주알고주알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습니다. "군산 영화동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가옥들이 아직도 눈에 뜨인다. 이 가게도 외부는 개조되어 있으나 안쪽은 그 시대 건물이 남아 있다. 가게 한쪽에 테이블과 의자 네 개를 놓고 소주나 맥주 음료수도 판다. 시에서 천만 원을 빌려 줄 테니 가게를 고쳐 보라고 하지만, 그 돈도 언젠가는 갚아야 되는데 고친다고 장사가 썩 잘될 것 같지도 않아 거절했다고 한다(91쪽)."

사진책 <근대화상회>에 실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사진을 넘기다가, 아이는 다른 놀이를 한다며 저리 가고, 아이 아빠 혼자 다시금 사진을 살핍니다. 사진책에 실린 가게 사진이 하나같이 무겁고 슬프며 어둡고 추워 보입니다. 사진을 거의 모두 겨울날 찍어서 무겁거나 슬프거나 어둡거나 추워 보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금 사진을 돌아봅니다.

몇 차례 사진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비로소 무언가 깨닫습니다. 사진쟁이 김지연 님이 얼추 열 해쯤 시골 삶터 가게를 조용히 느긋하게 돌아보며 <근대화상회>를 일구려 했다면 책이름부터 속 사진과 속 글까지 모두 다른 모습이었겠다고. 그렇지만 애써 열 해를 꼬박 채워 <근대화상회>를 빚으려 했더라도 이 책하고 그리 다를 바 없을는지 모르겠다고.

하나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는 쉰 해나 일흔 해 동안 사진기 한 번 쥐어든 적 없었을지라도 이이가 사진기를 들어 '당신이 찍으려 하는 당신 삶'을 사진 한 장으로 담아서 선보이는 모습이란, 이이를 쉰 해나 일흔 해 동안 끊임없이 취재하고 사진을 담아서 선보이던 모습이랑 견줄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오래도록 차근차근 살피며 사진을 담을 줄 아는 매무새여야 하는 한편, 한두 번 스치듯 지나가더라도 속살을 따사로이 껴안거나 어루만질 수 있는 마음밭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기계 단추를 한 번 슬쩍 누르면서 이야기를 일굽니다. 누구나 쉽게 단추를 눌러 이야기를 엮는 사진밭이요 사진삶이며 사진길입니다. 우리 집 스물일곱 달짜리 아이 또한 날마다 수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는 아이 눈썰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흔들리건 비틀리건 초점이 어긋나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참 즐겁게 사진을 찍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아이 눈으로 받아들이는 둘레 모습을 즐겁게 껴안거든요.

사진책 <근대화상회>는 처음부터 '어떤 책으로 나올밖에 없다'는 틀에 갇혔는지 모릅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책 겉에 담긴 사진은 '대목리수퍼'입니다. 그러나 사진책 이름은 '근대화상회'입니다.

'삼거리수퍼'라든지 '호남수퍼'처럼 수수한 이름 그대로 수수하게 꾸려 온 삶자락이 책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이름은 '근대화상회'입니다. 딱 '근대화상회'라는 이름만큼 사진과 글이 담겼고, 이 테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게 임자인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서 미주알고주알 갖가지 이야기를 듣는 김지연 님이지만, 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가운데 어떤 이야기를 추리거나 솎거나 걸러 책에 담으려 했는지 곰곰이 톺아봅니다. 사진책 <근대화상회>란 이 사진책 머리말에서 사진쟁이 김지연 님이 밝히던 '당신 어린 나날 마주하던 그 작은 가게 이야기'하고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곱씹어 봅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가 아쉽습니다. 적어도, 겨울이 물러난 이른 봄날, 햇볕이 따사로운 여름날, 노을빛이 보드라운 가을날, 눈송이 소담스러운 겨울날, 이렇게 네 철에 걸쳐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에 이 시골 삶터 작은 가게를 새삼스레 돌아보는 한편, 비오는 날과 눈오는 날과 바람 몰아치는 날과 바람 살랑이는 날과 안개 낀 날과 구름 짙은 날과 흐린 날과 쨍쨍 빛나는 날과 눈부신 날과 빛살 고운 날에 따라 요 작은 가게에서 보리술 한 병하고 초코파이 하나 사들고는 바로 이 작은 가게 앞 자그마한 걸상에 앉아 냠냠짭짭 해 보신다면, <근대화상회>란 더는 '근대화상회'일 수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hbooks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hbooks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

근대화상회

김지연 사진.글,
아카이브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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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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