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그 영감과 살고 싶다고?

노름만 빼고 별 짓 다 한 아버지, 다시 만나 살겠다는 어머니

등록 2010.12.19 14:19수정 2010.12.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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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저 사람을 만나고 싶냐는 질문, 부부금슬을 재는 바로미터로 애용되는 질문이다. 내게 그 질문을 던진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노', 절대 노다. 한 번 살아봤으면 됐지 뭐가 아쉽다고 다시 만나 아옹다옹 할 것인가. 물론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만 말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결혼생활이 얼마나 진저리 났으면 혹은 그 남편이 되게 '싸가지'거나 폭군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주 무능한 인간인가 보다 질러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남편은 단점은 상당해도(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보다는 낫지만) 크게 트집잡을 위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 살 생각은 없다. 하긴 어떤 아줌마는 역할을 바꿔 지금 남편의 남편으로 태어나 받은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고도 하더만 그 정도 억하심정을 갖을 만큼 남편에게 맺힌 것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굳이 설명하자면 내생에도 함께 살고 싶을 정도로 남편을 절절히 사랑하거나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고나 할까?

엄마의 고백을 듣고 천불이 났다

그런데 몇 달 전 '콩꺼풀의 유통기한'에 대한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도 우리 엄마한테 말이다. 모처럼 서울에 왔다 하니까 후배들이 내 얼굴을 보러 친정으로 찾아왔다.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데다 호기심 천국인 우리 엄마. 딸내미 친구 틈바구니에서 도통 빠질 생각을 안 하시고 자꾸 끼어드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 재담에 까르르 까르르 웃던 후배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우리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쓸쓸히 사시는데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같이 사시니 너무 좋으시겠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아버님 또 만나고 싶으세요?"

엄마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그러엄~ 사실 얘 아버지가 돈은 못 벌었다만 나무랄 데가 없거든. 생전 누굴 때리기를 하나, 욕을 하나, 노름을 하나. 세상에 착하고 말없고. 이날 이때까지 자식들에게 이놈 소리 한 번 안 하고, 큰소리 한 번 안 쳐보고 시집 장가 보냈다니까."

"아이구, 정말로 어머니 아버지는 잉꼬부부신가 봐요.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 절대로 안 만나겠다고 하시던데. 하하하~~"

엄마의 고백을 들은 후배들은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하는데 정작 나는 갑자기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그 한 마디가 가슴 깊숙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했던 까닭이다. 저 할머니 되게 웃긴다. 뭐? 언제 때리기를 했나, 욕을 했나, 노름을 하길 했냐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마 중학교 1~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밖에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데다 아이까지 낳은 상태였다. 사업을 한답시고 집안 재산을 거덜내는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우다니, 아버지는 그야말로 집안의 애물단지요, 핵폭탄이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집안이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그 날이 바로 전쟁 터지는 날이다. 야밤에 투닥투닥으로 시작해 주먹다짐이 오가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여차하면 뛰어들어가 말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잠도 못자고 보초를 서듯 이불 속에서 밀려오는 잠과 씨름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내 동생들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치고 받고 싸우든, 엄마가 죽는다고 맨발로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연탄불에 코를 박든 말든 맏이가 아니니 책임질 일도 없고. 그저 편히 잠만 자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

노름만 빼고 별 짓 다 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다. 물론 우리들에겐 엄마 말대로 때리기는커녕 욕 한 번 해 본 일이 없지만(그럴 자격이나 있나 하는 생각이 자식들 생각이다) 무능에 무책임에 처자식 제대로 건사 못 한 가장의 전형 중에 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돈도 못 버는 데다가 온갖 말썽을 도맡아 부렸던 아버지 덕분에 엄마와 우리 사남매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삼촌, 고모들 앞이나 친척들 앞에 지은 죄도 없으면서 늘 기를 못 폈고, 어른들의 잔심부름도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건 우리들 차지였다. 사촌, 6촌 많고 많은 아이들은 저 하기 싫으면 어른들 앞이나 마나 제멋대로 발버둥 치며 울고불고 심술도 부리고 땡깡도 잘도 놓더라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식들 입을 것, 먹을 것, 학비 모두 할아버지한테 떠맡기고 밖으로만 떠도는 아버지를 둔 덕에 하고 싶은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려 온통 뒤틀리고 휘어진 나무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자란 우리 사남매를 보는 것 같은 슬픔과 애잔함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자식들 회한을 엄마나 아버지 모두 제대로 헤아려 본 적이 있던가?

자식들이 받은 상처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당신 못잖게 만고풍상을 겪은 딸 앞에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저 당신이 살아낸 고단한 인생에 대한 억울함, 쌓인 한. 여기에 급급하다 보니 자식들 상처는 미처 보이지 않는, 그런 엄마가 우리 엄마 같았다.

그런 남편에게 보내는 무한신뢰, 무한사랑 도대체 저토록 끔찍한 외곬 사랑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으면 남편의 좋은 점만 기억나고 기나긴 세월 남편에게 받았던 극심한 상처와 통증을 하나도 남김없이 아주 완벽하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이냐? 치매환자도 아니면서 말이다.

하긴 남편이 외도를 하든, 욕설과 주먹다짐을 하든 그 순간이 지나면 남편에 대한 애정이 광적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삼촌 고모들 혹은 친척들 입에서 우리 아버지 험담이라도 들을라치면 바로 그 앞에서 마치 첨병처럼 남편을 옹호하며 반격을 했다.

엄마의 그런 모습에 혐오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감쌀 것을 감싸야지 말도 안 되는 괴변으로 남편을 두둔하는 어리석은 아내. 그런 엄마가 항상 불가사의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혐오스럽고 부끄러웠다. 엄마가 고통받는 것은 다 자업자득인 것 같았고 남편에게 당한 상처에 대한 원망을 엉뚱한 사람들한테 푸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하여튼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을 하는 엄마를 보며 어쩌다가 내가 이런 부모 밑에 태어났을까 한탄을 하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뭐시라? 다시 태어나도 그 영감과 살고 싶다고?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건 말건, 얻어터지건, 쥐어박히건 자기 좋아 계속 살겠다는데 내가 시비 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부모님 모두 노후까지 다정하게 해로하는 모습, 자식들 입장에선 더 이상 다행스런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한 마디에 불뚝성질이 터진 것은 엄마 아버지의 아들 딸로 태어나 움추리고 숨죽여 울었던 그 세월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한 번 파도에 뒤집어지는 앙금처럼, 지난 세월의 상처가 일순간에 가슴을 할키고 지나면서 솟구치는 분노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콩꺼풀의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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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 핀 작은 들꽃 ⓒ 조명자


부부마다 제각각인 것 같더라. 어떤 이는 아무리 최선을 다 해 살아도 아내가 또는 남편이, 좋은 점은 대충 빼버리고 단점만 기억한다면 수십 년 공이 하루아침에 공염불 되는 것이요. 우리 엄마처럼 지나간 세월 남편이 어찌 했든지간에 당신이 기억하고 싶은 행복한 순간만 기억한다면 옛날 죄는 일순간에 사해지는 그야말로 천수경의 '일념돈탕진'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아버지는 천복을 타고난 양반이요. 우리 남편은 마누라 복은 약에 쓸래도 없다고 봐야 하겠네. 열심히 산 남편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도 내 생에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하긴 들판에 핀 작은 들꽃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서원을 가슴에 품고 사는 난데 만날 일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건 어떨까?

현생에서 나를 사랑해줬던 남편에게 보답을 한다면 예쁜 들꽃의 웃음으로 보답하고 싶다. 아, 예쁘다~~들꽃으로 환생한 나를 꺾어 그 향기에 흠뻑 취하는 잠깐의 행복. 꺾인 채 그 발아래 생을 다 한다 해도 크게 억울하지 않는. 들꽃으로 남편과 만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부부금슬 #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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