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방금 저 스님, 빨리 잡아!"

우리 부부의 가짜 탁발승 가리는 법

등록 2011.03.28 08:49수정 2011.03.2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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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외 종업원 1인' 규모의 작은 사업장이 내가 얼마 전부터 일하는 곳이다. 사장 외의 종업원 1인으로 종신 고용된 사람이 나고, 나를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작은 월급으로 고용한 사장은 남편이다. 부족한 일손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학생이 도와준다.


우리 사업장에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가는 특권은 그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학생뿐이다. 그렇게 사업을 꾸려온 지 몇 년째. 영업 개시 시간이 되면 꼭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님들이다. 그들은 적어도 며칠 간격으로 한 명 꼴로 온다. 그 스님들이 탁발 활동을 개시하는 시간대와 우리가 영업을 개시 하는 시간은 거의 겹친다. 청아한 목탁소리와 함께 등장한 스님들은 우리가 모종의 반응을 보이기까지 일방적으로 염불을 왼다. 스님들은 그렇게 인근 상가를 차례로 돌곤 한다.

처음에는 요즘 세상에 웬 탁발승인가 의아했지만 새롭게 벌인 사업에 따르는 긴장감도 적잖은 터라 선뜻 보시를 했다. 거기에서 작은 위안이나마 얻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가 퍽 호의적인 재가(在家)로 부각되었는지 그분들 방문횟수가 지나치게 빈번해졌다.

잦은 방문으로 인해 스님들을 대하는 우리들 마음에도 초심과 달리 불손한 감정이 끼어들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도 꽤 부담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꼬박 꼬박 일정액을 수행자의 바랑에 상납하는 우리를 향해 그들이 실은 몽땅, '가짜'라는 유익한(?) 정보를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영락없는 스님으로 분(扮)하고, 익숙한 리듬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경을 외는 스님을 향해 무턱대고 '가짜' 취급을 하기엔 자못 망설여졌다. 그들의 연기가 훌륭하거나 우리가 소심하거나 했다. 그리고 설령 몽땅 '가짜 스님'들이라고 하지만 행여 그 가짜들 속에 진묵대사처럼 짖굳은 고승이 끼어 있어 우둔한 중생들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사람들의 불안과 기복의 염원을 악용한 사이비 승려들이라고 할지라도 사소한 징크스와 하찮은 징후에도 하루 운을 가늠하는 영세 자영업자에겐 그나마 한 순간의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두려움과 심리적 허를 비집고 모든 종교는 창궐한다고 버트런드 러셀은 설파했다. 그리고 나는 러셀의 '맹목적인 종교의 허상에서 벗어나 사랑과 지성으로 직조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피력된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그토록 강하게 경도되어 있었으면서도 이런 경우는 좀처럼 합리적 사고를 작동할 수가 없었다.


그분들이 봉송하는 애창곡은 단연 반야심경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반야심경 도입부를 시작하는 그들 모습 어디에도 '가짜'로 분류할 만한 단서는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비교적 가벼운 대목을 설 할 때쯤 이미 내 손은 저절로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를 닥치는 대로 꺼낸다. 고작 몇 천원 보시하면서 '고득아뇩다랴삼먁삼보리' 심오한 대목까지 거저 경청하는 것은 좀 황송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들의 신심도 스님들의 계속된 방문에 마침내 점점 고갈되고 있었다. 몇 집 걸러 교회인 기독교 천국에서 그것도 '가짜'로 의심되는 승려들에게 속아 주는 속가가 드문 탓에, 그 스님들의 방분은 특정 상가에 집중되었다.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요즘 같은 세상에 구차한 탁발로 수행을 삼고자 하는 스님이라면 얼마나 대단한가, 하던 애초의 환상도 점차 사그라졌다.

"똑똑똑똑 또르륵. 똑똑똑똑 또르르르륵.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마밀다시…."

영업 준비로 한 참 바쁜 시간 굵은 목탁소리가 주의를 환기시키곤 한다. 천 원짜리를 몇 장 집어 바랑 안주머니에 넣어주자마자 열심히 외던 경은 그만 뚝 그친다.

"똑뜩 똑뜩 아제아제 바라아제 똑뜩 똑뜩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똑 또르르르르. 성불하십시오."

보시금 수령과 동시에 외우던 경을 생략하고 마무리 한다. 합장 하고 돌아서 가는 스님 모습을 일별한다. 어쩐지 정말 '가짜'스님 같은 석연찮은 기운이 감돈다. 또 반대로 냉철하게 판단했다는 자신감으로 '죄송합니다. 저희는 교회 다닙니다!'하고 기껏 따돌려 놓고 보니 이번엔 정말 '진짜'스님 같은 여운이 확 풍기는 것이다. 이래저래 석연찮고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여보 방금 저 스님, 빨리 잡아!"

남편이 손에 천 원짜리 명장을 챙겨들고 소리친다. 방금 수확 없이 가게 문을 나선 스님을 다시 따라가 어서 돈을 주고 오라는 뜻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돈을 받아들고 슬리퍼 바람으로 달려간다. 스님은 그새 모퉁이를 돌고 있다. 저 스님을 그냥 보냈다가는 우리에게 오려던 복이 더불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조바심이 인다. 겨우 따라 잡고 나면 한층 여유로워진 표정의 스님은 무염한 눈빛으로 합장을 한다.

"헉헉헉, 스님. 저기, 방금 저희 가게 오셨었죠? 저희가 몰라 뵙고 죄송합니다. 보시금이 적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아이고, 이러실 거 없으신데, 성불하십시오."

송구스러운 표정을 최대한 드러내며 바랑에 적선하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렇게 돌아서 오는 발길은 그러나 여전히 안도와 의심이 어우러진 석연찮은 감정이다.

"어떻게 됐어. 그 스님 만났어? 돈 드렸어?"
"헉, 숨차. 겨우 따라잡아 드리고 왔어.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벌서 백 미터는 가서 따라가는데 혼났어."
"예사스님이 아냐. 저런 스님들은 처음엔 잘 몰라. 탁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필이 왔어. 음, 절대 가짜스님은 아냐. 수행을 엄청 오래 해야 저런 포스가 나와."
"당신도 그렇지? 얼핏 보기에도 스님 눈빛이 형형하고 날카로운 거 있죠? 휴, 하마터면 우리 또 실수할 뻔 했다."
"저번에도 저런 비슷한 스님 그냥 보냈다가 우리 그날 매출 죽 쒔잖아. 순간적인 찰나를 잘 포착해야 해. 오늘은 매출 좀 될 거야, 두고 봐."

저 사람이 과거 세상사 만물을 변증법적적으로만 도출해 내던 그 유물론의 신봉자가 맞는가 싶다. 각박한 생계와 경제적 불안 앞에선 냉철한 이성도 합리적 사고도 나약한 샤머니즘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무명에 눈이 먼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확고한 방침을 세웠다. 반야심경을 외울 줄 아는 스님들에 한해서 보시를 하되 액수는 일금 삼천 원으로 동결한다. 그동안 스님으로 행세하던 이들을 죽 관찰한 바에 따르면 반야심경도 제대로 못 외우는 사람들이 많았던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정말 스님이라면 가장 기초적인 경전 반야심경을 외울 줄 알아야 한다. 반야심경을 외우되 진짜 스님이 아니라도 읊어서 복이 되고 들어서 복이 된다는 반야심경을 애써 깨우친 정성과 열의를 높이 쳐주자는 생각이었다. 그 후로는 그래서 그들이 목탁 추임새에 맞춰 외는 경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듣게 되었다.

"여보 빨리 나와 봐! 스님이다!"

남편은 이제 스님 복장이 가게 문을 들어서는 기미만 보이면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똑 딱 똑딱 또르르를. 나무야 모지다 붓다야 흐으으으음"

이런 주문은 출처가 불분명한 어설픈 조작 품이다. 문맥도 안 맞고 조합이 안 된다. 명백한 실격이다. 어떤 분들은 반야심경을 몇 소절만 들어봐도 바로 '스님'으로 분류되는 것이 가능하다. 목탁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도입부를 시작하고 낭랑하게 후속 서술부를 끌어 온다. 이윽고 내가 오케이 신호를 보내면 남편은 흔쾌히 지갑을 연다. 보시를 받고서도 한참 더 경을 외워 끝까지 완창 하시는 충실한 스님들도 있다. 그분들은 후렴구까지 세 번 되돌이표로 반복함으로써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다. 

그런가 하면 영업에 치중한 어떤 스님은 염불은 뒷전이고 대량으로 인쇄된 부적을 다발로 지참하고 다니면서 파는데 여념이 없다. 그 부적을 지갑에 넣고 다니면 소원성취하리라는 비기를 누설해서 가짜 신분을 쉽게 드러냈다. 부적 옵션을 선택하자면 소정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 달마도를 한 장 구입했다. 얼굴빛이 맑고 고요한 어떤 스님께서 종이가방에 본인이 손수 그린 달마도를 여러 장 넣고 오셨다. 그 스님은 의심 많은 재가자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신분을 확실히 밝힌 명함을 소지하고 다니셨다. 명함엔 경상도 어떤 암자의 주지스님으로 되어 있었다. 그림 값은 책정된 가격이 없이 성의껏 하라는데 그것은 좀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도 스님께서 적정한 선을 말씀해주셔야지요. 저희들은 이런 불화를 처음 모시는 거라 얼마를 드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처사님 성의만 보이시면 됩니다. 소승이 기도하며 신심으로 그린 것이니 처사님께도 분명 효험이 있을 겁니다. 돈은 괘념치 않는답니다. 여유가 없으시면 그냥 드려도 되고요."
"그러면 됩니까. 스님, 제가 지금 현찰이 사만 원밖에 없어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요 앞 편의점 현금지급기에서 찾아다 채워드리겠습니다. 가시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처사님 그러지 마십시오. 있는 돈만 보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대신 이 달마대사님, 매장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잘 모셔두십시오. 소원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덕을 안겨준다는 달마대사를 매장 내 어디에도 편히 모실 수가 없었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 중 기독교인들이 보면 질색을 할 거라는 남편의 지나친 염려 때문이었다. 타종교에 유난히 배타적인 기독교인들 심사를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쉽게 눈에 안 띄는 장소를 물색했지만 유독 강렬한 인상의 달마대사를 안전하게 피신시킬 은신처가 적당히 없었다.

"뭐 그럴 필요까지 있어요? 사업하는 사람들 이런 거 하나씩은 걸잖아. 아무리 교회 다닌다고 그거 이해 못할까. 예사스님이 아닌 것 같던데 중요한 곳에 모셔두라 그러셨잖아. 효험 있게 한 가운데 걸어요."
"안 돼. 교회 다니는 손님들 심정도 고려해야지. 우리도 어디까지나 서비스업이잖아, 괜히 자극할 필요 없어. 사업 번창하라고 구입한 그림인데 자칫 역효과 날수도 있는 거야."

이교도들의 눈을 피해 달마도를 안전하게 안치시킨 장소는 기상천외하게도 가게 천장이었다. 사람들이 높은 매장 천장을 일부러 올려다볼 염려는 없었다. 옛날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다는 지하의 까따꿈바는 햇빛이 한 점도 안 드는 어둠의 세계였다면 우리의 달마대사가 은신중인 가게 천장엔 종일 색색의 형광불빛이 작렬하고 있었다.

가끔씩 피곤에 지쳐 올려다 본 천장에는 달마대사님이 거꾸로 엎드린 불편한 체위로 뜨거운 형광불빛에 눈이 쏘여 괴로운 표정으로 세가 약한 자신의 중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해야 했던 베드로. 생계를 위해 기가 센 달마대사를 천장에 매달아 놓은 중생.

비록 우리가 일 년에 절에는 한 번도 안가는, 모든 종교에 두루 냉담한 신자이지만 우리에게도 대속과 구원에 대한 염원과 두려움 같은 것은 늘 존재한다. 천장에 유폐된 달마대사는 얼마 전 지상으로 편히 안착시켜드렸다. 밑에서 올려다 볼 때와는 달리 지상에 착지한 달마대사는 찡그린 얼굴이 아니라 익살스런 표정이었다. 우리가 새로 고안한 은신처에서 편한 얼굴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 옆 탁자에는 지급 준비금 삼천원이 늘 준비되어 있다.
#사업 #위안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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