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융의 무의식 이야기

[서평] C.G. 융 외, <무의식의 분석>을 다시 읽으며

등록 2011.04.12 16:25수정 2011.04.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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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카이스트의 학생들과 교수들의 자살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의 위기관리 능력과 생명에 대한 애착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는 데서 부끄럽기까지 하다.

누군가 엘리트의 반열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려운 관문을 통해 엘리트 과정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그의 위기관리 능력 또한 뛰어나다 할 것이다. 엘리트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수리능력에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평가가 얼마나 허술한 잣대들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이번 카이스트 사태를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대학에서 상담 제도를 강화하겠다는 정부 쪽 이야기도 들린다. 사후약방문 격으로 들릴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듯하다. 이번 사태는 성과 중심에 치우친 학교 쪽 관리자들의 의지와 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자연인들의 정신건강 문제는, 이를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화나 제도, 교육 체계 등을 혁신적으로 고쳐가는 것과 함께, 심각하게 고려하고 대책을 근본적으로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내가 융의 무의식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칼 구스타프 융의 <무의식의 분석>(권오석 역) 겉그림. ⓒ 홍신문화사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그리고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무의식과 의식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하고, 따라서 서로 평행적으로 작용하여야 한다. 이것들이 서로 떨어지거나 분리되기에 이르면 심리적 장애가 따르게 된다." (78쪽)

융의 무의식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융의 무의식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그의 생명에 대한 애착이 묻어있기에 더 그렇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보이는 것, 외형적 업적주의에 쏠려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는 사이 생명과 그 돌봄에 대한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온 것 아닌가, 하고 돌아보게도 한다.

엘리트들이란, 이웃하는 동료들과 비교할 때 더 많은 재능과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 더 많은 자원이나 효용 가치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문명사회일수록 사회 성원들은 더 많은 자원이나 희소가치들을 소유하고 누리려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사회의 성원들이 엘리트가 되려고 열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명이나 그것에서 생기는 편리함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문명이나 그 편리함이 끝없이 인간을 자극하고 그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인간을 부추기는 것은 우리 시대와 우리의 자화상이다.


융은 말한다.

"문명화한 의식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본능으로부터 스스로를 늘 분리해 왔다. 그러나 이 본능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우리 의식과 접촉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142쪽)
"자기 자신의 그림자나 그 사악한 행위를 인식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145쪽)

그는 꿈이나 상징의 의미와 그것들의 해석 방법을 설명하면서, 무의식이라는 심적 과정을 통하여 21세기 초 한국 사회가 여전히 뒤따라가고 있는 서방측 문명과 문명인들의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우리 서방측 문명 역시 똑같은 신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들은 똑같은 편견이나 희망이나 기대를 키우고 있다."(147쪽)

문명과 그 결과물인 과학적 방법론들이 지존(至尊)의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이어가기 위하여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애써서 길을 찾고 있는가,고 융은 자기 시대 문명인들과 과학자들에게 심각하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그의 무의식 탐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는 어쩌면, 그가 프로이트와 시각을 달리한 결정적인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그 개인으로부터 떠나 인류라고 하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우리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현대의 사회적인 혼란이나 급변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개인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일이 바람직하다."(92쪽)
"우리는 개인의 정신적인 평형-혹은 '정신적 건강'에 관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93쪽)

그의 이러한 관심은, 꿈의 해석에서 개인의 성격 차이를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의 인간 이해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인간을 비관적으로 본다든가, 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성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생활이 어떤가를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인간의 현실생활이 냉혹한 대극성의 복합, 즉 낮과 밤, 탄생과 죽음, 행복과 불행, 선과 악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은 슬픈 진실이다."(147쪽)

이런 현실 속에서 개인은 끝없이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억압되며, 그 결과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두운 면들이 무의식에 축적될수록 그리고 의식과 간극이 넓어질수록 정신건강은 나빠질 것이다.

융은 인간을 연구하는 과학과 그 방법들이 얼마나 한시적이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고발한다. 아울러 '과학' 또는 심리학 하는 이들은 겸손해야 하며, 지적으로도 성실해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한다. 그 대상이 인간을 향할 때에는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그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꿈이나 상징의 해석은 지성을 필요로 한다."(158쪽)
"과학적인 이론만큼 깨지기 쉬운 것은 없다. 그것은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덧없는 시도이며, 영원히 계속되는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161쪽)

그가 했던 작업들인 꿈과 상징의 해석,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의 무의식 등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폭발력 있는 테제들이며, 그 작업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도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열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지면에서 그런 흔적이 묻어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성性(적 억압)과 지나치게 관련시켜 해석했다고 융은 보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훨씬 더 나아갔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무의식의 지평을 더 너르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무의식 이야기를 통하여, 자기 시대의 과학적 확신이 인간 무의식의 걸쳐있는 중층의 요소들을 지나쳐버리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회의성(懷疑性)이나 과학적인 확신이, 낡아빠진 구시대적인 사고나 감정의 습관, 완고한 오해, 무지함 등과 함께 인간 속에 공존한다."(168쪽)

그의 글이 우리 시대와 수십 년의 간격이 있는데도, 우리 시대의 그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그의 성찰과 진단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리라.

카이스트 학생들과 교수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처절하게 고발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피나게 쌓아온 학습과 연구결과물들, 그리고 그들의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들을 생각하며, 다시금 우리 한국 사회의 '1등 주의' 교육제도와 업적주의, 성과주의 학교 경영,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재생산해 내고 있는 한국의 권력구조와 경제구조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본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홍신문화사에서 낸 것이다. 1990년에 나온 1쇄본을 읽고 여전히 가지고 있다. 2007년에 중판을 이 출판사에서 냈다. 그러나 아쉬운 것들이 많다. 이 책의 원본이 어떤 것인가를 중판에서 나는 기대했으나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일본어 번역본에서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다. 첫판의 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문장들을 부분부분 고친 것 외에 첫판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다행히 일본어 투는 많이 손을 본 듯하다. Numinous를 '누미노우스'라고 적은 것이라든가, '정동(emotion)'의 우리말 새김, 부사인 '더'를 '보다'로 쓴 것 등이 특별히 거북하다. 거의 20년이 지나 중판을 내면서 각주 하나 친절하게 달지 않은 데 대해서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출판사 쪽에서 이번에 과감하게 원본을 밝히고 번역자도 새로운 사람으로 정해서 책을 내었더라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것이다.
첨부파일
융.jpg
덧붙이는 글 칼 구스타프 융, <무의식의 분석>, 권오석 역, 서울:홍신문화사 2007
첨부파일 융.jpg

무의식의 분석

칼 구스타프 융 외 지음,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2007


#무의식 #의식 #정신건강 #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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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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