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교통사고 현장 잠시 떠나도, 뺑소니 아냐"

"피해자 구호 급박하지 않았고, 가해자가 누군지 확인한 상태기 때문"

등록 2011.05.06 17:01수정 2011.05.0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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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피해자에게 신원을 밝히고 합의를 보던 도중 경찰이 출동하자 음주운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잠시 사고현장을 이탈했다가 돌아와 피해자를 다시 만난 경우 '뺑소니'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L(30)씨는 지난 2009년 12월 1일 새벽 1시경 승용차를 운전해 파주시 금촌동 농업기술센터 앞 도로를 가다가 사거리에서 서행하던 H(55)씨의 승용차 범퍼를 추돌하는 교통사고를 냈다.

 

L씨는 사고 직후 차에서 내려 H씨에게 자신의 이름과 직장, 휴대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네며 합의문제와 사고처리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이때 H씨가 112에 신고한 경찰차량이 나타나자 L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현장을 떠났다.

 

이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명함에 적힌 휴대전화번호로 L씨와 통화가 이뤄졌으나, L씨는 '가해차량 운전자가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근에 있는데 사고현장으로 가기 어렵다'며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L씨의 차량 안을 확인한 결과 술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L씨는 당시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H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큰 부상이 없어 현장조사를 마친 뒤 철수했고, H씨는 사고 현장에 20분 뒤에 나타난 L씨와 합의문제 등에 관해 1시간가량 얘기를 나누었으나 합의가 되지 않아 일단 헤어졌다. 물론 L씨는 보험사에 사고 신고를 한 상태였다.

 

한편 L씨는 이날 오후 1시경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 사고 조사를 받았고, H씨는 이날 오후 6시경 병원을 찾아 전치 2주 진단을 받고 4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차량수리비는 70만 원 나왔다.

 

그런데 검찰은 "L씨가 H씨에게 전치 2주의 상해와 차량 손괴 피해를 입혔음에도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고 도주했다"며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도주차량), 도로교통법위반(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기소했고, 1심인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7단독 박진웅 판사는 지난해 8월 L씨에게 벌금 800만 원을 선고했다.

 

박 판사는 "피고인은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할 만큼 급박한 사정이나 특별한 사정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와 사고처리에 관한 합의를 하던 중 경찰차가 나타나자 일방적으로 현장을 이탈해 도주했고, 또 아무런 이유 없이 경찰관의 현장복귀 요구에도 따르지 않았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항소심인 의정부지법 제1형사부(재판장 홍이표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L씨에게 유죄로 인정한 1심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교통사고로 4일간 입원한 사실은 인정되나, 사고 직후 차에서 내려 피고인과 합의문제와 사고처리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출동했던 경찰관들이 되돌아간 이후에도 1시간 동안 사고현장에 머물며 피고인과 합의문제 등을 논의한 점, 경찰도 피해자를 병원에 후송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고현장을 철수한 점 등을 종합하면 사고 당시 피해자를 즉시 구호 조치해야 할 정도로 상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이 자신의 음주운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경찰관들의 출동 당시 사고 현장을 이탈한 것으로 보이나, 피해자에 대한 즉각적인 구호조치를 취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고, 게다가 피고인이 가해차량 운전자라고 인정한 상황에서 피고인이 잠시 사건 현장을 20분간 이탈했다고 해서 교통사고를 야기한 후 도주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유죄로 인정한 원심 판결은 사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사건은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차량 추돌사고를 내고도 피해 운전자에 대한 구호조치 없이 도주한 혐의로 기소된 L(30)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 판시의 사정을 종합하면 피고인이 자신의 음주운전을 숨기기 우해 잠시 사고현장을 이탈한 것일 뿐, 피해자에 대한 구호조치가 필요한 상태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았거나, 사고현장을 떠나서 사고야기자를 확정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2011.05.06 17:01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교통사고 #뺑소니 #도주차량 #사고 후 미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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