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호랑이'는 죽어서도 쓸쓸하다

찾는 이 없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 생가

등록 2011.05.11 19:00수정 2011.05.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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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진방향으로 가다 보면 축산면에 이른다. 영덕의 대표적인 어항인 축산항은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과 가까우며 강구항과 더불어 대게로 유명하다. 특히 강구와 축산을 있는 20번 강축해안도로는 그 아름답기가 손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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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사람들로 붐비는 축산항 일대와는 달리 사람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곳이 있다. 2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한 의병장의 생가와 유적지에서는 2년 전에도, 오늘도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대구의 어느 대학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영덕으로 향했다. 딱히 정한 곳은 없었고 그저 길이 열린 곳으로 달리던 중 '신돌석 장군 생가지'라는 안내판을 보고 차를 돌렸다. 2년 전 홀로 이곳을 찾아 한 시간을 머물렀던 기억 때문이었다. 오늘(4월 30일)은 토요일이니 그래도 찾는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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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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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신돌석 장군 생가 ⓒ 김종길

시원하게 북으로 뻗은 7번 국도를 돌아나가면 축산면 도곡리다. 마을 입구에는 당집이 있다. 특히 신돌석 장군 생가지 바로 앞마을의 당집은 주변의 소나무와 퍽이나 잘 어울린다. 당집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내 신돌석 장군 생가지다.

 

생가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역시나 주차장에는 차 한 대 없다. 주차한 차가 없으니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터. 둥근 산을 닮은 초가가 쓸쓸하다. 원래 있던 생가는 일본 관헌들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의 초가는 1995년에 복원되었다. 마당 왼쪽에는 신돌석 장군 생가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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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생가에서는 2년 전에도 지금도 방문하는 이를 만날 수 없었다. ⓒ 김종길

신돌석 장군 생가에서는 2년 전에도 지금도 방문하는 이를 만날 수 없었다. ⓒ 김종길

약관의 나이에 평민으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그는 누구인가? 학창시절 누구나 국사 시간에 그의 명성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1878년에 태어나 1908년 30살의 나이에 목숨을 다한 신돌석 장군은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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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생가 인근의 기념관 ⓒ 김종길

신돌석 장군 생가 인근의 기념관 ⓒ 김종길

평민 출신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며 영덕, 영양, 울진, 삼척, 강릉 등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사실 신돌석 장군은 7대조가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던 가문의 후예이지만, 그 이후에 벼슬을 한 이가 없어서 당시에는 평민과 다름없었다.

 

농민, 포수, 천민들이 대거 참여했던 그의 의병부대는 1907년경에는 군사가 3000에 이르게 되었다. 영양, 영해, 순흥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고 일제의 시설물을 불태웠다. 특히 울진 장흥포에서는 일본 군선 9척을 침몰시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엄격한 군율로 민심들의 환영을 받으며 각종 게릴라전에서 전과를 올리고 다른 의병부대와의 연대 등으로 강성했던 영해의병도 일제가 가족들에 대한 회유와 토벌을 강화해 나가자 위축되기 시작했다. 다른 의병장들이 순국함에 따라 1908년에 이르러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더니 급기야 11월에 신돌석 장군은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게 된다. 이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있던 옛 부하이자 외가 동생뻘 되는 집에 은거해 있던 신돌석 장군은 그들의 계략에 빠져 독주를 마시고는 30살의 젊은 나이에 도끼로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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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유허비 1948년 신돌석 장군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세운 것을1999년 11월에 유적지로 옮겼다. ⓒ 김종길

▲ 신돌석 장군 유허비 1948년 신돌석 장군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세운 것을1999년 11월에 유적지로 옮겼다. ⓒ 김종길

신출귀몰하여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맹위를 떨치던 그의 활약에 비해 최후는 너무나 안타깝고 비참하다. 그가 태백산을 떠난 지도 벌써 100년이 넘었다. 그래서일까? 무심한 시간 속에 그의 존재는 점차 잊히고 있는 듯 최후만큼이나 그는 지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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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 유적지 두 번이나 방문했던 유적지에도 방문객은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관심했다. ⓒ 김종길

▲ 신돌석 장군 유적지 두 번이나 방문했던 유적지에도 방문객은 없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관심했다. ⓒ 김종길

생가에서 2km 남짓한 거리에 1999년 11월에 개관한 유적지가 있다. 신돌석 장군과 관련된 각종 유물과 항일운동, 일제의 만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이다. 생가와 더불어 이곳에서도 역시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신돌석 장군 생가와 유적지는 그다지 외딴 곳이 아니다. 7번 국도 바로 옆이고 대게로 유명한 축산항도 지척이다. 괴시리와 인량리 전통마을도 곁에 있으니 영덕을 여행할 때 이곳을 꼭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지자체에서도 대게홍보는 그만하면 대개 되었으니 정신을 살찌울 수 있는 이곳을 적극적으로 알려냄이 어떠실까. 여행이 단지 먹고 즐기는 관광 위주의 부박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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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마당의 신돌석장군생가유허비 ⓒ 김종길

생가 마당의 신돌석장군생가유허비 ⓒ 김종길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돌석 #태백산호랑이 #평민의병장 #신돌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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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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