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 사라지자 가방 검색... 내 인권은 어디로?

[체험기] '지텔프' 영어시험장에서 일어난 일

등록 2011.05.16 18:35수정 2011.05.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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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텔프위원회 웹사이트 ⓒ 지텔프 코리아


지난 15일 지텔프(G-TELP)라는 국제공인영어시험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지만, 각종 공무원을 지원하거나 자격증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응시하는 시험입니다. 이날 서울고사장이었던 양진중학교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오전 10시 시험이 시작되자 감독관이 시험지를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교실에는 책상이 여섯 줄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는데 감독관이 각 줄 맨 앞에 앉은 응시생에게 여러 부수의 시험지를 건네며 뒤로 넘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각종 시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제가 앉은 줄에도 문제지가 건네졌고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저는 앞에 앉은 응시생으로부터 문제지를 넘겨받아 한 부만 내려놓고 나머지는 뒷사람에게 전달했습니다. 잠시 후 뒤쪽 응시생 한 명이 문제지가 모자란다며 감독관에게 시험지를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단 시험이 시작되었으므로 모두들 문제 풀이에 몰두해 있었는데 감독관은 문을 열고 들락거리는가 하면 복도에 있는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경이 약간 쓰이긴 했지만 시험에 집중했고 그렇게 90분의 시간은 지났습니다.

시험 종료 안내에 따라 자리를 정리하는데 감독관이 자리를 뜨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묻자 시험지 한 부가 모자란 것은 누군가가 시험지를 유출한 것이라며 이는 범죄행위에 해당하므로 시험본부 관계자가 올 것이고 경찰도 와서 조사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응시생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시간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 시험본부 관계자가 들어와서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보내주지만 가방 검색에 응하라고 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범죄 발생하면 경찰이 모두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에 저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첫째, 부정행위에 관한 공지사항이 칠판에 붙어 있었는데 지금의 상황과 관련한 사전 공지가 있었는지, 즉 가방 등 소지품에 대한 검색의 사전공지 여부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둘째, 문제지 유출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약 20~30명 되는 응시생 각자에게 나눠줬어야지 편의상 앞사람에게 모두 건네준 것은 응시료를 내고 시험을 치른 사람들에게 시험 관련한 서비스를 해야 할 주관 단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셋째, 시험관리자의 착오가 있을 수 있는데 왜 응시생들을 모두 범죄인 취급하는 것인지 무슨 권리로 응시생의 가방을 열고 일일이 검색하겠다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범죄인 취급해 검색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고 응할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 응시생들은 일렬로 줄을 서서 가방을 열어보이고 빠져나갔습니다. 저의 질문에 시험본부 책임자라는 사람은 지하철에서도 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이 와서 모두 나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해 지하철은 불특정 다수가 대상이고 공공시설이므로 범죄가 발생한다면 경찰공무원이 법률에 의해 직무를 수행할 것이고 그에 불응하는 경우 법적 다툼이 생길 것이지만, 오늘 문제는 불특정 다수가 아닌 당신들에게 응시료를 낸 후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만 있고 업무를 편하게 하고자 여러 부수의 시험지를 한꺼번에 나눠준 것은 명백히 관리자 측 책임이니 그 해명과 사과를 하고 함부로 검색 운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텔프 코리아에서 범죄인 취급했던 응시생에게 사과해야

시험관리본부 측에서는 그럼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법적으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나머지 응시생은 모두 빠져나갔는데 시험관리본부 사람들이 책상 서랍을 일일이 확인하던 중 한 곳에서 시험지 한 부가 발견되어 소동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만약 시험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상호 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들도 처음 겪는 일이라며 당황했고 문제유출을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범죄인 취급하고 소지품을 검색하는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무조건 응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심각히 침해하고 침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리와 자유라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누릴만한 편안한 상황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상황에 의해 약간은 제한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불편한 순간에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모두 응하고 집에 가는데 왜 별일 아닌 걸로 혼자 따지고 있는가 답답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확대되면 쥐그림에 낙서 한 것을 큰 범죄라는 결정에 수긍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잠깐의 소동이 소동으로만 그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지텔프 관리자 측에서 잠시 범죄인 취급을 당했던 그 교실의 응시생들에게 시험지가 발견되었음을 개별적으로 통보하는 것은 물론 소지품 검색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하길 기대해 봅니다.

한국지텔프위원회 "규정대로 처리... 문제될 것 없다"
'국제공인영어시험'이라는 지텔프(G-TELP, General tests of English Language Proficiency)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지텔프위원회가 주관 대행하고 있다. 이 위원회의 조윤숙 기획팀 차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15일 서울고사장에서 있었던 소지품 검사는) 수험생들을 계속 강의실에 대기시켜 놓을 수 없어 동의를 구하고 한 명씩 실시했다"고 밝혔다.

또한, 조 차장은 "수험생들이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시험지가 부당하게 유출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조치이며 다른 시험들도 동일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처리는 "한국지텔프위원회 '부정행위처리규정'에 규정해놓았고 응시생들에게 미리 고지했기 때문에 문제 될 것 없다"는 주장이다.

감독관이 응시생에게 직접 시험지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조윤숙 차장은 "각 교실에는 감독관이 한 명이기 때문에 먼저 시험지를 받은 수험생이 먼저 시험을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면서 "감독관의 수를 늘리는 문제는 비용적인 측면과 적절한 수험생의 수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험지 분실은) 이번에 처음 발생한 일이며 개인의 불쾌감 유발없는 적절한 대응방식은 내부 논의를 통해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텔프 #시험장 #부정행위 #인권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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