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질하던 학생, 핸드폰 압수했더니...

대화가 귀찮아 외로운 아이들

등록 2011.05.26 14:58수정 2011.05.2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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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테다. 여전히 순무 대신 당근을 혹은 당근 대신 순무를 꺼내어 물고 앙상한 가지의 나무를 탓하며,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를 잊지 않기 위해 말장난으로 무료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포조를 잊고 럭키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그 속좁은 각인력으로도 '고도'를 향한 마지막 탄원과 기다림은 결코 멈춤이 없다.


어제의 일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우스꽝스러운 그들. 신발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시도하려했었는지 금세 망각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런데 절대로 '고도를 기다리는'일만큼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대학 시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처음 그들을 훑으며, 실컷 웃었고 또 비웃었다. 비웃음이 우월의식의 표출이라도 되는 것처럼. 최대한 비웃었다고 자부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비웃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새 비웃음은 슬픔이 되었고, 슬픔은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변해 버렸다.

돌아보면, 기다림을 잊어버린 채 달려온 일상이다. 동작이 반복되며 언어는 재생되고 일상이 무의미해질 때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당위적 가치인양 '고도'를 향한 그들의 기다림은 집요했다. 그 맹목적인 기다림이 결단코 '희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언행을, 불행히도 나는 닮지 못했다. 

일상의 세세한 행위는 지독스러울 만큼 기억하고 집착하면서, 정작 집중해야 할 '고도'에는 관심도 없으며, 더군다나 '기다리는' 행위는 귀찮은 이유로 내던져 버린 지 오래다. 그들은 일상을 망각하는 순간에도 '고도'는 잊지 않았는데, 나는 '고도'를 지워버리는 대신 일상에만 집착한 채, 얄팍한 평화로움에 젖어 자기 자신을 흘러가는 대로 방치했다. 보봐르의 표현대로 의지로 사는 어떤 이의 인생 앞에 바쳐질 예물로써, 자신을 '사물'로 유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엊그제 한 선생님과 핸드폰 이야기를 하게 됐다. 쉬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이 많은 요즘, 혹여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으니 핸드폰을 학교에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지도에 애로 사항이 많다. 수업 시간에 문자를 한 녀석이 있어서, 아이들과 미리 약속했던 대로, 선생님께서 1주일 동안 핸드폰을 압수하셨단다.


핸드폰이 없으면 친구들 연락도 안 되고, 그러면 아이들도 당황할 것이라며 강하게 항변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학생들과 선생님이 상의해서 세운 원칙이니, 자기가 깰 수도 없고, 선생님께 핸드폰을 고스란히 제출해, 아이의 핸드폰을 보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핸드폰을 보관하는 동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간 것도 아닌데,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없었다는 것. 기회만 생기면 문자를 하기에 도대체  무슨 할 말이 많기에 저 아이에게 너도 나도 문자를 보내나 싶었는데, 정작 핸드폰을 압수하고 보니, 이 아이가 먼저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고 했다.

더 황당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번은 졸업한 동아리 선배가 후배들에게 한 턱 내겠다고 토요일에 학교를 찾아왔는데, 2명만 참석했다는 것.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는 같은 반 아이들이 제법 되는데, 그중 1명만 왔기에 다른 아이들은 왜 안 왔는지 물었더니, '문자를 보냈는데, 확인을 안 했나 봐요' 답변했다고 한다. 같은 반이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말로 하면 될 걸, 굳이 문자를 보낸 게 더 신기하다(?)는 선생님께 아이는 명료하게 답했단다,

"귀찮잖아요."

대화가 귀찮아져버린 아이들이, 너무나 외로워졌다. 핸드폰이 잠시라도 없으면 불안해하고, 말하는 것보다 문자하는 것이 더 익숙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희망을 기다리는 조건이 뭘까 더듬다가 다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떠올리게 됐다. 때로는 엉뚱하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공동의 가치 '고도'를 기억해내고 끊임없이 기다릴 수 있는 힘, 그 본질은 부대끼고, 직접 마주하며 수다스럽게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대화'가 아니던가.

대화다운 대화가 서서히 증발하고 있는 아이들의 문화를 접하면서, 함께 연대하고, 같은 꿈을 꾸는 것, 그 기저마저 흔들리고 퇴색할까 걱정스러워진다. 좀스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더 큰 꿈으로 확장해나가지 못하는 것, 어쩌면 핸드폰 같은 기계에 예속된, 일그러진 일상의 자화상 때문이 아닌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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