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갈이 인생 76년에 노래 세 곡만 남았네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통영 부둣가 칼갈이 할아버지

등록 2011.06.15 14:48수정 2011.06.15 18: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통영항에서 51년 째 칼과 톱을 갈며 살아온 강갑중 노인 ⓒ 이승철


임 떠난 부두에 홀로 남아
기다리다 지쳐 쓰러져
넋이라도 한 포기 이름 없는 잡초가 되어
따뜻하고 양지바른 이곳에서
십 년이라도 백 년이라도 그리운 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노라.
- 강갑중 노인이 만든 노래 <기다림> 가사 1절


갈매기 끼룩거리고 뱃고동 소리가 부웅~, 가끔씩 드나드는 어선과 연안 여객선들이 미끄러지듯 오고 가는 한적한 포구, 초여름의 햇살이 따가워서인지 부둣가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바로 '한국의 나폴리'라는 이름을 얻은 미항, 경남 통영항이다.

그 부둣가에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남자 한 사람이 한낮의 따가운 햇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저 남자 어쩌면 오래전에 떠난 옛 사랑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부둣가 한 귀퉁이에 있는 공중화장실 옆에서 구성진 뽕짝 노랫가락이 쓱싹~ 쓱싹~ 칼 가는 소리에 섞여 갈매기 소리, 뱃고동 소리와 어우러진다.

"제가 맡긴 칼, 잘 갈아놓으셨는교?"
"하모, 자 여기, 잘 갈아놓았지요."

길 건너 음식점 아주머니가 조금 전에 맡기고 간 칼을 찾아간다. 이날의 첫 번째 손님이라고 한다. 톱을 갈고 있는 작업대도 쭈글쭈글한 노인의 얼굴처럼 오랜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 할배는, 이곳에서 수십 년째 칼도 갈고 톱도 씰며(갈며) 살아오신 기라."


구성진 노랫가락이며 칼 가는 솜씨가 남달라 보여 옆에서 지켜보노라니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노인을 소개한다. 자신은 부두 왼편 마을에서 목공소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a

초여름 한낮의 통영항 풍경 ⓒ 이승철


"그기, 군대에 갔다 온 그해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51년째인 기라."


노인에게 올해로 정확하게 몇 년째냐고 물으니 51년째라고 한다. 처음에는 인근 섬까지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가 3년 만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올해 76세인 강갑중 노인은 통영시 태평동에 살고 있다고 주소까지 밝힌다.

"지금 나오는 이 노래 이거 이 할배가 지은 노래 아닌교."

목공소를 한다는 중년 남자가 불쑥 던진 말이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구성진 노래를 이 노인이 지은 거란다. 선뜻 이해가 안 돼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노인이 악보 몇 개를 꺼내 담벼락에 펼쳐 놓는다.

'기다림'
'굴 까는 통영아가씨'
'한 송이 꽃이라도'

자작곡 세 곡의 악보였다. 세 곡 중에서 어떤 노래가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니 <기다림>이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를 겨우 나와 한글을 깨우친 정도인 노인이었지만, 풍광이 아름다운 강구안 포구에서 일하노라면 시심이 저절로 우러나왔단다. 그렇게 쓴 시가 40여 편, 그중에서 세 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란다.

a

강갑중 노인의 작업 모습 ⓒ 이승철


"왜 다른 꿈이 없었겠는교? 젊은 시절엔 언젠가 큰일을 한번 해보리라 꿈을 가졌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칼갈이가 천직이 되었지요. 인생 76년에 51년 동안 칼과 톱을 갈며 살아왔는데 남은 건 노래 세 곡뿐이네요, 허허허."

그래도 후회는 하진 않는다고 한다. 인생살이 크게 꿈꾸고 살아왔던들 뭐 별것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아들 딸 5남매를 두었는데 그들 중 아들 둘을 일찍 잃어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라고 한다.

통영 인근인 고성군 하이면 가난한 농가에서 맏이로 출생한 노인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가장으로 고달픈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배운 것도 없고 땅도 없어 마땅한 일거리를 찾다가 시작한 일이 톱을 만들어 파는 일이었고, 칼을 갈아주고 톱을 씰어(갈아)주는 일로 가계를 꾸리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언 51년, 강갑중 노인은 나이가 76세지만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올해 69세인 부인도 일하러 다닌다며 '먹고 살려면 나이 많아도 함께 일해야지 별 수 없지 않느냐"며 싱겁게 웃는 모습이 소탈하고 정겹다.

a

굴까는 통영아가씨 악보 ⓒ 이승철


'어떤 사람은 칼 한 자루 갈아가면서 값을 깎아달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 통영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거제도와 한산도에서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또 오겠다고 약속하고 갈 때는 마음이 찡하다'고 털어놓는다. 그동안 낯을 익히고 정을 쌓아온 단골손님들이 제법 많다는 말이다.

갈매기 배고파 먹이 찾아 날고 있네
똑딱선 오고 가는 통영항 연안부두
그리운 님 가신 배는 왜 안 오시나요
고기 잡아 만선되면 오시렵니까
깊은 밤 잠 못 이루니 별을 보고 한숨 쉬고
달을 보고 손을 빌어 기다리다 지쳐가는
통영의 여인이라오

이 시는 어떠냐며 보여준 <통영의 여인>이라는 시다. 녹음기에서는 마침 <굴 까는 통영아가씨>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난주 수요일(6월 8일) 남해안 여행 중에 통영 부둣가에서 만난, 칼과 톱을 갈며 살아가는 강갑중 노인의 그윽한 눈빛이 고깃배 깃발 너머 머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play

통영항 부둣가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들으며 일하는 강갑중 노인 ⓒ 이승철


#강갑중 #통영항 #남해안 여행 #이승철 #칼갈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 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김 여사 성형' 왜 삭제? 카자흐 언론사로부터 답이 왔다
  2. 2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3. 3 카자흐스탄 언론 "김 여사 동안 외모 비결은 성형"
  4. 4 최재영 목사 "난 외국인 맞다, 하지만 권익위 답변은 궤변"
  5. 5 한국의 당뇨병 입원율이 높은 이유...다른 나라와 이게 달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