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윤세주 그리고 의열투쟁

항일 독립투사 윤세주열사 어록비 제막

등록 2011.06.25 10:22수정 2011.06.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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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윤세주 열사 어록비 제막식 ⓒ 독립기념관


1911년 4월 29일 밀양공립보통학교.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가 거행됐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학교측에서 일왕 생일 축하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박아 버렸다. 이 일로 학교는 온통난리가 났다. 결국 윤세주와 김원봉은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동화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교장선생님의 항일활동을 이유로 결국 중학교마저 폐쇄됐다.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농부 반(潘) 모의 집에서 윤세주는 김원봉·이성우·한봉근·한봉인·김상윤 등 13명이 모여 의열단을 창립했다. 암살과 파괴는 조선독립을 위한 의열단의 주요 투쟁 방법이었다. 철저한 비타협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던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수많은 독립운동 방법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투쟁노선이었다.

1920년 12월 밀양경찰서 투탄사건, 1921년 조선총독부 투탄사건,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사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의 주역들은 대부분 밀양출신이었고 어느 독립운동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우고자 한 의열 투쟁노선이 있었다.

윤세주 등은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을 주도했으나 불행하게도 정보유출로 체포됐다. 이 일로 윤세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법관을 향해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되어 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당시 윤세주는 19세로 의혈단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출옥 후 그는 밀양에서 1931년 5월 신간회가 없어질 때까지 국내 활동을 벌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통일전선운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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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윤세주 열사 어록 ⓒ 독립기념관

1932년 7월,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무장독립군 양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설립됐다. 윤세주는 이 학교에서 정치학, 군사학, 폭파공장, 혁명이론과 실천 전략 등을 이수한 후 2기생부터 교관의 자격으로 조선혁명사 등 주로 사회과학 과목을 강의했다. 또 졸업생들에게 특별 공작임무를 부여하는 등 일본의 방해로 폐교될 때까지 조선독립과 만주국 탈환을 위해 전력을 쏟았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창당되자 윤세주는 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부원으로 선출되어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의 편집 책임자로 활동했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무장조직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 당시 윤세주는 본부에 배치되어 훈련 주임과 기관지 '조선의용대 통신'의 주간을 맡아 활동했다.


윤세주는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지도원과 민족혁명당 중앙대표 자격으로 화북으로 진출한 후 중국 팔로군을 도와 척후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화북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능한 한인 인재를 민족해방운동 간부 요원으로 만들기 위해 화북 조선청년간부학교를 조직, 교관을 맡기도 했다.

1942년 5월 일본군 주력부대 3만여 명이 태항산 근거지를 공격했다. 윤세주는 이에 맞서 싸우다 화옥산 부근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심한 출혈로 그해 6월 2일 42세의 일기로 이국 만리에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중국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 혁명열사능원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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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열사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기념관은 지난 24일 오전 11시 '항일 독립투사 윤세주 열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사)석정 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기념관내 시어록비공원에서 어록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또 이날 오후에는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윤세주열사 탄생 11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가졌다.

특히 윤세주 열사의 어록비(가로 270cm, 세로 120cm, 두께 45cm)의 좌측 받침은 해란강에서 채취한 자연석이다.

그의 어록비에는 의열단 제1차 국내특공거사 사건으로 체포돼 법관에게 했던 진술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되어 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
#윤세주 #밀양 #의열투쟁 #어록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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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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