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들

[해외리포트] 출간 75주년, 마가렛 미첼에 관한 특별한 사실 10가지

등록 2011.06.30 19:00수정 2011.07.0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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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로 모든 원고를 작성했던 마가렛 미첼(애틀랜타 역사센터 제공). ⓒ Atlanta History Center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 밤을 새워 가며 책을 읽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1981년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를 막 마치고 시간이 남아돌던 때 친구 집에서 어슬렁거리다 만난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그중에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자극하기 딱 좋은 그 제목에 걸려든 나는 이후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상·하권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마침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너무나도 아쉬워 연이어 또 한 번 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타이밍도 절묘하게 그 이듬해에는 같은 제목의 영화가 국내에서 재개봉됐고, 학교에서는 '문화영화'로 단체관람을 시켜줬다.

소설에 이어 영화까지 이 작품은 '강한 여성'의 이미지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연히 작가인 마가렛 미첼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동했는데, 그땐 지금처럼 자료 찾기가 쉽지 않던 때라 그저 미국 남부 애틀랜타 출신 작가이고 생애 딱 한 작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정도밖에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올해 6월은 마가렛 미첼이 이 불세출의 작품을 출판한 지 75년이 되는 때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책을 읽은 지도 꼭 30년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딴 세상'이었던 애틀랜타에 지금 내가 살고 있다.

75주년을 맞아 애틀랜타 역사센터(이하 역사센터)와 마가렛 미첼 생가(이하 생가)에서는 지난 1월부터 언론에 보도자료를 돌리며 부산을 떨었다. 현재 역사센터에서는 미국 문학사의 중요한 사료라 할 만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본의 마지막 장들과 함께 미첼이 지인들에게 보냈던 편지들, 각종 기사자료들과 공식 문서들이 9월 5일까지 특별 전시되고 있다.

이 두 곳 말고도 미첼이 출판사 편집장에게 처음으로 원고를 건넸던 곳으로 알려진 '조지안 테라스 호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박물관', '타라로 가는 길 박물관', 오크랜드 공동묘지 등에서도 이미 이달 들어 특별 행사들을 열었고, 6월 30일에는 조지아 공영방송인 GPB에서 '마가렛 미첼: 미국의 반항아(Margaret Mitchell: American Rebel)'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1936년 첫 소설 발표 6개월 만에 백만 부가 팔리고, 1939년 할리우드판 대작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화제가 되는 유명인이 되었던 미첼. 현재까지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3000만 부 넘게 팔려 나갔으며, 초판이 발행된 이후 단 한 번도 절판이 된 적이 없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해마다 25만 부가 팔리고 있는 책을 쓴 미첼은 단연 애틀랜타 최고의 브랜드라고 할 만하다. 올해는 소설 출판 75주년이지만, 자료들을 보니 2009년에는 영화 탄생 70주년 행사로 바빴었다.

소녀시절 막연히 이름과 얼굴만 알고 궁금했던 작가의 고향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는 무척 많았다. 이 중에 역사센터에서 만난 사료들과 생가에서 전해들은 얘기들을 바탕으로 특별한 사실 열 가지를 추려서 소개한다. 관련 자료에 목말랐던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본 마지막 장(63장) 전시 모습. 이 외에도 60장, 61장, 62장의 일부가 전시되었다(애틀랜타 역사센터 제공). ⓒ Atlanta History Center


[사실 1] 유복한 어린 시절, 굴곡진 청년 시절, 두 번의 결혼

1900년 변호사인 아버지와 여성 참정권을 위해 활동했던 어머니 슬하에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미첼은 소녀 시절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현재 조지아 주 최고의 명문 사립고등학교 웨스트민스터 스쿨의 전신인 워싱턴 세미너리를 다닐 때는 드라마클럽 창립 멤버이기도 했고 졸업연감(Yearbook)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미첼은 고교 졸업 후 북부 매사추세츠 주의 유명한 여자대학인 스미스 칼리지로 진학해 의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첫 학기부터 악재가 잇달아 터졌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때(1917~1918) 세미너리 여학생들이 젊은 현역 군인들을 위한 댄스파티에 초대되곤 했는데, 고교를 졸업하던 1918년 여름 미첼은 22세의 클리포드 헨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약혼을 했다. 뉴욕의 유명한 집안 자제로 캠프 고든에서 보병 훈련 교관이었던 헨리는 약혼 직후 해외로 출정했고, 미첼은 9월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달 뒤, 약혼자가 프랑스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인플루엔자가 돌아 학교는 걸핏하면 휴강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월에는 어머니가 인플루엔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어머니는 미첼이 도착하기 하루 전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스미스 칼리지로 돌아가 일학년 과정을 겨우 끝마친 미첼은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떠맡기 위해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사교계에 데뷔했다. 이때 프랑스 파리의 나이트클럽에서 유명한 춤을 한 자선 파티에서 선보여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스캐롤라이나의 명문 집안 자제와 사귀기 시작했다. 둘은 1922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4개월 만에 그 결혼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남편은 당시 불법이었던 술 판매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자신이 술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폭력까지 행사했다. 애틀랜타를 떠나 중서부로 간 남편은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년 뒤 결혼의 효력이 정지되기에 이른다.

결혼과 헤어짐을 동시에 경험한 1922년에 미첼은 새로운 일을를 시작했다. <애틀랜타 저널>의 기자가 되어 주로 '선데이 매거진'에 인터뷰, 라이프 스케치, 어드바이스 칼럼 등을 썼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필명은 페기 미첼이었다.

이때 같은 업종에서 일하던 존 마쉬와 가까워졌다. 사실 그는 첫 번째 남편과 결혼할 때 신랑 들러리를 섰던 친구이자, 결혼 전 미첼에게 구애했던 전 남편의 연적이기도 했다. 뛰어난 편집자였던 마쉬와 미첼은 1925년 7월 4일에 결혼했다.

미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초고를 썼던 자리에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마가렛 미첼 생가 디렉터 조애나 애리에타 씨. ⓒ 고은아


[사실 2] 발목 사고로 기자 생활 그만둔 뒤 남편의 격려로 집필 시작

미첼은 어려서부터 두 번이나 말에서 떨어져 발목을 다쳤는데, 기자 생활(1922~1926)을 하던 때 다시금 사고를 당해 발목이 좋지 않았다. 결국 1926년에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남편은 근처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책을 빌려다 주었고, 미첼은 독서에 열중했다. 한동안 그런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도서관에는 따분한 과학서적을 빼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요. 더 읽으려면 당신이 책을 쓰는 수밖에 없겠는걸."

그로부터 3년 동안 미첼은 타자기 앞에서 살았다. 1929년까지 거의 70개의 장이 완성되었는데, 그 후 몇 년을 묵혀 두었다. 원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남편과 뉴욕의 맥밀란 출판사를 위해 일하던 언론계 친구 딱 두 사람.

1935년 4월, 맥밀란 출판사의 편집자 해럴드 레이텀이 애틀랜타를 찾았다. 1934년에 조지아 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캐롤라인 밀러가 퓰리처상을 수상한 데 자극을 받아 또 다른 '남부 원고'를 찾아 나선 것이다. 조지아 주의 저명한 작가들과 언론계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레이텀은 미첼에게 원고의 존재 여부를 물었고,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서 의기소침해진 미첼은 "그런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때 한 친구가 "미첼은 소설을 쓸 만큼 진지하지 않다"고 말하는 걸 들은 미첼은 그 다음날 루이지애나 주로 떠나는 레이텀을 호텔로 직접 찾아가 원고를 건넸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가져가라"는 말과 함께. 이 작품은 미첼에게 조지아 주 두 번째 퓰리처 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사실 3] 소설의 원제와 주인공 이름

미첼이 처음 붙였던 가제는 '옛 남부에 대한 원고(Manuscript of the Old South)'였고, 여주인공의 이름도 스칼렛이 아니라 '팬지(Pansy)'였다. 미첼과 출판사 양측 모두 이 두 가지를 놓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첼 자신이 좋아하던 영국 시인 어니스트 도슨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소설에서 제목과 주인공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실이다.

한편 미첼이 멜라니(<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차분하고 정숙한 여성)를 좋아한다는 14세 소녀 팬에게 자신도 멜라니를 진짜 주인공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편지글도 전시돼 있었다. 생가 디렉터 애리애타씨는 미첼이 스칼렛을 닮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스칼렛과 멜라니의 혼합이라고 본다"고 답했다.

'애틀랜타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인 미첼 관련 사료들(애틀랜타 역사센터 제공). ⓒ Atlanta History Center


[사실 4] 집필 동기와 캐릭터 비교

미첼은 독서로 소일하던 때를 떠올리며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재즈시대의 사실적인 소설들에 질렸다. 그래서 나 스스로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사람들, 전쟁과 남부 재건 시절을 버티고 살아남은 그들의 젊은 시절 얘기를 써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렛과 레트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로 크게 유명하지만 작가 자신이 강조하고 싶었던 주제는 '생존'이다.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얘기하던 '진취적인 기상(gumption)'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기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썼다."

전시자료 중에는 윌리엄 새커리 작 <베니티 페어>의 여주인공 베키 샤프와 스칼렛을 비교하는 칼럼도 있는데, 미첼 자신은 소설 집필을 끝낼 때까지 이 책을 읽지 않았고 그 뒤에 읽었노라고 언급하고 있다. 새커리의 소설이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한 여인의 성취와 좌절을 그렸다면, 미첼은 상류층에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일어서는 여인을 그렸다.

[사실 5] 역사 고증을 위한 노력

조지아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화가인 윌버 커츠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편 소개되었는데, 이 중 첫 번째 편지는 미첼이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소설의 역사적 사실들을 고증해 달라는 부탁을 아주 정중하게 적고 있다.

"저 자신을 단련시키는 기간 동안에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 1859년부터 1872년 사이의 애틀랜타입니다. …… 그러나 저는 제가 쓴 글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둘은 이후 긴밀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갔다. 소설이 영화화될 때 직접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미첼이었지만 제작자 데이비드 오 셀즈닉에게 커츠를 소개해 역사적 확실성이 담보되도록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커츠는 영화 제작 기간 동안 역사 고증에 대한 기술고문으로 일했다.

생가 안 기념품점에 진열된 미첼 관련 서적들. 옆으로 작가가 16세에 썼다는 <로스트 레이슨>도 보인다. ⓒ 고은아


[사실 6] 유명세와 속편에 대한 쐐기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의기소침해진 사람들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출현은 하나의 센세이션이었다. 사람들은 미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고, 무수한 루머가 양산됐다. 개중에는 미첼이 진짜 원작자인지 의심하는 것도 있었고 이혼설, 고질병, 심지어 발목 부상과 연관 지었는지 나무로 다리를 해 넣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미첼은 한 문서에서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각종 인터뷰나 강연, 문의 등에 성실하게 대응했으나 나중에는 건강을 이유로 대부분 거절했다. 그냥 미세스 존 마쉬로 남고 싶다는 말도 했다. 미첼이 첫 작 이후 작품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미첼과 변호사였던 그의 오빠는 해외 판권과 관련된 저작권 문제로도 엄청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미첼은 이렇게 항변하곤 했다.

"전화가 너무 자주 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한편 사람들은 스칼렛과 레트가 소설이 끝난 이후에 다시 합칠지 말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에 대한 미첼의 대응은 단호했다.

"속편은 없습니다. 저는 마지막 페이지 이후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아침 첫 투어가 시작되자마자 생가로 들이닥친 단체 관람객들. ⓒ 고은아


[사실 7]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

미첼의 작품에 쏟아지는 가장 혹독한 비판 중의 하나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다. 전시된 자료들 중에는 책 출판 당시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했던 칼럼들도 포함돼 있었다. 흑인 인권단체의 회장인 에드워드 두보스 씨는 AJC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자라던 1960년대에 이 작품 때문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얘기하면서 '명백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흑인들에게 이 작품은 노예로서 흑인을 상기시킬 뿐이죠. 이런 축제 분위기가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이러한 관점에 대해 생가 디렉터 애리에타씨는 흑인들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지적에 동의했다.

"미첼 역시 자기가 속한 사회계층의 인식의 한계 속에서 작품을 쓴 건 사실이에요. 말하자면 시대의 산물인 거죠."

[사실 8] 부의 사회 환원

처음 소설 계약금 500달러로 시작해 만 권까지는 판매수익의 10%, 그 이후에는 15%라는 인세 조건에 따라 미첼의 수입은 날로 늘어났다. 영화 판권 역시 사상 최고인 5만 달러에 거래가 됐다. 미첼은 이 돈을 아낌없이 자선사업에 쏟아 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첼은 미국 적십자사를 도왔는데, 병원선에 공급되는 장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전액 부담하기도 했고, 수백 명의 흑인 의대생들을 장학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문서들 중에는 애틀랜타 역사학회를 비롯한 몇몇 단체들에 연례 기부금을 보내면서 쓴 편지 글들도 포함돼 있다.  

미첼로부터 받은 원고를 검토한 후 출판 결정을 하고 처음 500달러를 보내면서 인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들어 있는 문서. 생가에 전시돼 있다. ⓒ 고은아


[사실 9] "내가 죽으면 모든 자료를 폐기하라"

'존 마쉬'의 뜻에 따라 1951년에 작성된 한 법률 문서는 1949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에 이미 사후에 모든 문건을 폐기하라고 했던 미첼의 뜻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미첼이 원작자라는 것을 증명해줄 최소한의 자료만을 남긴 채 모든 미발표작 및 사료들이 소각되었다. 생가 디렉터인 조애나 애리에타씨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첼은, 작가는 오직 발표한 작품으로만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가고 난 뒤 남겨진 흔적들로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원본의 마지막 장들은 최초의 출판사였던 뉴욕의 맥밀란 출판사의 출판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대에 코네티컷 주의 한 도서관에 기증했던 자료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잊히고 묻혀 있던 이 자료가 출판 75주년에 맞춰 미첼과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책을 쓰며 자료조사를 하던 엘렌 브라운에 의해 재발견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불태워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에 싸여 있다.

미첼의 '흔적 없애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2년에 미첼의 오빠 스티븐스 미첼은 유년 시절의 보금자리였던 애틀랜타 다운타운의 저택을 부숴 없앴다. 이유는 미첼도, 그도 "여행자들이 쿵쿵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첼이 살았던 아파트도 세 군데나 되지만 맨 처음에 살았고 원고의 대부분을 집필한 현재의 생가만 빼고 다른 곳은 남아 있지 않다. 미첼은 자녀도 없었다.

마가렛 미첼 생가는 아파트 10가구가 들어 있는 공동 건물이었다. 미첼이 살았던 곳은 1층 왼쪽의 아파트 1호. 그 공간만 보존용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공간은 전시공간, 기념품점, 강의실, 연회장 등으로 쓰고 있다(애틀랜타 역사센터 제공). ⓒ Atlanta History Center


[사실 10] 유일한 유작 한 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전에 썼던 미발표작이 여럿 있었으나 모두 소각되어 다른 작품이 한 편도 없었다. 그런데 1995년에 미첼이 15세에서 16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썼다는 중편소설 <로스트 레이슨(Lost Laysen)>이 제3의 인물을 통해 공개되고 출판되었다. 미첼의 학창시절 친구이자 미첼을 사이에 두고 첫 남편과 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진 헨리 앤젤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타라로 가는 길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여기에는 미첼이 보낸 편지들과 어린 시절 사진들, 그리고 이 작품의 오리지널 원고가 포함됐다. 이 책은 생가에서도 판매하고 있었다. 

아파트 1호 내부 모습. 거실과 침실, 부엌이 일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부엌이 너무 좁아 커피 테이블 크기의 식탁이 침실 안으로 들어와 있다. ⓒ 고은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 #스칼렛 #남북전쟁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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