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긴급조치'... 박정희가 돌아왔다

정치적 의사표현 자유 막는 방송우민화 정책 철회해야

등록 2011.06.30 18:59수정 2011.06.3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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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가수 김흥국씨가 MBC 라디오 <2시 만세> 강제하차에 항의해 여의도 MBC본사 앞에서 삭발하자 대한가수노동조합 조합원들이 'MBC 각성하고 대중예술인을 존중하라!'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지난 17일 가수 김흥국씨가 MBC 라디오 <2시 만세> 강제하차에 항의해 여의도 MBC본사 앞에서 삭발하자 대한가수노동조합 조합원들이 'MBC 각성하고 대중예술인을 존중하라!'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MBC가 올해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김미화씨와 고정출연자 김종배씨, 나아가 오락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김흥국씨를 정치적 이유로 퇴출시키면서 예상했던 시나리오다. MBC 경영진이, 진보든 보수든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하지 못하도록 모든 방송출연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박정희식 긴급조치'를 예고했다.

 

MBC가 7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방송 진행자와 고정출연자와 관련한 사규개정안은,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렸던 유신시대 긴급조치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사규개정안에 따르면 '방송의 공정성과 객관성 등을 훼손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하는 경우 출연이 제한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출연 제한에 해당하는 발언과 행위로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에 대해 특정인이나 특정단체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유리 또는 불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게 하는 발언이나 행위"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방송에 출연하려면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발언도 하지 말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전면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양성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위헌적이며 반민주적 내용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발언'에 대해서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하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방송에 출연한다고 해서,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포기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치적 발언에 대한 제한을 넘어, 아예 사회적 논란거리들에 대한 개인적 의사 표시까지 막겠다는 발상이다. 요즘처럼 복잡한 공동체에서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대립되지 않는 사안'이 어디 있는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다.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왜 필요했으며,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회의사당을 왜 민의의 전당이라고 부르고, 직접 민주주의 토론방으로 역할 하는 인터넷 공간이 왜 필요한가.

 

방송에 출연하는 진행자든 아니든, 그 사람이 연예인이든 아니든, 진보든 보수든, 표현의 자유로 대변되는 '말하는 자유'는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민주주의 핵심 사안이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치학적으로 여러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지만, '말하는 자유'야 말로 그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미화·김제동·윤도현·김흥국에 이어 김여진·문소리까지 잃어야 하나

 

이번 사규개정안은 기존의 방송강령보다도 훨씬 후퇴한 내용이다. MBC는 그동안 방송강령에서 "방송내용을 통하여 공직 선거의 특정후보자나 정당을 지지, 반대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선거방송 준칙을 통해 "특정 후보나 정당에 대한 지지를 공표한 자, 선거운동원 등을 출연시켜 후보자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방송을 정파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한, 방송 진행자나 고정출연자의 개인적 의사표현의 자유는 그런대로 보장해주던 사규였다. MBC가 기존의 사규보다도 후퇴한 '긴급조치식 방송준칙'을 만든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김미화와 김종배에 대한 퇴출이 정치적 이유라는 비판을 받고, 그리고 어설픈 형평성을 내세운 김흥국에 대한 퇴출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비판을 받자, MBC 경영진이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사후 합리화 조치다.

 

이미 김흥국을 살려야 김미화가 산다(<오마이뉴스> 6월 21일자)는 기사에서 밝힌 대로, 방송 진행자와 고정출연자에 대한 기준은 '방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방송을 진행하여 방송의 기본적인 공정성을 훼손했을 때만이 퇴출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방송 이외의 장소에서는, 누구라도 자연인으로 정치적 의사표현과 사회적 의제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헌법에 규정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 MBC 경영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설픈 형평성이라는 논리로 사규를 통해, 헌법상 권리이자 민주주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사규개악안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규개정안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최근 활발한 사회적 참여를 하고 있는 김여진이나, 옛날 민노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문소리 등은 첫 번째로 방송퇴출 대상이 될 것이다. 김미화나 김종배의 복귀는 불가능하고, 김제동이나 윤도현은 아예 방송 출연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총선과 대선 때 특정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박중훈이나 신해철도 마찬가지다.

 

김미화가 정치적 이유로 쫓겨났다고 해서, 김흥국도 정치적으로 쫓아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미화와 김흥국을 세트로 방송에서 퇴출시키는 '진보와 보수의 공멸론'은 MBC 경영진의 논리였으며, 김미화와 김흥국을 모두 살리는 '진보와 보수의 공생론'은 민주주의 논리였다. MBC 노조가 "방송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라면,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헌법적 상식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MBC 경영진은 국민을 '배부른 돼지'로 만들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MBC에서 퇴출되어야할 대상은 김미화도 김흥국도 노조도 아니고, MBC 경영진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자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의 편이고, 후자는 헌법상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김흥국·김미화·김제동·윤도현·김여진 모두가 누리는 보편적 권리다. 김흥국의 정치참여, 선거참여라는 것도 지난 2008년 총선에서 노회찬 후보를 지지한 박중훈과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위해 방송연설을 한 신해철에 비하면 정말 애교 수준이다. 김흥국은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하러 나선 정몽준 의원을 따라서 선거판에 '기웃거린 수준'이지 않은가. 보편성과 논리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어설픈 편 가르기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더욱이 진보는 아니다.

 

오래전 국회의원에서 떨어진 당시 홍사덕 전 의원이나 노무현 전 의원, 최근에는 장성민 전 의원, 김재원 전 의원 등은 아예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방송에 출연했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방송에서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진행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이 민주당 출신이든 한나라당 출신이든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미국 포르노 잡지 <허슬러> 발행인 래리 플린트는 "나 같은 쓰레기의 권리가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권리는 저절로 보장된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보편적 권리에 대해 진보냐 보수냐는 지나친 좌우 이데올로기 논리로 상대의 자유를 부정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전체주의가 파고든다는 사실은 동서양의 역사가 증명한다. MBC 경영진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MBC 경영진은, 잠재적인 방송진행자나 출연자가 될 모든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겠다는 사규개악을 철회해야 한다. '배고픈 인간 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라고 하는 것은 방송이 할 일이 아니다. 국민의 입을 막음으로써 대중을 어리석게 만드는 우민화 정책은 독재권력의 전유물이다.

 

방송의 본질은 '국민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만들어 권력자의 작은 귀에 전달하는 확성기의 역할'에 있다. 80년대 방송민주화 운동을 통해 한국 언론의 민주화와 사회민주화에 앞장서던 '우리의 MBC'는 어디로 갔는가.

2011.06.30 18:59 ⓒ 2011 OhmyNews
#연예인 방송출연 금지 #표현의 자유 #김흥국 #김미화 #방송 긴급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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