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이 살던 99칸집, 외거노비가 살던 '가랍집'

[양동마을, 독락당, 옥산서원 문화탐방기 2]

등록 2011.07.12 16:46수정 2011.07.1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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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 - 회재의 아우 이언팔의 손자가 살던 집으로 건립 당시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 집이었다고 한다. ⓒ 박태상

▲ 향단 - 회재의 아우 이언팔의 손자가 살던 집으로 건립 당시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 집이었다고 한다. ⓒ 박태상

점심식사 후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5코스인 두곡 코스로 향했다. 거림의 대표적 가옥인 두곡고택은 이식중이 1730년경에 처음 건립했고, 두곡 이조원의 소유가 되어 이후 '두곡고택'이라 불리게 되었다. 넓은 대지를 담장으로 둘러친 후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를 튼ㅁ자형으로 남향으로 배치하고, 안책북쪽에 곳간 채, 그 서쪽에 방앗간 채를 한 채씩 두었다. 안채만 ㄱ자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ㅡ자형이다. 영당은 수졸당 이의잠공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636년경에 지어졌다. 동호정은 두곡고택 동쪽 산등성이 토담 속에 있는 정자로 건너편 안골과 거림 일대가 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다시 개울 건너편에 위치한 3코스인 수졸당 코스의 고개길로 접어들었다. '경산서당'은 물봉골과 안골 사이의 능선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안계리에 있던 것을 1970년 안계댐으로 수몰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육위정은 무첨당 동북쪽 언덕 위 북촌 산등성이에 있다. '수졸당'은 북촌 중앙 산등성이 동쪽 언덕에 있는데 회재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이 1616년에 처음 건립한 것을 뒤에 6세 손 이정계가 증축한 것이다. 정조 때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 이정규도 이 집에서 출생했다. 안채, 사랑채, 대문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동마을의 다른 가옥처럼 튼ㅁ자형 집으로 되어 있다. 수졸당에는 대나무로 입구를 막아놓은 서양식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봄가을에 찾아가면 관람객들이 산책하기에 좋을 것으로 보였다.

 

 흥(興)자 모양의 99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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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당 - 수졸당 이의잠이 1616년에 처음 건립한 가옥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옥마을에 갑자기 서양식 푸른 잔디밭이 있어서 놀랐다. ⓒ 박태상

▲ 수졸당 - 수졸당 이의잠이 1616년에 처음 건립한 가옥으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옥마을에 갑자기 서양식 푸른 잔디밭이 있어서 놀랐다. ⓒ 박태상

양동마을의 마지막 코스인 6코스 향단코스로 향했다.  향단은 회재의 아우 이언괄의 손자인 이의주의 호이다. 향단은 주차장과 마을회관에서 정면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다. 특히 향단은 화려한 지붕구조를 지니고 있어 건축가들이 좋아하는 한옥기와집이다. 향단은 여강 이씨 향단파의 종택으로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인할 때 중종의 명으로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건축한 가옥이다. 지을 당시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 집이었는데, 박공면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미로처럼 짜여진 공간구조는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마침 방문할 때 일본인 관광객들 15명 정도가 가이드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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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 - 안뜰에 서서 보면 형산강과 농민들의 들밭이 한 눈에 조망된다. 관가정이란 말에는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이 커가는 모습을 보다’는 뜻이 담겨 있다 ⓒ 박태상

▲ 관가정 - 안뜰에 서서 보면 형산강과 농민들의 들밭이 한 눈에 조망된다. 관가정이란 말에는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이 커가는 모습을 보다’는 뜻이 담겨 있다 ⓒ 박태상

보물 442호인 관가정(觀稼亭)은 우재 손중돈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해 거주하던 집이다. 관가정 뜰에 서면 형산강과 농민들의 들밭이 한 눈에 조망된다. 관가정이란 말에는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이 커가는 모습을 보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아래쪽에 배치된 가랍집도 잘 보존되어 있다. 평면은 ㄷ자형의 안채에 ㅡ자형의 긴 사랑채와 문간채가 붙어서 ㅁ자에 양 날개가 붙은 속칭 '날개집'이라 부르는 유형이 되었다. 한편 수운정은 조선 선조 15년(1582)경에 우재 손중돈의 증손인 청허재 손엽이 건립한 정자로 '물과 같이 아름답고 구름같이 허무하다(水淸雲虛)'는 구절에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 외곽 서북쪽의 높은 암석 위에 세워져 안락천과 안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수려한 정자이다. 

 

조선조 하층민, 삶이 참 고달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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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랍집 -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집으로 경상도에서는 ‘가랍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그리고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고 불렀다. ⓒ 박태상

▲ 가랍집 -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집으로 경상도에서는 ‘가랍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그리고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고 불렀다. ⓒ 박태상

양동마을의 여섯 코스를 완상한 소감은 애초에 기대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방대하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 북촌의 한옥마을의 양반촌이나 전주의 한옥마을보다 규모도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조 양반 집성촌의 형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특히 2010년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문화를 애호하는 세계인들에게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입소문이 나면, 많은 외국관광객들이 밀려들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작년 말 KTX의 개통으로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교통도 매우 편리해졌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가옥의 외관이나 앉음새에서 양반가옥의 유교적 질서 혹은 신분질서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건물에도 안채와 사랑채의 위계가 지형의 높낮이로 구분되며, 종종걸음으로 관람하다 보면, 종가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자손들의 집이 그 아래에 있는 것 등을 금세 느낄 수 있게 된다. 또 유서 깊은 고택 아래에는 예외 없이 서너 채의 초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랍집'이다.

 

조선조 유교적 질서가 분명한 시절에는 반상의 차이도 엄격했다. 따라서 양반집에서 부리던 사노비들은 대개 대문에 딸린 행랑채에 기거하거나 아니면 문밖에 따로 집을 지어 살았다. 이렇게 따로 살던 노비들을 '외거노비'라고 부르고 그들이 살던 집을 '가랍집'이라 한다. 물론 지역마다 외거노비들의 집의 이름이 각각 달랐다. 경상도에서는 '가랍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그리고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고 불렀다. 조선조 하층민들의 가랍집은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 혹은 마루 한 칸이 전부인 초가집이었다. '가랍집'을 둘러보면서 조선조 하층민들의 삶의 고단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자동차를 타고 양동마을을 벗어나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회재 이언적의 서재인 '독락당'과 회재를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인 '옥산서원'을 찾아갔다.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양동마을로부터 약 10km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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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 ‘자연 속에서 고독을 달래고 홀로 즐긴다’는 뜻이 담겨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중종 27년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해서 지어 살았던 사랑채이다 ⓒ 박태상

▲ 독락당 - ‘자연 속에서 고독을 달래고 홀로 즐긴다’는 뜻이 담겨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중종 27년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해서 지어 살았던 사랑채이다 ⓒ 박태상

보물 제 413호인 독락당(獨樂堂)은 회재가 조선 중종 27년인 1532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사랑채이다. 독락당이란 '자연 속에서 고독을 달래고 홀로 즐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중종 11년인 1516년에 지은 안채에 부가하여 지었으며,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독락당은 낮은 단 위에 세워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성되며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 자(八)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둥근 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이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냇물을 바라보게 하였다. 독특한 구성의 건물구조는 친환경적이라서 건축자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회재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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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의 계정(溪亭) 앞 계류 - 회재가 독락당의 계정에서 자연의 변화를 한눈에 파악한 시원하면서도 환상적인 곳이다. 회재의 사후에 계곡 건너편 700m 거리에 옥산서원이 세워졌다. ⓒ 박태상

▲ 독락당의 계정(溪亭) 앞 계류 - 회재가 독락당의 계정에서 자연의 변화를 한눈에 파악한 시원하면서도 환상적인 곳이다. 회재의 사후에 계곡 건너편 700m 거리에 옥산서원이 세워졌다. ⓒ 박태상

독락당은 은거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안채를 낮게 조성하고 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외부와 단절시켜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사랑채 또한 외부와는 단절된 채 계곡 쪽으로 열려 있어 조선조의 다른 사랑채 구성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경청재(敬淸齎)의 고택은 1601년(선조 34년) 3월 12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 휘준과 휘순 두 형제가 옥산별업을 봉수하기 위해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세운 집이다. 특히 독락당 옆의 계곡의 물은 장맛비로 불어나 있어서 운치가 있었다.

 

회재 이언적은 중종 9년인 1514년에 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랑·장령·밀양부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 독락당을 지어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때 회재의 나이는 마흔 한 살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7년간 독락당에서 기거했다. 1537년 김안로 일가가 몰락한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고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후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추관으로 선비들을 심문하였으나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명종 2년인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한반도 북쪽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

 

회재는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하는 조선 성리학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27세 때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논쟁에 가담하여 주희의 입장에서 양자를 모두 비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선기후(理先氣後)와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이 우위의 견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만년에 유배지에서 <구인록>·<대학장구보유>·<중용구경연의>·<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주희의 견해를 존중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가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을 저술한 것은 주희의 저술인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미완의 저술인 <중용구경연의>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중용의 정신을 국가의 통치원리와 접목시키려는 그의 독창적 입장이 드러나는 저술에 해당된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선생의 학문에 대해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고 칭송했던 것이다.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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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후진교육을 위해 선조 5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명했을 때도 이곳만큼은 제외시켰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5대 서원에 포함되는 성리학의 유명한 교육기관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전해진다. ⓒ 박태상

▲ 옥산서원 -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후진교육을 위해 선조 5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명했을 때도 이곳만큼은 제외시켰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5대 서원에 포함되는 성리학의 유명한 교육기관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전해진다. ⓒ 박태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7에 행정주소지를 둔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선조 5년인 1572년에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이 건립하였다. 양식은 전면에 강학처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강당·사당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소박하면서도 간결하다. 

 

옥산서원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 기숙사인 동재 민구재와 서재 암수재, 무변루, 열각문, 어서각, 장서각인 청분각 등이 있다.  무변루는 외양도 특이하고 현판도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원래 이름은 '납청루'였다고 하는데, '역락문'과 함께 '무변루'라는 누각이름도 소재 노수신( 1515 ~ 1590)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옥산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계류를 끼고 서남향을 하였는데, 전면에 강학공간과 후측에 사담을 둔 소위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 이산해,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등의 명필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옥산서원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고, 무변루라는 현판은 한석봉의 서필이라고 한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예외를 둔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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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무변루 - 무변루는 외양도 특이하고 현판도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데, 그만큼 외부 세속세계와 단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고 전해진다. ⓒ 박태상

▲ 옥산서원 무변루 - 무변루는 외양도 특이하고 현판도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데, 그만큼 외부 세속세계와 단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고 전해진다. ⓒ 박태상

옥산서원 경내에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신도비가 거북의 등 위에 서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호남의 거유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이 신도비는 건립 당시에 옥산서원 앞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하여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 이다. 경주의 옥산서원은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의 소수서원, 대구의 도동서원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교육기관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김유신 장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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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묘 -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여 백제, 고구려를 병합하고 나중에는 야심을 드러내던 당나라까지 몰아내어 신라통일을 이룩한 영웅이다. 그의 묘에는 십이지신상이 보호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태상

▲ 김유신장군묘 -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여 백제, 고구려를 병합하고 나중에는 야심을 드러내던 당나라까지 몰아내어 신라통일을 이룩한 영웅이다. 그의 묘에는 십이지신상이 보호석에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태상

옥산서원을 빠져나와 경주시내 쪽으로 접어들어 마지막으로 김유신 장군묘를 찾아갔다. 김유신 장군묘는 경주 충효동 송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에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여 신라 태종 무열왕 7년인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신라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백제를 병합시키고, 이어 문무왕 8년인 66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다시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마저 물리쳤다. 

 

지름 18m, 높이 5.3m의 능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을 진골 출신인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어 후세를 도모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전설로 통한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골 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김유신은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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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 - 능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으로 용 ? 뱀 ? 원숭이 ? 양 등이 조각되어 있다. ⓒ 박태상

▲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 - 능에는 높이 1.2m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으로 용 ? 뱀 ? 원숭이 ? 양 등이 조각되어 있다. ⓒ 박태상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가야계라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했다. 그러자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김유신은 계략을 꾸며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신경주역으로 달려가면서 기차 시간 때문에 마음은 급했지만, 밀려드는 경주문화의 예술적 가치가 주는 아름다움의 물결로 인해 크게 흥분되었다. 한여름의 장맛비가 더욱 운치있게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 양동마을은 물론 영남 성리학의 기틀을 세운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 옥산서원 등을 탐방하였다. 최근 유럽에 부는 한류 열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찬란한 전통 문화유산이 원형콘 텐츠로서 토대와 기틀을 이루었기 때문에 새로운 현대문화가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양동마을문화탐방 #관가정 #독락당 #옥산서원 #김유신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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