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왜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연금술사를 찾아나서 중남미 여행 2]

등록 2011.07.25 18:18수정 2011.07.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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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파블로 네루다 박물관 ⓒ 파블로 네루다 재단


'사랑'과 '혁명'은 언뜻 보면, 엇갈릴 것 같으나 실은 같이 가는 다정한 친구다. '고독'과 '혁명'은 배신도 모른 채 거머리처럼 지독히도 찐득찐득 달라붙는 동지다.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가 그렇게 살았고,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삶이 그렇다. 사랑과 고독, 혁명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면서, 한편 아프게 한다.

파블로 네루다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의 삶과 칠레 민중의 아픔만큼이나 험난한 여정이었다. 브라질에서 출발해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광활한 대초원이 펼쳐지는 파타고니아 지방을 거쳐 한참을 달려와야 했다. 어떤 때는 종착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꼬박 30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했으며, 마치 통행료를 받아야겠다는 듯 노려보는 안데스 산맥의 삐쭉 솟은 봉우리의 날카로운 눈매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더욱이 나와 중남미 여행을 동행하면서 스페인어 통역을 해줄 것으로 잔뜩 기대했던 산티아고는, 브라질 리우에서 야속하게도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리우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미의 최남단 우슈아이아로 가서, 본격적인 중남미 종단여행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산티아고는 뭐라고 변명을 했는데, 갑자기 설사가 났다나 뭐라나.

산티아고는 어제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시골에서 막 올라온 듯한, 촌티가 나지만 어딘가 매력을 풍기는 <11분>의 마리아처럼 생긴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설픈 변명 뒤에는 항상 사랑이 숨어 있는 법이다.

체 게바라와 김남주, 김수영이 사랑한 시인 네루다

체 게바라는 대학 시절 남미 여행을 하면서 칠레의 땅을 밟았다. 체 게바라는 칠레를 "파블로 네루다의 땅"이라고 했다. 파타고니아 호수 도시인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서 칠레 테무코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젊은 시절 체 게바라가 오토바이를 타고 갔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길'이기도 하다.

네루다는 김남주와 김수영이 사랑한 시인이기도 했다. 나에게 칠레는 "네루다와 아옌데, 그리고 빅토르 하라의 땅"이다. 칠레는, 누군가에게는 와인의 땅,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리의 땅, 사막의 땅, 태평양을 따라 길게 늘어진 땅의 모양을 따서 뱀의 땅일 수도 있다. 세상은 하나지만, 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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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 포스티노> 홍보 표지 ⓒ 할리우드 픽쳐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내가 처음 찾았던 10여 년 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발전된 모습이었다. 한 때 산티아고를 뒤덮었던 피노체트의 그림자와 군홧발소리, 그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던 미국의 유령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광장과 무대에는 대신, 네루다와 아옌데, 빅토르 하라가 다시 살아나 활보하고 있었다. 역사는 그래서 스릴 넘치는 반전드라마며, 흥미진지한 대하드라마다. 억울하게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내는 구원자이자, 신원을 위한 진혼곡 작곡가다.

네루다의 흔적은 박물관이 있는 수도 산티아고와 해안가 발파라이소, 이슬라 네그라의 옛집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나는 산티아고로 오기 전에 버스를 타고, 네루다가 어릴 적 살았던 테무코에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올라왔다. 칠레 땅과, 민중의 마음속에 네루다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산티아고와 태평양 해안가에 있는 발파라이소,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옛집들이 이제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네루다 대신 사랑과 혁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시내 외곽의 언덕에 있는 박물관을 거쳐, "산동네에서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발파라이소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네루다가 묻혀 있는 이슬라 네그라의 박물관에 도착했다. 칠레 민중이 사랑한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네루다는, 마지막 부인 마틸데와 함께 바닷가를 바라보며 조그만 묘지에 잠들어 있었다. 그가 평생을 추구했던 사랑과 혁명도 함께 묻혔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이 바닷가를 스크린삼아 비춰지고 있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원작으로 한 <일 포스티노>는, 칠레 독재정권에 쫓겨 이탈리아의 한 섬으로 망명 갔던 네루다의 삶의 한 조각을 멋지게 그리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네루다가 쓴 <시>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네루다에게 시가 찾아왔고, 그는 평생 시를 통해 사랑과 혁명을 노래했다. 그는 영락없는 '사랑과 혁명'의 시인이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며 사랑을 찬미하면서,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보라, 거리에 흐르는 피를"이라며 혁명을 찬양했다. 그에게 사랑은 오른쪽 가슴이었고, 혁명은 왼쪽 가슴이었다.

"오직 시적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 인도의 철학가 오쇼 라즈니쉬는, 현실의 삶을 즐기면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상적인 새로운 인간형을 '조르바 붓다'라고 했는데, 바로 네루다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네루다야 말로, 육체(몸)와 영혼(마음)이 하나로 통합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니까.

시인의 죽음은 칠레의 죽음이었다. 네루다는 피노체트가 칠레 산티아고를 피로 물들이던, 자신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마저 죽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뒤 12일 만인 73년 9월 23일 숨졌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의 제목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처럼 살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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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파블로 네루다 묘지 ⓒ 파블로 네루다 재단


네루다가 죽어가면서 쓴 '이 밤 가장 슬픈 시'는?

태평양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네루다의 묘지가 흔들리는 듯 보인다. 네루다가 묘지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다. 뭔가 다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는 듯하다. 네루다는 갑자기 "밤하늘은 하늘에서 돌며 노래하는데, 나는 이 밤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고 자신의 시를 중얼거린다.

네루다가 죽어가면서 쓴 "이 밤 가장 슬픈 시"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에 유언처럼 남아 있다. "저들은 또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역사와 민중을 배신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분노로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다. 칠레의 여성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소설 <영혼의 집>에서 그의 삶에 대해 "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던 것처럼,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알았다"고 했다. 탄생의 신비만큼 죽음의 종말도 아름다워야 한다.

사랑을 통해 혁명을 노래했던 시인이 사라지자, 남미 대륙에는 고독을 통해 혁명을 노래한 소설가가 나타났다. 네루다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 체 게바라였다면, 쿠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카스트로와 오랜 우정을 나누는 돈독한 친구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쿠바 혁명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중남미 통신사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칠레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항의해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며, 미국의 중남미 독재정권 지원에 맞서 싸워온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칠레에서 남미 대륙의 맨 꼭대기 콜롬비아 카리브 해로 가는 길은, 안데스 산맥을 몇 번이나 건넜다 넘었다 하는 안데스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삭막하다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을 지나고,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을 달리고, 페루 마추픽추를 올랐다, 에콰도르 오타발루 시장을 거친 뒤에야, 마침내 콜롬비아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로만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올라가다보니,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에콰도르에서 콜롬비아 국경을 넘어가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볼리비아 융가스 지역의 '죽음의 도로'만큼이나 아찔한 절벽이 나타났다. 수백 미터나 되는 절벽의 계곡은 얼마나 굶주렸는지, 버스 차창에 비치는 안데스 산맥의 풍광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한 끼 식사로 꿀꺽 삼키려고 안달이었다. 버스는 그래도 좁은 길에 익숙한 듯 밤새 달렸고, 나는 안데스 계곡의 제물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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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무대가 된 카르타헤나의 '엘 포르탈 데 로스 둘체스' 앞 광장 ⓒ 김성호


지독한 사랑의 도시 카르타헤나

마니잘레스 지역의 친치나 커피농장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왠지 쓸쓸함이 배어 있는 짙은 커피향이 풍겨왔다. 그 다음 콜롬비아 북쪽 끝 카리브 해에 있는 카르타헤나로 가는 길은 고독으로 가는 입구였다. 고풍스런 식민지 도시인 카르타헤나는, 사라져 버린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한때는 번성했던 카르타헤나에는, 집집마다 베란다에 심은 붉은 부겐빌레아가 누군가를 애처롭게 기다리고 있었으며, 얼룩진 벽들에는 아스라한 사랑의 흔적들이 묻어 있고, 거리 곳곳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유령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반나절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카르타헤나의 옛 시가지는, 해적의 약탈을 막기 위해 쌓아 올린 성곽 안에 있었다.

하얀 건물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골목길과 수많은 꽃집들, 카페와 야자수가 그림자를 드리우는 광장, 오래된 성당과 요새들은 사랑과 낭만이 싹트기 좋은 장소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곳을 무대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쓸 만했다. 16세기 광장의 야자수 그늘에서 사랑을 나누고, 우울한 뒷골목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별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가난한 전보배달원인 플로렌티노가, 옛 시가지 건물 사이로 비치는 아리따운 아가씨 페르미나를 멀리서 쳐다보고 있었다. 첫 눈에 반한 첫사랑에 열매가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53년 7개월 11일"이었다. 콜레라가 도시 전체를 휩쓸고 갈 때,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50년, 100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생명이자 운명이었다.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황혼 무렵에서야 결실을 맺는 지순한 첫사랑에서, 나는 왜 지독한 고독을 느꼈을까. 남미에서는 왜 사랑을 하는데 50여년이나 걸리고, 고독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것일까.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결말은 다르지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캐츠비>만큼이나 지독한 첫사랑 이야기다. 

카르타헤나에서의 지독한 사랑에 질려버린 나는, 산타 마르타를 거쳐 카리브 해의 작은 어촌마을인 타강가에서 며칠을 푹 쉬었다. 히피족들이 많이 찾는 타강가는 여행에 지친 배낭여행자와, 사랑을 찾고 사랑에 우는 연인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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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고향인 아라카타카를 가로지는 녹슨 철길 ⓒ 김성호


고독의 마을 마콘도를 찾아가는 길

타강가의 바닷가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나는, 고독의 근원을 찾아 다시 배낭을 챙겼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콘도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태어난 아라카타카로 가는 길은, 소설 속 배경처럼 강을 건너고 예전에는 "식물이 썩은 물로 뒤덮인 한없이 넓은 늪지대"였을 들판을 지난 다음, 바나나 농장이 펼쳐졌다.

아라카타카는 아담한 시골마을이었다. 어느 집 건물 벽에 쓰여 있는 "마콘도"라는 글씨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고향임을 알려주었고,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망고나무에는 파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로는 문명의 이름으로 마콘도 마을의 전통마저 집어삼킨 철길이 녹슨 채, 언젠가 이곳에 소설 속 부엔디아 가문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열차가 다니지 않아 녹슨 저 철길을 따라, 고독의 씨앗이 이 조용한 마콘도 마을에 들어왔다고 상상하니, 철길은 바닷가 산타 마리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인디오의 자유가 죽는 순간, 중남미에는 서구 제국주의의 고독이 탄생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어릴 적 외할아지와 외할머니로부터 환상적인 얘기를 들으며 자랐던 외갓집은 이제 박물관이 되어, 고독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여행자들을 조용히 맞고 있었다. "외조부모의 커다란 집은 환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그의 회상처럼, 이 집에서 살면서 경험했던 부분들이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 어떻게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녹아 있는지, 설명하는 안내판들이 방마다 걸려 있었다. 어떤 안내판에는 그가 어릴 적 "오디세이, 돈키호테, 몬테크리스토백작,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소설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릴 적 책읽기가 그를 위대한 소설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리다,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으며, 영원한 종말을 맞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었다.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찾기 위해 인생을 그토록 많이 낭비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슬퍼"한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녀는 고독 속에서 인간이 되어갔다"고만 말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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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인 아라카타카에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박물관 ⓒ 김성호


안데스 산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고독의 씨앗  

고독은 사랑만큼이나 인간의 삶이 다할 때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동행자인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무좀처럼, 고독은 어둠과 함께 나타나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과학과 논리로 무장된 철인 같은 나도, 밤이면 느닷없이 찾아오는 고독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진다.

고독은 누구에게나 떨쳐버릴 수 없는 불치병과 같은 것이지만, 특히 중남미는 대륙 전체가 하나의 고독의 땅이었다. 중남미를 여행하다 보니,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과 달리 아메리카 대륙은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유령의 섬처럼 다가왔다. 스페인이 1519년 멕시코를 침입하면서 인디오 원주민의 정체성이 사라진 이후, 중남미 대륙은 여전히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500년 전 스페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는 순간, 전염병과 함께 아메리카에는 고독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문명파괴와 인종학살을 저지른 백인 침략자들은 원죄에 시달리고, 영혼을 빼앗긴 인디오 원주민들은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메스티소들은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며 갈 곳을 잃었다. 중남미에서는 모두가 고독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대고 있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콘도 마을은 단지 '100년의 고독'에 시달렸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 침략자들이 뿌린 '500년의 고독'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왕자>의 바오밥 나무가 별을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로 파고들듯, 중남미 고독의 씨앗은 안데스 산맥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중남미는 대륙 깊숙이 고독을 끌어안고 사는, 영혼을 찾아 헤매는 파우스트의 고뇌가 느껴지는 땅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90여일에 걸쳐 중남미의 혁명가, 여성운동가, 문학가, 예술가, 그리고 소설무대와 생태마을 등을 둘러봤다.


덧붙이는 글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90여일에 걸쳐 중남미의 혁명가, 여성운동가, 문학가, 예술가, 그리고 소설무대와 생태마을 등을 둘러봤다.
#파블로 네루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 #이슬라 네그라 #콜레라 시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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