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총 들고 싸운 대통령, 누구랑 참 비교되네

[연금술사를 찾아나선 중남미여행 ③] 아옌데, 체 게바라, 오르테가의 같으면서 다른 점

등록 2011.08.06 14:18수정 2011.08.0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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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는 고독과 혁명의 땅이다. 그 땅은 코엘료와 네루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같은 언어의 연금술사만 낳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낯설지만 수많은 혁명의 연금술사도 탄생시켰다.

스페인 침략자에 맞서 인디오 문명을 지키려했던 투팍 아마루 같은 원주민 혁명가도 있었고, 스페인 종주국에 대항해 중남미 독립을 쟁취한 시몬 볼리바르 같은 해방자도 있었고, 독재정권에 맞서 사회주의를 실천하려던 체 게바라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도 있었다.


유독 중남미 대륙에 이처럼 많은 혁명가들이 탄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중남미 여행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던 오랜 궁금증의 하나였다. 198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이나 해방신학, 해방교육 등은 모두 중남미의 이런 혁명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인물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와 쿠바의 체 게바라, 니카라과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 모두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투사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였지만, 혁명에도 다양한 얼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상은 같았지만, 그들이 보여준 혁명의 방법은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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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시내에 있는 아옌데 박물관 ⓒ 정현진(지니락)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꽤나 걱정했다. 혹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지는 않을까' 해서다. 우산이 없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38년 전의 끔찍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백해야겠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니 사랑고백은 아닐 테고, 하나님께 잘못했다는 원죄나 고해성사의 고백은 애당초 종교와는 거리가 머니 '해당사항 없음'이고, 도둑질은 어릴적 시골에서 수박서리나 닭서리 이후로는 특별한 것이 없으니 범죄고백도 아닐테고. 역사와 관련된 하나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고백이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말만 들으면, 멀쩡했던 나는 순식간에 간질병 환자처럼 온몸을 뒤틀며 까무러친다.


오래전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던 어느 화창한 아침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고 뚱딴지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말 총알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고, 산티아고 시내는 피가 장마처럼 도로를 흠뻑 적셨다. 자다 봉창 두드려도, 현실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정말 끔찍한 현장이었다. 갑자기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다행히 이번에 산티아고를 찾았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고, 칠레 라디오 방송에서도 더 이상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허접한 방송을 하지 않았다. 오래 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잠재되어 있다, 마치 현실처럼 눈의 흰자위 공막을 스크린 삼아 파노라마가 잠시 펼쳐졌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의 장면들이 죽음의 관에서 다시 살아난 좀비처럼 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전두환이 5공 청문회에 끌려나오기 하루 전인 1989년 12월 30일 늦은 밤, KBS는 '토요명화'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방영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를 그린 이 영화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광주보다 7년 앞서, 저 남미 대륙 칠레에 박정희와 전두환을 닮은 피노체트가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제목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바로 73년 9월 11일 산티아고를 인간 도살장으로 으로 만들었던 피노체트 군사쿠데타의 암호였다. 칠레 방송에서 이 암호가 방송되는 것을 시작으로, 쿠데타 세력은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렸다. 역사상 선거에 의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비오는 날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는 음악 방송 진행자가 할 듯한 말인,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잔혹한 학살의 신호라는 것이 믿어지는가. 전두환의 광주 학살 작전명도 이 못지않은 '화려한 휴가'였다. 스페인 침략자 피사로가 페루의 잉카제국을 점령하면서 인디오를 학살할 때의 군사암호는, 스페인의 유명한 순례길 이름을 딴 '산티아고!'였다. 내가 지어낸 얘기라고.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의 99페이지를 읽어봐라.

이 정도면 정말 언어에 대한 희롱을 넘어, 언어에 대한 집단 폭력이다. 역대의 침략자들과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력쟁취를 위해 국민을 넘어 언어까지 학살하고 강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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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다 대통령궁 앞 헌법광장에 있는 아옌데 동상 ⓒ 위키피디아

내가 산티아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인 모네다 궁을 찾았을 때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암호인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비웃기라도 하듯,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모든 꽃들을 다 꺾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네루다 말처럼 산티아고 시내에도, 칠레 민중에도, 칠레의 안데스 산맥에도 자유의 봄이 넘쳐흘렀다.

쿠데타 세력에 맞서 모네다 궁 입구에서 소총을 들고 맞섰던 아옌데는, 이제는 모네다 궁 앞의 헌법광장에 동상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칠레가 가야 할 길, 나는 그 길을 확신한다"는 글귀와 함께 아옌데의 동상은 민주주의 수호신이 되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의 폭력과 죽음 앞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던 아옌데, 자신의 목숨보다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직접 소총을 들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아옌데, 게릴라전이 아닌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려 했던 의회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던 아옌데.

나에게 아옌데에 대한 설명은, 쿠데타 세력에 맞서 소총을 들고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충분하다. 소총은 바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했던 AK47이었다. 체 게바라가 검은 베레모를 쓴 사진이라면, 아옌데는 소총을 든 사진이다. 역사에 어떤 대통령이 쿠데타 세력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운 적이 있던가.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의 총소리에 놀라, 야반도주하듯 수도원으로 도망치는 대한민국 총리 장면의 비겁한 뒷모습을 보라. 아옌데는 칠레 민중과 역사가 영원히 기억하지만, 장면은 아무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역사는 죽음 앞에 선 지도자의 모습을 기록한다.

나는 아옌데 동상을 뒤로 하고,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인권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주 학살의 사진전을 보는 듯한 장면들과 실종자 얼굴, 그리고 유골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칠레 쿠데타와 인권유린을 그린 영화 <칠레전투>와 <미싱>의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인권기념관에 이어 내가 찾은 곳은 아옌데 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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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군에 맞서 모네다 궁에서 소총을 들고 싸우고 있는 아옌데 대통령(가운데 안경쓴 이) ⓒ 살바로드 아옌데 재단


검은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 소총을 든 대통령 아옌데

아옌데 박물관에는 많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국제적 연대를 위해 전 세계 미술가들이 보낸 아옌데의 소장품들이었다. 스페인 화가 후앙 미로와, 가수 존 레논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오노 요코는 설치미술가였다. 괜히 존 레논 때문에 졸지에 자신의 직업을 잃어버리고, 존 레논의 부인이라고 불리다니, 억울하다 오노 요코. 사실 나도 오노 요코가 설치미술가라는 것을 몰랐다. 미안하다 오노 요코. 유명한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항상 좋은 것은 아닌가 보다.

녹슨 녹음기에서 나오는 장엄한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작은 전시실로 갔다. 쿠데타 세력과 싸우던 아옌데가, 칠레 민중들에게 호소한 마지막 방송 내용이 녹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옌데 대통령의 친척인 칠레 여성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소설 <영혼의 집>에서 "대통령은 먼 나라로 망명을 떠나, 야밤 도주하듯 쫓겨난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노닥거리며 여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 잘못 봤소, 배신자들. 민중이 나를 이 자리에 앉힌 이상 나는 죽어서나 이곳을 나갈 것이오"라고, 쿠데타 세력에 결사항전한 아옌데 대통령의 최후를 <영혼의 집>은 이렇게 전한다.

중남미 여행 중에 아옌데를 만나는 방법은 많다. 그의 친구였던 네루다의 박물관에는 아옌데와 네루다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헤밍웨이의 단골술집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에는 1961년 상원의원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아옌데의 사인이 걸려 있었다.

체 게바라는 아옌데에 대해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동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둘은 모두 의사 출신이다. 아마도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체 게바라가 총살당하지 않았다면, 1973년 9월 피노체트 군사쿠데타로부터 아옌데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고 달려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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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에 있는 내무부 건물에 걸린 체 게바라 조형물 ⓒ 김성호


여행과 혁명, 체 게바라를 만든 길

내가 걸어간 남미 종단여행 길은 대부분, 게바라가 60여 년 전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했던 길과 겹친다. 게바라는 여행을 통해 혁명가가 되었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서도 여행을 통해 변해가는 게바라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는 자신의 여행기 <라틴여행 일기>에서 "적어도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참다운 아메리카 대륙을 헤매며 겪었던 모든 것들은 나를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직접 눈으로 보았던 남미 현실에 대한 분노가, 게바라를 열정적인 혁명가로 이끌었다는 고백이다.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이나, <체 게바라 자서전>에는 체 게바라가 편안한 의사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온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의사의 길을 가는 것은) 내 속에서 싸우는 두 명의 나, 사회개혁가와 여행자 모두를 배신하는 끔찍한 일"이라고 썼다. 게바라는 이미 혁명가와 여행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숨진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그를 만나려던 애초 나의 계획은 어긋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우기였기 때문에, 그가 숨진 바예그란데로 가는 버스가 수크레라는 도시에서부터 끊어져버렸다. 나는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을 여행한 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인 포토시를 거쳐 수크레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야 했다.

내가 수크레에 도착한 날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빗속에 갇힌 외로운 여행자의 신세가 되었다. 인디오의 아픔이 구름이 되었다가 내리듯, 굵은 비는 붉은 색을 띤 채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몹시 피곤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체 게바라와의 만남을 뒤로 물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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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산타클라라에 있는 체 게바라 기념관 위의 동상 ⓒ 김성호


상품이 된 체 게바라, 순수한 체 게바라

체 게바라를 만난 것은 남미 여행의 끝인 베네수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자메이카를 거쳐 쿠바 아바나에 도착해서다. 볼리비아 수크레에서 돌아서야 했던 날로부터 한 달이 흐른 뒤다.

쿠바는 어디서나 게바라를 만날 수 있었다. 수도 아바나의 혁명박물관에서도, 혁명광장에서도, 길거리 곳곳에 새긴 그림에서도, 쿠바의 화폐에서도, 심지어 티셔츠 등 관광상품에서도. 쿠바 최고의 관광상품은 낮에는 체 게바라요, 밤에는 음악과 춤이었다.

아바나보다 게바라를 더 잘 만날 수 있는 곳은, 오히려 지방도시인 트리니다드와 산타클라라였다. 웬일인지 아바나에서 만나는 게바라는, 카스트로 체제의 정권유지를 위해 너무 정치화·선전화되어 있고 관광상품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바나의 체 게바라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체제의 마네킹 같았다.

내가 '진짜' 체 게바라를 만난 것은 살사의 고향인 트리니다드의 한 카페에서였다. 5인조 남녀혼성 밴드가 카페에서 부르는 <영원하라, 체 게바라여>라는 노래는, 아바나에서 봤던 그 어떤 조형물이나 사진보다 나의 가슴을 흠뻑 적셨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찾고자 했던 순수한 게바라가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신은 봄의 태양과 함께 바람을 불사르러 오셨지요. 당신의 빛나는 미소로 혁명의 깃발을 땅에 꽂았지요"라는 구슬프면서도 웅장한 노래에는, 때 묻지 않은 게바라가 있었다.

체 게바라를 찾는 나의 여정은 산타클라라로 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쿠바 혁명과정에서 체 게바라가 사령관으로 혁명의 결정적 승기를 잡는 전투를 이끌었던 산타클라라에는, 그의 기념관과 무덤이 있다. 체 게바라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산타클라라 작은 언덕에 자리 잡은 체 게바라 기념관에 다가갔다. 검은 베레모에 총을 든 체 게바라의 동상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기념비에는 그가 볼리비아로 게릴라전을 떠나면서 카스트로에게 남긴 편지에 나오는,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희망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념관 아래 무덤에,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함께 숨진 게릴라들과 함께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쿠바의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장관의 권력을 버리고, 볼리비아 산악지대로 달려갔던 그는 이제 한 줌의 재로 돌아와, 동상으로 솟아올랐다. 진정한 혁명가가 원하는 것은 사회 변혁이지, 권력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온 몸으로 실천했다. 그래서 체 게바라는 무덤 안의 '꺼지지 않는 불'처럼, 역사와 민중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 게바라의 이 말은 쿠바를 뛰어넘어 중남미 전역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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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에서 온두라스로 가는 국경에 있는 오르테가 사진 간판 ⓒ 김성호


오뚝이 혁명가 다니엘 오르테가를 아시나요

한번 잡은 권력을 놓기는 쉽지 않다. 게릴라 혁명을 통해 잡은 권력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중남미에는 그런 혁명가도 있다. 니카라과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다. 그는 체 게바라처럼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아옌데처럼 민주적 절차를 통한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한 인물이다.

나는 쿠바를 떠나 파나마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멕시코로 가는 중미 종단의 길에 나섰다. 도중에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에서 하루를 묵었다. 니카라과는 이제 내전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치안은 생각보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 니카라과 대통령인 오르테가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NL)'를 이끌며 게릴라전을 통해 친미독재정권인 소모사 정권을 붕괴시킨 뒤, 지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1990년 선거에서 패배하자 깨끗이 물러났고, 1996년과 2001년에도 연거푸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는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결코 총을 들지 않았다.

무려 16년이 흐른 지난 2006년에서야,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오르테가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 선거에서 패배하자, 깨끗이 권력을 놓은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게릴라전으로 권력은 잡은 사회주의혁명가가, 어디 제대로 된 선거를 치룬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니카라과를 떠나 온두라스로 넘어가는 국경에는, 오르테가 대통령 사진과 함께 "기독교, 사회주의, 연대"라는 구호가 쓰인 간판이 보였다.

아옌데, 체 게바라, 오르테가는 모두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도 싸웠다. 중남미 우익 독재정권의 뒤에는 늘 제국주의 얼굴을 한 미국이 있었다. 500여 년 전 스페인 제국주의의 침략 이후, 중남미에 혁명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땅에 유독 역사의 반동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은 역사의 반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스페인 침략자들은 중남미 대륙에서 인디오 원주민을 탄압하고, 미국은 중남미를 탄압하고, 독재정권은 인민을 탄압했다. 중남미의 역사는 마치 '개가 제 꼬리를 무는 듯한' 치밀한 구조를 자랑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처럼, '반동과 혁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절망과 희망의 연속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90여일에 걸쳐 중남미의 혁명가, 여성운동가, 문학가, 예술가, 그리고 소설무대와 생태마을 등을 둘러봤다.


덧붙이는 글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90여일에 걸쳐 중남미의 혁명가, 여성운동가, 문학가, 예술가, 그리고 소설무대와 생태마을 등을 둘러봤다.
#중남미 #아옌데 #체 게바라 #오르테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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