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의 현장.
박상규
진실위 집단희생조사국에서 다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중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한국전쟁 기간 미군의 폭격, 포격, 총격 등으로 희생된 사건으로, 사건의 경위나 정의는 다른 유형에 비해 상당히 간단했다.
특히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사건 폭로와 이어진 한국과 미국 정부의 공동조사,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유감표명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군 관련 희생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상당히 높아진 편이었다. 그러나 가해자가 한국군이나 경찰이 아닌 미군이라는 점과 전시에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진실위 기본법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규명 과정은 지극히 험난했다.
기본법 상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속한다.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논의되던 당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에 의한 희생사건을 다룰지가 논쟁이 되기도 했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견해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를 절충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건 관련 논쟁은 묻히고 말았다. 이후 기본법에서 가해주체의 '국적'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아 미군 관련 희생사건도 조사대상에 포함됐고 520여 건의 신청도 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위는 미군 관련 희생사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진실위는 행정안전부 산하 권고처리기획단을 통해 한국 정부 및 관련 기관에 권고할 수 있을 뿐, 미국에 직접적으로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때문에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거나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다. 실제로 진실위는 한국 외교부에 미국의 사과와 책임 규명 등을 미국 측과 협상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진실위 임기 5년 동안 외교부의 공식 입장은 "미국과 협상할 계획이 없다"였다. 진실위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미군 관련 희생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를 비롯한 외부의 부정적인, 혹은 소극적인 입장은 위원회 내의 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모든 과거사위원회의 통폐합 혹은 폐지를 말했을 정도로 과거사위원회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위원회는 이른바 사회적으로 '반미위원회'로 낙인찍힐 것을 우려해 조심스러워하던 태도에서 아예 노골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미군 관련 희생사건의 피해자들이 진실위에서 진실 규명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조건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조사관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조건들을 '잘 죽는 법'이라 부르곤 했다. 아래는 그 '잘 죽는 법'을 정리한 것이다.
[잘 죽는 법①] 인민군 점령지나 전선은 피할 것불행히도 이것은 미군 관련 희생사건이 진실규명 판정을 받기 위한 제1조건인 동시에 대부분의 사건이 충족시킬 수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진실위에 신청된 미군 관련 희생사건 520여 건을 사건 발생 일자, 사건 발생 장소, 공격 유형(폭격, 지상군, 함포 등)으로 유형화(예를 들어 1950년 8월 20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남산벌판에서 발생한 폭격 사건을 한 개의 사건으로 유형화)하면 총 172건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 1950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9·28 수복을 전후한 시기까지(총 142건) 및 1951년 1·4후퇴 전후의 시기(24건) 등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 총 166건으로 무려 96.5%에 달한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도와 함께 싸우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이 전투가 없는 곳에, 그리고 인민군이 없는 곳에 있을 이유도, 그곳에서 폭격이나 포격, 총격과 같은 전투 행위를 벌일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전쟁 발발 초기, 그리고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한 번 인민군에 밀릴 때, 전선이 너무도 급박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 및 미군은 주민들을 제대로 소개하거나 피난시키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정부나 군, 경찰의 소개 조치가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전황이나 인민군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다(이는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가 라디오를 통해 계속 국군이 승전을 거듭하며 북진하고 있다고 거짓 전황을 전했던 때문도 크다).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바로 옆 마을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집에서 뛰쳐나왔지만 그때는 이미 인민군이나 국군, 미군이 모든 도로를 다 막고 있었다고 신청인들은 말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9·28 수복 전후까지 발생한 미군 관련 희생사건 142건 중 98건이 경상도(경남 68건, 경북 30건)에서 발생했다. 이는 당시 한국군과 미군이 최후의 보루로 삼은 낙동강 방어전선 전투가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반도의 동남쪽 끝인 이 지역 주민들로서는 더 이상 어딘가로 피난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전혀 없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이러한 사정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민군에 동조해 도우려던 게 아니었다면 전선에 민간인들이 왜 남아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어느 날 밤 경찰과 군이 주민들 몰래 배를 타고 빠져나가 버린 후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한반도 땅끝,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 한 도망갈 곳도 없이 마을에 남겨진 경남 사천시 주민들에게는 인민군 점령지에 있었으니 그 지역을 폭격한 것은 정당한 군사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전선에, 전투 지역에, 인민군 점령지에 있었으니 그곳에 있다가 미군의 폭격이나 총격,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더라도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정당한' 군사 작전이었기 때문에 '불법적이지' 않은 것이었고, 따라서 진실규명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유 불문, 진실규명이 될 수 있도록 '잘 죽기 위해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물고기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인민군에 점령된 지역에 머물러 있다가 죽어서는 안 됐다. 어느 날 새벽 어딘가에서 총소리, 대포소리가 들리면, 차량으로 하루에 수십, 수백 km를 이동하는 전선보다 더 빠르게 뛰어서 전선에서 도망쳐 나간 후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최소한 국가라면, 정부라면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져야 하고, 자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지 아닐까? 아니, 국가의 존폐 자체가 위기에 처했는데, 국군과 경찰도 자기 몸 하나 피하기도 바빴는데, 그런 상황에서 민간인 소개 및 피난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고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단다. 나라 없는 국민은 있어도 국민 없는 나라는 없을진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잘 죽는 방법②] 두 눈 부릅뜨고 가해자의 소속 부대를 확인할 것급박하고 정당한 군사적 필요도 없고, 인민군 점령지도 아니며, 전선에서도 떨어져 있고, 인민군이 주변에 있지도 않은, 그런 있을 법하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미친 듯이 폭탄과 기관총이 떨어지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대포가 쿵쿵 때려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주변에서 어머니가 아버지가, 여동생과 남동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핏속에 스러지더라도, 나의 팔다리에도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두 눈 부릅뜨고 나에게 폭격을 쏟아붓는 저 전폭기가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인지, 저 탱크는, 저 박격포는, 저 총구는 누구의 것인지 보고 기억해야 한다. 공군인지, 해군인지, 해병인지, 육군인지는 물론이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죽인 병사를 붙잡고 관등성명이라도 물어라.
당신을 죽인 군인이, 탱크가, 박격포가, 그리고 전폭기가 어느 나라의 어느 부대의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다면, 아무리 당시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전폭기 외에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아무리 미군이 그런 거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른바 '가해자 불명'으로 진실규명 불능이 될 테니 말이다. 아, 물론 이 모든 것은 가해 부대에 대해 당신이 기억하는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미군의 임무보고서나 작전일지와 같은 문서가 확보되고 그 내용을 위원회에서 믿어줄 경우에만 해당된다.
[잘 죽는 방법③] 가해부대가 '민간인 공격'을 기록할 것 가해 부대를 알아냈다면, 다음은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심적인 가해 부대의 누군가가 임무보고서나 작전일지에 "민간인임을 알고도, 민간인을 겨냥해서 공격했다"라고 기록해 주기를, 정말 무릎 꿇고 간절히 빌어야 한다.
그러한 기록이 없다면, 의롭고 선한 우리의 동맹국 미국은 당연히 자신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인민군, 적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설사 미군이 가지고 있던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고 그곳에는 민간인들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몰라서 그랬을 뿐, 고의로 민간인을 죽인 것이 아니기에 불법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간구하고 또 간구하라. "민간인임을 알고도, 민간인을 겨냥해서 공격"할 정도로 전쟁의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던 누군가가 기록을 남기려고 자리에 앉은 그 순간, 돌연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글로써 고해성사를 남기기를. 혹은 너무나도 전쟁 수행에 충실했기에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자랑스럽게 기록하기를.
1950년 9월 1일 경북 포항 환여동 해변에 피난하고 있던 피난민들에게 미 구축함 헤이븐호(De Haven)가 함포 사격을 가해 수많은 피난민이 희생됐다. 당시 헤이븐호의 전투일지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