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라 안 된다고? 그럼 우리끼리 하지 뭐

[탐방] 서울 성북구 마을기업 1호, '동네국수'에 가다

등록 2011.08.15 17:24수정 2011.08.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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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20대 젊은이들은 대학 졸업은 기본, 대학원까지 거쳐야 살그머니 구직 용기를 내는 형편이다. 하물며 30대 40대 경력 단절 여성들은 어떠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아이가 이제 겨우 엄마 품에서 조금씩 떨어지니 재취업하려는 여성이 내 주위만 해도 나를 포함해 대여섯은 넘는다.

누군가 파트타임 일자리라도 얻을라치면 남는 자리 없는지 캐묻는 눈길이 사뭇 열정적이다. 본인이 하던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순 직종이라도 괜찮은 눈치다. 젊은이들도 갈 곳 없는 판국에 살림하는 엄마들을 반기는 데가 있을 턱이 없어 내 주위 아줌마 구직자들은 한숨만 쉴 뿐이다.

높은 자리 권력자들이 말만 앞세우고 어쩌지 못하는 일자리를 애 키우던 엄마들이 속 태우다 못해 직접 만들어버린 곳이 있다. 서울 한성대입구역에서 멀지 않은 동서문로4가에 있는 '동네국수'다. 서울 성북구 엄마들의 마을기업이다.

마을기업이란?
행정안전부가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책. 지역공동체에 산재한 각종 특화자원(향토·문화·자연자원 등)을 활용, 주민 주도의 비즈니스를 통해 안정적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 단위의 기업을 마을기업이라 한다.

올해 6월경 성북구에서 마을기업을 공모한다기에 성북지역 '우리동네'모임 엄마들이 고심끝에 응모했는데 고민의 깊이를 알아줬는지 덜컥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성북나눔연대 시민단체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게 큰 힘이 되었고 나눔연대와 '우리동네' 모임 엄마들은 수많은 회의를 거쳐 업종을 선택하고 가게 인테리어, 차입금 마련 방안까지 모든 것을 같이 준비했다. 마을기업이란 말이 생소하다면 국가에서 일부 지원을 해주고 동네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업체를 차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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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국수에 온 손님들 ⓒ 한진숙


국수 한 그릇 3천 원...이래서야 수익이 날까

동네국수를 찾아간 날, 태풍이 남부지방부터 훑고 올라와 바람이 제법 불어댔다. 비 오는 날이라 손님이 뜸하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아담하고 깔끔한 외관에 호감이 갔는데 국수 맛도 좋았다. 국숫집 뒤편에 사는 정병기, 김유진 부부도 아이를 데리고 와서 국수와 주먹밥을 시켜먹고 있었다.


"저번 주 개업할 때 지나가다 들러서 먹었는데 맛있어서 이번 주에 또 왔어요."

어른 둘과 아이가 국수 두 그릇과 주먹밥을 양껏 먹었는데 낸 돈은 만 원도 되지 않는다. 큰 그릇에 담긴 국수가 한 그릇에 3천 원, 주먹밥이 1200원이다. 맛있고 양도 많으니 먹는 사람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이래서야 수익이 날까.

"수익 많이 내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동네 사람들 일자리를 만들고 수익이 좀 나면 경로당에 반찬도 해다 드리려고요."

'우리동네' 모임 대표이자 '동네국수'대표인 하영미(36)씨는 이제 두 돌 지난 아이 엄마다. 같이 교육품앗이 좀 해보려고 엄마들이 모임을 만들었건만 하소연으로 시작해 수다로 마감하는 모임이 매번 아쉬웠단다.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마을기업 공모한다기에 한번 해보자고 달려든거지요."

결정은 쉬웠을지라도 공모 준비는 허투루 할 것이 아니었다. 사업계획서를 준비하자면 사업 아이디어와 실행계획을 꼼꼼히 준비해야 했다. 성북나눔연대의 전폭적인 도움 없이는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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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국수를 먹고 있는 정병기, 김유진씨 부부 ⓒ 한진숙


가게 벽에 걸린 '국수 먹는 남자' 그림

"이게 될까?"

전택기 성북나눔연대 대표가 마을기업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었다. 구청 지원을 받아 전문컨설팅까지 받았지만 마음속에 항상 무거운 고민이 있었다. 무엇보다 힘겨운 것은 자본. 성북구에서 약 4천 7백여만 원을 지원해준다지만 1년 동안의 인건비와 설비비가 다 포함된 금액이라 개업에 필요한 비용은 차입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우리 동네' 모임 회원들이 십시일반 출자금을 모았지만 여력이 채 못 미쳐 보증금 2천만 원은 전 대표가 차입해 이자를 갚아나가고 있고 인테리어, 집기 마련은 최소화해야 했다.

인테리어는 동네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부탁드렸는데 의미를 알아주시고 긴 탁자를 무료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뜻을 세우니 길이 생기는 식이다. 메뉴판은 동네 미술지망생에게 부탁해 산뜻하게 완성했고 가게 벽면에 걸린 '국수먹는 남자' 그림은 또 다른 미술학도의 작품이다. 그 미술지망생 중 한 명은 파트타임으로 홀서빙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내게 맛난 비빔국수를 추천한 총각이다. 능력도 알아봐주고 일할 곳도 생겼으니 그 총각은 일할 맛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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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국수 벽에 걸려 있는 '국수 먹는 남자' 그림. 마을에 사는 미술학도의 재능기부를 통해 마련됐다. ⓒ 한진숙


마을 어르신들 고용하고 주말에는 경로당 봉사할 것

전 대표가 자금을 고민하는 사이 하영미 우리동네 대표는 그 사이 국수 맛나게 만들기 노하우를 물색하고 다녔다. 동네에서 음식솜씨 알아주는 강순옥(47)씨를 주방장으로 모시고 의정부의 마을기업인 '행복한 국수'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국숫집 운영 방식을 배워왔다.

마침내 탄생한 국수 비빔장은 설탕을 전혀 쓰지 않고도 달콤하고 은근한 맛이 나는 '동네국수'의 비법이 되었다. 매실액을 사용하고 3주 동안 숙성한다는 것만 살짝 알려줄 뿐 주방장만 아는 비밀이란다. 주방장과 부주방장을 고용하고 하영미씨는 관리직을 맡아 동네국수의 살림을 책임진다. 본래 홀서빙을 파트타임으로 운영해 동네 엄마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자 했으나 딸린 아이들 때문에 여의치 않아 지금은 동네 젊은이들이 파트타임을 맡고 있다.

"9월부터는 마을 어르신들을 파트타임으로 3~4시간씩 일할 수 있도록 할 작정입니다. 또 경로당에 반찬 해다 드리는 것도 시작하고요. 동네국수에 고용된 분들이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휴일까지 경로당 가서 일하는 게 조금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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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국수 일꾼들. 오른쪽부터 두 번째가 전택기 성북나눔연대 대표, 네 번째 여자분은 하영미 우리동네대표. 왼쪽 끝은 주방장님. ⓒ 한진숙


도심 속 마을,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좁히기는 마을기업의 화두. 주방장만해도 육수준비를 하느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종일 일하는데 1주일 한 번 있는 휴일까지 반납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뜻을 모으지 못하면 흔쾌히 일하기 어렵다. 원재료비를 절약해 수익을 꾸준히 내는 것도 힘써야 할 일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다 살림하는 주부들이어서 새벽시장가서 싼값에 대량으로 구입해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 음식재료를 국산으로 고집하고 있고 그나마 어느 정도 신뢰도가 있는 곳에서 납품을 받으려다 보니 식재료 값 아끼기는 힘들 것 같다. 앞으로 동네국수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넘어야 할 고비가 많겠지만 전택기 성북나눔연대대표는 동네국수가 동네 사람들의 소통공간이 되는 꿈을 꾸며 어려운 순간을 이겨낼 작정이다.

"갈 곳 없는 지역의 일꾼들이 꾸준히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국수 한 그릇 먹으면서 동네사람들이 모여앉아 마을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고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지 않을까요."

집 찾아, 일자리 찾아 떠도는 도시 소시민들은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 동네에 필요한 것을 만들고 그 곳이 내 일자리가 된다면 도심 속 마을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마을기업이 그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자금압박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만큼만 마을기업 지원금을 대폭 끌어올리는 것은 어떨까. 서울시가 배짱 두둑하게 무상급식 주민투표 예산으로 쏟아붓는 182억 원을 이런 사업에 절반만 돌려도 가능하지 싶다.
#일자리 #마을기업 #동네국수 #마을기업지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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