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35)

키스마크와 비너스

등록 2011.08.16 14:54수정 2011.08.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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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크면 마음도 조숙한 걸까요.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 중에는 '좀 논다'는 표현을 썼던 아이들 몇몇이 있었는데 광연이도 그 중 한 아이였습니다. 광연이는 부잣집 딸이었고 엄마는 학교에서 학부모 임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연이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저녁이면 교복 대신 옷을 사복으로 갈아 입고 나이트클럽을 드나든다는 얘기가 뒷자리의 아이들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연이는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루는 뒷자리의 아이들과 함께 광연이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집이었습니다. 정원에는 눈이 안보일 정도로 긴털로 뒤덮인 개가 뛰어놀고 있었고 대문에서 몇 계단을 올라가야 정원이 나왔습니다.


당시 라면 한 그릇이 100원인가 했었는데 점심도시락도 못 싸다니는 나는 학교가 끝날 무렵이면 언제나 배가 고파 허덕였지만 그 라면 한 그릇을 사먹지 못했습니다. 엄마의 병이 갈수록 깊어져 내 도시락을 싸줄 생각도 못했고 나 역시 늦잠 자는 버릇이 있어 밥을 해서 도시락을 싸올 생각을 못해 아예 굶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오빠가 군대에 간 사이 언니 벌이만으로는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빚이 좀 많은 상태여서 나는 용돈을 타고 싶어도 차비외에는 용돈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친구들한테 라면 한 그릇을 얻어 먹으면 노란 단무지까지 너무도 맛있었는데 라면 한 그릇도 못 사먹는 내 처지와 광연이의 처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나는 여기서도 주눅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왜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는 이렇게 자주 주눅이 들었을까요. 광연이네서는 유리잔에 담겨져 나온 보리차까지 고급스럽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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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마크와 비너스 ⓒ 장다혜


이런 광연이에게 하루는 벼락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등교를 하자 광연이가 교무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난리가 난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날 광연이는 교복 속에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고 목덜미에는 키스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걸 선생님께 들킨 것입니다.

"광연이 아마 퇴학 당할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니. 우리 나이가 몇 살이라구."

아이들 입에서는 저마다의 생각들을 주고 받으며 광연이가 어떻게 될까 모두들 궁굼해 했지만 예상은 빚나갔습니다. 광연이는 그날 교무실을 들락거린 것 외에는 퇴학도 정학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광연이 엄마가 다녀가고 아마 부잣집 딸에다 엄마가 임원이라 담임하고 얘기를 해서 일을 유야무야 시킨 모양이었습니다.


광연이는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태연하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너 괜찮아?"
"그냥 뭐...하지만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니?"
"아이들이야 뭐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겠지."

아이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이 된다면서도 태연하게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 광연이가 웃기게도 느껴졌고 낙천적인 성격이, 냉큼 학교로 찾아와서 일을 정리하고 가는 능력 있는 엄마가 있는 것도 부러웠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우린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중학교 때는 수학여행을 못갔지만 고등학교 즈음에는 오빠도 군대에서 나와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수학여행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몇 층에 잠을 잤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우~ 몰려가는 걸 보고 나도 따라서 나갔습니다. 광연이는 옥상에 가까운 윗층에 잠자리가 배정되어 있었는데 그 복도에서 춤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선생님들이 모두 잠이 든 시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비너스'란 곡을 크게 틀어놓고 머리를 흔들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광연이의 몸짓은 거의 광란에 가까웠지만 춤솜씨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멋졌습니다. 머리를 흔들면 찰랑찰랑한 단발머리가 홱 돌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손과 발, 몸이 다 각기 움직이는 것처럼 광연이는 춤을 추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며 광연이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습니다.

춘향이도 열 여섯 살에 연애를 했다는데 당시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십대였고 무엇이든 하고 싶고 무엇이든 반항하고 무엇이든 고민하던 나이였습니다. 광연이 역시 십대를 춤으로 키스로 연애를 하며 보내고 있었고 나는 나만의 고민에 빠져 한마디의 말도 잘 하지 않는 나만의 방식으로 십대 시절을 유린하며 살았습니다.

유아기를 보냈지만 유아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지 않은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지나가버린 과거 역시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 역시 알 수 없는 미래처럼 과거의 기억은 아득합니다. 이미 지나가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과거는 오지 않은 미래와 같습니다. 어른이 된 내가, 그렇게 십대시절을 괴로움과 번민으로 지새웠으면서도 지금은 십대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라는 것은 망각의 강을 건너가는 과정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덧붙이는 글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키스마크와 비너스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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