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하버드'에 약간 밀린다는 느낌 들어요"

[아들 셋과 초저가 북미대륙 횡단여행⑭] '미국의 영혼'이라는 보스턴

등록 2011.08.22 13:03수정 2011.08.2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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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남부 힝엄 근처의 야영장. 지금까지 미국에서 다녀 본 30여군데의 캠핑장 가운데 최고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이 싱그런 연두색처럼 느껴졌다. ⓒ 김창엽


"보이지, 내가 말한 대로지."

보스턴 남동쪽의 숲 속 야영장은 눈부신 아침으로 우리를 맞았다. 전날 저녁 괴한의 기습을 우려할 정도로 잔뜩 경계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전날 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약간 뻐기면서 "나무가 우거진 미국 동부의 교외 숲 지대는 정말 좋다. 그런 지역은 땅값, 집값이 비싸고 중산층들이 주로 몰려 산다"고 했던 말을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전날 밤 비가 내리던 가운데 스산하기 짝이 없었던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해 과거 경험을 살려 한말이었는데, 힝엄(Hingham)이라는 소도시 인근의 이 야영장은 실제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내가 미국에서 다녀 본 서른 곳 안팎의 야영장 가운데 단연 최고였다.

키 큰 아름드리 나무들은 마치 팔을 벌리듯 서로 가지를 뻗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작은 가지들 사이로 비 갠 아침의 햇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이 마치 싱그러운 연두색처럼 느껴졌다. 바닷가가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인지 공기 또한 상큼했다. 신선함의 종결자가 있다면, 이 곳을 빼놓아선 안될 것이다.

매사추세츠 주는 주립공원을 관리를 야생 보존국에서 겸하고 있었는데, 그런 정책 의지가 그대로 이 야영장에서 묻어났다. 세수와 칫솔질을 겸해 세면장으로 향하는데, 대략 캠핑 사이트 15군데에 1군데 꼴로 텐트가 세워져 있었다. 전날 밤 그 넓은 야영장에서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우리만 외롭게, 비에 젖은 불쌍한 늑대들처럼 홀로 밤을 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다.

'아들 셋'은 이중삼중으로 유쾌해 보였다. 날씨가 맑은데다, 전날 밤 인상과는 달리 야영장은 무척 신선하고 쾌적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랄까, 일종의 극적 반전으로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시 체질인 그들로써는 여행을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처음 나서는 도시 탐방의 날이었다. 동시에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자동차 상태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조마조마하고 걸쩍지근한 느낌이었을 터인데, 일단 대륙횡단에 성공했다는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지도층 배출하는 '공장'이 있는 매사추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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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을 포함하는 매사추세츠 주의 차량 번호판에는 흔히 '미국의 영혼'(The Spirit of America)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실제 보스턴 일대는 미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곳이며, 현재도 미국의 인재를 길러내는 공장이기도 하다. ⓒ 매사추세츠 주 차량국


보스턴은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인 해안도시이다. 그러면서 유럽계 백인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살아있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또 세계 최고의 명문이라는 하버드와 MIT를 끼고 있기도 하다. 태평양과 마주한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대서양과 접해 있는 동북부의 보스턴까지 5000km가 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을 일단락했다는 점에서는 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미국의 영혼(The Spirit of America)이라고?"

아침을 내가 급조한 '스크램블드 에그 앤드 소시지'로 먹고, 보스턴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들이 옆으로 지나치는 자동차들의 번호판에 쓰여진 문구에 흥미를 나타냈다. 미국의 각 주 자동차 번호판에는 해당 주를 상징하는 문구가 거의 예외 없이 박혀 있다. 보스턴이 속해 있는 매사추세츠 주는, 예의 '미국의 영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운다. 이 문구에 대한 '아들 셋'의 반응은 약간은 깔보는 듯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배어있는 것이기도 했다. 코웃음 치는 듯한 반응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영혼이라는 단어를 끌어다 쓰느냐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매사추세츠 주는 내 시각으로 보면 미국의 영혼이 맞다. 다만 그 영혼이 바람직한 것인지, 어떤지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영국계 백인들이 오늘날 매사추세츠 주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이른바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게 된 것은 사실(史實)이다. 영국을 상대로 한 미국 독립전쟁의 불꽃을 지핀 곳 또한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매사추세츠 주이다. 그러나 이런 연대기적 사실 만으로는 '미국의 영혼' 혹은 '미국 정신'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순 없다.

매사추세츠 주가 미국의 영혼인 것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지도층을 배출하는 '공장'이 바로 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와 MIT 등으로 상징되는 대학들이 바로 그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자동차로 한 두 시간에 거리에 있는 예일, 브라운, 다트머스 등의 대학도 비록 주는 다르지만 한 묶음으로 볼 수 있는 공장들에 다름 아니다. 이 공장에서 제조돼 나온 '물건'들이 미국의 정치와 경제, 외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건 현실이다. 세계 3번째로 큰 영토, 그리고 그 땅에 발을 딛고 사는 3억 인구 가운데서 선발된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이 공장으로 들어와 물건이 돼서 미국 곳곳으로 다시 퍼져 나간다. 미국의 공과, 흥망과 성쇠, 선과 악의 핵심을 가장 짧은 시간에 들여다 보려면, 그래서 바로 이 곳을 봐야 한다. 그러니 매사추세츠가 미국의 영혼으로 상징되는 것은 백 번 맞는 말이다.

미국이 몰락한다면 하버드로 상징되는 대학에 책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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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이공계 명문대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본관. MIT와 하버드는 후문을 통하면 걸어서 갈 정도로 서로 가깝다. '아들 셋'은 한국의 세칭 명문대에는 기죽을 일이 없지만 하버드와 MIT의 대학생들에게는 좀 밀리는 느낌이 있다고 털어놨다. ⓒ 김창엽


"솔직히 하버드 세 글자 보면 약간 밀린다는 느낌 들어요. 하버드 학생들은 공부나 운동, 음악, 토론 뭐 가릴 것 없이 굉장히 훈련이 잘되고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윤의가 자존심 상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내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선일이도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고 털어놨다. 병모는 윤의와 선일이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짐작하건대 도전하고 겨뤄볼 만한 상대들이 아니냐는 거 같았다. 아들 셋은 요컨대, 자신들도 대학생이지만 이른바 한국의 세칭 '명문대' 학생들에게는 눌린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하버드는 솔직히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과거 MIT에서 잠깐 수학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글쎄, 하버드 대학생들이 어쨌든 대단한 경쟁을 뚫은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너희들이 꼭 밀린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미국을 내리막 길에 접어든 제국으로 보거든. 미국이 서서히 몰락한다면 그 책임 또한 많은 부분이 하버드로 상징되는 대학에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우리 '아들 셋'의 기를 죽일 이유도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비록 제한적이나마 내 진단이 맞다고 생각해 나는 '아들 셋'의 말을 이런 식으로 받았다. 나는 아이들을 하버드 스퀘어에 내려주면서, 그들의 보스턴 탐방에서 발을 뺐다. 아마도 아이들은 발걸음도 가볍게 미국의 역사가 살아있는 보스턴 시내를 쏘다녔을 것이다. 재미없는 아버지, 어딘지 숨통을 죄이는 듯한 아버지가 없으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내 귀를 극단적으로 거슬리게 하는, 남성 상징의 변형어인 'J'워드와 미국식 'F'워드를 신나게 섞어 날려가면서 제 멋대로들 '미국의 영혼'을 품평하고 진단했을 것이다. 오후 서너 시쯤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면서 앞이 깜깜할 정도로 비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날 억수만 없었더라면, 잠재적 경쟁자들의 심장에 깃발을 꼽는 기분으로 보스턴의 퍼브에서 아마도 녀석들은 충혈된 눈으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하버드 #미국의 영혼 #MIT #명문대 #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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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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