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과 결혼한다면 아버지가 날 죽일 거예요"

[몽골·러시아 여행⑦] 백야의 바이칼, 브리야트족을 만나다

등록 2011.09.12 16:33수정 2011.09.12 16:33
0
원고료로 응원
a

바이칼 밤 10시가 넘자 바이칼 수평선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 한성희


바이칼은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내내 인상을 찌푸리는 흐린 날씨였다. 활짝 갠 바이칼을 못 보는 것은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거라고 위안했다.

아침에 일어나 바이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이곳은 펜션과 별장들이 10여 채 정도 있는 곳이다. 몇 개 별장에 공동으로 담장이 둘러쳐 있고 바이칼로 가는 길이나 차가 나가는 입구엔 공동으로 쓰는 문이 있었다. 그런 담장이나 문은 여러 개 있다. 차가 드나들 때 나와서 문을 여는 관리인을 얼핏 보았을 뿐,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바이칼 어부거나 별장 및 펜션 관리인으로 일한다 들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식당으로 갔지만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이 식당은 이곳에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인 듯 한데 우리만 있다는 건 어떤 방문객도 없다는 의미다. 3달만 따뜻하다는 이곳에서 그 중간 시기에 말이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흐린 바이칼 주변을 돌아다니며 들꽃을 사진 찍고 흐린 바이칼의 알 수 없는 의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르게이 원장은 이곳은 러시아 대통령도 휴가 왔던 곳이라고 했다. 넓디넓은 바이칼의 숨겨진 비경 한 구석에 있는 휴양지라는 의미인가. 

세르게이 원장은 "오늘 바이칼에서 배를 타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배가 못 뜬다"고 알렸다. 바이칼은 바다처럼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면 배가 출항을 못 한다.

a

현지주민 집 홀로살고 있는 러시아 할머니 집. ⓒ 한성희


우리를 태우고 어디론가 향하던 세르게이 원장은 중간에 차를 세우고 상점으로 들어가 과일을 한 아름 사들고 왔다. 다시 차에 오르자 사예나가 말했다.

"현지 주민 집을 방문 할 거예요."


현지인 방문을 위한 선물인 듯 한데 사예나가 제대로 통역을 하고 미리 알려줬으면 우리도 선물을 준비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러시아어 간판이 달린 상점은 유리가 없어 가게인지 알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

a

젊은 날의 할머니 뛰어난 미모의 젊은 날의 할머니는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 한성희


러시아에서 흔히 보는 목재로 된 작은 현지인 집 앞에서 세르게이 원장은 차를 세웠다. 초 라한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개와 고양이, 꽃이 있는 자그마한 화단, 밖에 앉아있던 러시아인 몇 명이 우리를 주시했다.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은 10평이나 될까 싶은 작은 공간에 오래된 주방, 작은 침실, 조그만 거실 등 한눈에 보아도 어려운 형편이 보였다. 70대라는 할머니는 "몸이 아파도 병원이 멀어서 못 간다"고 한다. 가난한 독거노인의 생활이 현장이다. 젊었을 때 아름다웠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 평도 안 되는 초라한 주방이지만 예쁜 커튼이 있었고 꽃이 핀 화분이 거실을 장식하고 있었다.

a

현지주민 할머니 친척이라는 러시아 사람들이 찾아와 마당 원두막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한성희


아들은 죽었다는 러시아 할머니가 손수 짰다는 매트리스, 테이블 보, 방한화, 작은 페치카 외엔 살림살이가 없다. 사예나는 말했다.

"저 페치카는 추울 때 난방하고 요리하는 거예요. 예전에 많이 썼고 지금도 써요."

우리를 접대하는 40대 세르게이 원장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집과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금발의 아이들은 사랑스러웠고 잔디가 깔린 큰 저택은 8천 평이나 된단다. 유럽 귀족 성을 방불케 하는 집을 보고 모두 놀랐다. 가이드 역할을 하나도 한 게 없는 타니아니는 "세르게이는 너무 부자다, 브리야트는 중산층이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만 있다"고 비판했다.

세르게이 국립보훈원장은 자신의 월급이 우리 돈으로 160만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투자하는 일을 겸하는 투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워싱턴을 방문한 사진도 보여줬다. 자본주의로 들어선 브리야트의 경제 일면을 보는 듯하다. 국가가 알아서 해주던 시대가 바뀌고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태되는 현실이다.

나는 이렇게 가난한 현지인 집을 안내한 세르게이의 결정에 놀랐다. 솔직히 장애아동재활센터나 국립보훈병원을 둘러보면서 '전시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의 3.5배의 면적에 고작 1백만 명이 살고 있는 브리야트 공화국은 인구의 70%가 러시아인이고 24%가 브리야트 몽골족이다. 모피가 필요한 러시아인들이 바이칼에 거주하던 브리야트족과 통합한 건 350년 전이고 사예나는 브리야트족이며 고집스럽게 전통을 이어가는 가문의 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예나는 브리야트의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할 의무를 갖고 있다.

a

페치카 러시아 주민들이 사용하는 페치카 ⓒ 한성희


"요즘 브리야트족과 러시아인의 혼혈이 늘어가는 추세예요.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내가 러시아인과 결혼한다고 하면 나를 죽일 거예요. 모습은 브리야트인이라도 사고방식은 러시아인으로 가고 있어요."

잠깐 브리야트를 엿본 걸로 그 나라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브리야트인은 브리야트 내에서 약소한 위치에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강자의 입장에 있는 브리야트 정부가 브리야트 몽골족의 고집스런 전통을 지켜주는 쪽이 미래에 윈-윈 할 수 있는 정책임은 의심치 않는다. 전통을 지키는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이니까.

a

바이칼 바이칼 주변은 짙푸른 숲이 둘어싸여 더욱 아름답다. ⓒ 한성희


"화장실에 갇혀 '반야심경' 외웠어요"

"화장실에서 2시간 있으면서 무슨 생각 했어?"

화장실에 갇힌 걸 들은 K교수는 틈만 나면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반야심경 외면서 욕조를 들어 문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을 다스렸죠."
"어디서?"
"변기밖에 앉을 데가 있나요?"

시니컬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화장실에 갇혀있던 순간은 끔찍했다. 폐쇄공포증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실감했다.

a

식당 통나무로 만든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 한성희


"방에 들어오니 언니는 안 보이고 화장실 도어꼭지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 그리고 언니가 문 열라고 소리 지르는 걸 들었어."

나를 꺼내준 똑순이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손뼉을 치며 미친듯이 웃다가 배를 잡고 허리를 꺾으며 자지러졌다.

"저녁 먹고 다들 바이칼 해변으로 캠프파이어 한다고 나가는데 피곤하다고 혼자 들어왔거든. 내가 같이 갔으면 새벽 2시나 왔을 텐데 어쩔 뻔 했냐고."
"문이 잠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욕이나 하고 빨래나 하다보면 너 오겠지 했는데 다 마치고도 안 오더라. 변기에 앉아 있다가 돌아버리면 발작이 나서 문 열려고 별짓을 다 해봤다."

a

별장 별장과 펜션이 있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바로 앞에 바이칼이 펼쳐진다. ⓒ 한성희


변기에 앉아 똑순이를 기다리다가, 주위를 돌아봐도 열쇠구명을 쑤실 아무 도구도 없는 좁은 욕실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 서성였다. 샤워커튼 고리를 하나 빼서 쑤시고 돌려 문을 흔들다 안 되면 변기에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또 샅샅이 살피다가 비누곽이 철사재질로 된 걸 보고 억지로 곧게 펴서 틈에 들이밀어 돌려보다가 맥이 풀려 다시 변기에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내 침대에 머리맡에 던져둔 책이라도 있다면. 시간을 보낼, 할 일이 없는 거다. 재미없는 불경, 국어사전, 하다못해 성경책이라도 있었으면.

"내가 늦게 왔음 언니 어쩌려고 했어?"
"아마 한 시간만 더 있다 왔으면 미쳐서 문을 뽀개버렸을 거야. 그래도 방문을 안 잠근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방문마저 잠갔으면 어쩔 뻔 했겠니."

이 점은 우리나라와 다른 러시아식 문짝에 감사할 일이다. 몽골도 그렇지만 러시아도 문을 열고 잠그는 방식이 달랐다. 이 나라는 방 안에서 열쇠를 꽂아 두 바퀴나 왼쪽으로 돌려야 잠긴다. 밖에서 방문을 열 때도 열쇠를 오른쪽으로 두 바퀴 돌려야 열린다. 그런 방식이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 펜션이라 열린 채 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a

목재가옥 바이칼 주변의 러시아 주민 목재 가옥. ⓒ 한성희


그 직후, 바이칼을 떠날 때까지 화장실 문은 절대 닫지 않았다. 또 갇힐까 겁이 나서 종이를 접어 문 밑에 끼워 행여 문이 잠겨버리는 사고를 막았다.

비가 가늘게 뿌리는 밖을 나가 공동 담장 문을 열고 걸어내려 가면 호화 별장이 몇 채 있고 중간 중간 목재가옥이 있다. 펜션과 별장을 관리하는 현지주민의 집이다. 너무 허름해서 창고인 줄 알았는데 저녁이면 불이 켜졌다.

a

바이칼 목선 ⓒ 한성희


한적한 바이칼 모래밭에는 작은 목선이 끌어올려져 있는 게 더러 보였다. 황혼 무렵, 바이칼 호수와 모래밭에 있는 낡은 목선과 허름한 목재 창고를 바라보면 묘하게 알 수 없는 향수와 슬픔이 밀려들었다. 밤 10시나 돼야 수평선 근처에 해가 지기 시작하는 백야의 바이칼은 끊이지 않는 파도소리와 함께 낮의 잔영이 밤 12시까지 모래톱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바이칼 #러시아 #브리야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타이어 교체하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됐다
  2. 2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3. 3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4. 4 제대로 수사하면 대통령직 위험... 채 상병 사건 10가지 의문
  5. 5 그래픽 디자이너 찾습니다... "기본소득당 공고 맞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