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정말 성차별 하기예요?"

내게는 '미션 임파서블'이었던, 말썽쟁이 '성태' 이야기

등록 2011.09.25 12:09수정 2011.09.2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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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학생들과 자주 포옹을 한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과거에도 학생들을 안아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토닥여주고' 하는 말들이 성적인 접촉을 함의하기 전의 얘기다. 특히 남교사의 여학생에 대한 신체 접촉은 금기사항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래서 남학생만 안아준다? 그건 아니다. 요즘 남학생들과 자주 포옹을 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9월 초순경, 가을 바람이 막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얼른 저녁밥을 해치우고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런 수순을 밟고 가을 거리로 나섰는데, 아파트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빗방울이 후드득 땅에 떨어졌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나는 가을 하루를 공친 것이 적이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걷거나 뜀박질을 하거나를 반복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막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집으로 가서 우산을 들고 나올 것인지, 아니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을 믿고 우산 없이 그대로 저녁산책을 나설 것인지를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마치 손에 들고 있던 보물을 개울에 던져버리라는 신의 명을 받았다가 다시 그 명이 거두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가을 속을 걷기 시작했는데 어디쯤에서 성태(가명)를 만났다. 

녀석은 나에게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성태가 나에게 '불가능한 과업'이 된 것은 잠시도 입과 몸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그의 산만한 습성 때문이었다. 하긴, 요즘 학교에 그런 아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성태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일러도 불과 1초가 지나지 않아 다시 이전의 행동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잠자리의 기억력으로 알고 있는 8초까지는 봐줄 만한데, 1초는 내게 말 그대로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타일러도 타일러도 1초 만에 잊어버리던 성태 

그런 아이가 기적(?) 같은 행동을 보인 적도 몇 번은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자꾸만 수업진행이 어려워지자 다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수업을 끝내면서 그런 내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했고, 사과의 뜻을 담아 정중히 절까지 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질 만큼 사뭇 오랫동안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면서 녀석이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애들아, 나도 미안해!"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수업을 하다가 화를 내면 만 원을 주겠다고 아이들 앞에서 선언을 한 바로 그날이었다. 사실 이런 말이 교육적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혹시라도 화를 내버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서 가급적이면 삼가고 있던 차였다. 사실 처음에는 매를 들 생각이었다. 그 매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 닿을지 내 손바닥에 가 닿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이었다. 한번 흘린 말을 다시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하나의 방어책으로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해주었다.

"오늘 배울 단어 중에 'insight'란 단어가 있어요. 통찰, 혹은 통찰력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안을 뜻하는 'in'과 보는 것을 뜻하는 'sight'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지요. 그래서 통찰력이란 안을 들여다보는, 혹은 안을 꿰뚫어보는 힘을 말해요. 이것은 심리학 용어이기도 한데, 환자가 이전에 몰랐던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치료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그런 것을 뜻하기도 해요. 난 솔직히 여러분을 잘 몰라요.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일 수 있어요. 여러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여러분 자신이 잘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한번 실험을 해보고 싶어요. 여러분에게 만 원의 유혹을 이길 만한 인격적인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아이들과 이런 실험을 자주 한다. 그때마다 내가 이기는(?) 확률은 거의 백 퍼센트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감동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과거로 돌아가 있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런 실험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진짜 모습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것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산책길에 만난 녀석을 꼭 안아줬더니...

그날 비가 그친 길에서 만난 성태는 나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나는 엉겁결에 인사를 받았다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녀석 앞에서 잠깐 엉거주춤 서 있다가 그를 안아보았다. 덩치가 커서 좀 더 깊이 안기 위해 가슴을 더 들이대고 팔을 뻗어 힘껏 당겨야만 했다. 그렇게 녀석을 껴안은 체 사뭇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도 내게서 몸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깊은 포옹을 풀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수업시간에 늘 떠들지 말라고만 해서."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나쁜 놈이죠."
"나쁘다니? 내가 보기에 넌 좋은 녀석이야. 수업시간에 조금만 덜 떠들도록 노력해봐. 너 때문에 선생님도 많이 힘들어."
"예. 선생님, 앞으로는 절대로 떠들지 않겠습니다."


성태를 보내놓고 나는 무엇보다도 절묘한 타이밍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만약 가을바람이 불어주지 않았다면, 내가 저녁 산책을 나오지 않았다면, 때마침 비가 오지 않았다면, 비가 그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우산 없이 산책을 다시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 기분이 좋아서 그랬을 테지만, 한 아이에 대한 관심이 전 우주적으로 기울어진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이 아이가 수업시간에 떠들까? 떠들지 않을까? 물어보나마나 대답은 전자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녀석이 또 정신을 놓고 떠들고 있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춘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른다.

"야, 너희들 떠들지 마. 떠들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엔 저 말고는 별로 떠드는 아이들이 없는 것 같은데도 녀석은 급우들을 향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를 바라보는 눈은 영락없이 순진무구한 황소의 눈을 닮았다. 며칠 전에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녀석이 앞으로 달려오더니 내게 몸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가만 보니 한번 안아달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아이와 또 한 번 깊은 포옹을 해야만 했는데 몇 명의 남학생들이 자기들도 안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여학생이 이렇게 항의(?)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정말 성차별 하기예요?"

덧붙이는 글 | * 안준철 기자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 이 기사는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안준철 기자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 이 기사는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순천효산고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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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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